• 사업가가 된 흑인 갱, ‘아메리칸 갱스터’
        2008년 01월 03일 04: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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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는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신작이다. 스코트 감독은 감각적인 화면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일컬어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로 베트남전 당시 미국 암흑가의 한 단면을 그대로 그린 듯한 느낌의 영화다.

    이건 다시 말하면 영화가 그렇게 재밌지는 않다는 뜻이다. 다큐멘터리가 재밌을 리 없지 않은가. 미국에선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미국 사람들한테야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진면목이니 관심이 남다를 수도 있겠지.

    이 영화는 명작으로 분류되는 여느 갱스터물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억 달러는 천신만고 끝에 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따위의 전개는 없다는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긴박한 편집도 없다. 옛날부터 익히 보아왔던 전통적인 스타일의 갱스터물이다.

       
     
     

    이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첫째, 마약왕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흑인이라는 설정이다. 60년대와 흑인, 무하마드 알리, 소수자 등이 겹쳐진다.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에서 흑인의 각성을 상징하는 권투선수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인종차별을 경험한 흑인이다. 커서는 이탈리안 마피아와 대결하며 백인 경찰에게 ‘삥’을 뜯긴다. 당시 흑인 민권 운동이 상징하는 변화는 주인공이 마피아의 기득권 질서를 뒤흔드는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둘째, 마약왕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기업가형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메리칸 갱스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국의 무엇무엇을 그렸다는 식으로 읽히기 쉽다.

    아메리칸 스탠더드 = 글로벌 스탠더드

    이 영화에서 그려진 흑인, 유대인 등 인종문제와 당시 만연한 부패, 베트남전 등을 두고 미국의 역사를 재현해냈다는 둥, 혹은 주인공의 흥망담을 일컬어 아메리칸드림을 그렸다는 둥 읽어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려진 마약왕의 모습이 의미 있는 것은 그가 무국적인으로 보인다는 점에 있다. 그냥 기업가다.

    제목은 ‘아메리칸 갱스터’다. 그렇게 아메리칸 갱스터를 그리고 났더니 무국적 기업가가 돼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아메리칸 스탠더드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꼭 미국이라고 하기보단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가 가장 성한 곳이 미국이니 아메리칸 갱스터는 곧 자본의 은유가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스카페이스’의 알 파치노처럼 화끈하지 않다. ‘대부’처럼 총기난사가 난무하지도 않는다. ‘프렌치커넥션’같은 카체이스 씬도 없다. 점잖은 양복을 입고 일을 할 뿐이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주인공은 기업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렷하게 기업가로만 갱스터를 그린 영화는 처음이지 싶다. 리들리 스코트쯤 되는 감독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등의 거장이 버티고 있는 갱스터물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을 거다. 기업가형 갱스터라는 컨셉이 이 영화의 확실한 차별점이다.

    야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장난을 치지 않았다. 손쉬운 액션이나 ‘편집놀이’ 등을 첨가하지 않고 영화 전편을 건실하게만 끌고 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수 대중이 몰려드는 흥행은 힘들 수도 있다. 재미가 별로 없다는 점을 빼면 나름 볼만은 하다. 재미없는 것이 절대 용서가 안 되는 분들에겐 촉수엄금물일 수 있겠다.

    이 영화는 도입부부터 갱이 대형할인마트의 득세를 한탄하면서 시작한다. 다른 갱의 위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형할인마트로 인해 중간상들이 무너졌다는 말을 갱이(!)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한탄하는 구식 갱은 등장하자마자 바로 죽고 주인공인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톤)가 대두한다.

    마약업계의 이마트

    프랭크 루카스의 전략은 마약업종에서의 직배체제 확립이었다. 그는 마약이 생산되는 태국과 직거래 루트를 튼다. 유통혁명이다. 마약계의 이마트다. 그리고 두 배 순도의 제품을 판다. 품질혁명이다. 그리고 절반의 가격에 판다. 가격혁명이다. 그리고 자신의 제품에 ‘블루 매직’이라는 브랜드를 부여한다. 마약계의 브랜드 혁명이다.

    소비자들은 명성 높고 신뢰성 높은 브랜드 마약을 저렴한 가격에 직거래, 대량 공급 체제를 통해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프랭크 루카스는 업계의 기린아가 된다. 그러자 기존 마피아가 루카스에게 접근해 제휴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 총싸움은 없다. 비즈니스 협상을 통해 루카스가 제품 공급과 가격 유지를 약속하는 대신에 다른 갱들은 전국에 걸친 유통망을 제공하면서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본 형성사라 할 만하다.

    마약을 팔아 자본을 형성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이 한 짓이다. 다른 나라들도 인신매매 등 ‘갱스터’ 이상의 짓을 하면서 초기 자본을 축적했다.

    후발주자인 독일은 직접 마약을 팔진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영국의 상표권을 침해하며 자국의 상품을 팔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프랭크 루카스는 자신의 브랜드인 ‘블루 매직’ 상표권 침해에 질색을 한다.

    오늘날에는 갱스터나 마약을 팔지 초국적 자본이 직접 마약장사를 하진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마약보다 더 무서운 전쟁 자체를 팔거나, 아니면 완전히 안전하지 않은 약물을 제3세계에 팔거나, 불치병의 위험이 있는 소고기를 대량 제조판매하면서 자본을 축적한다.

    옛날에 영국은 중국이 마약장사를 막으려 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갱스터들도 자신들의 장사를 방해받으면 전쟁을 일으킨다. 요즈음의 초국적 자본은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우아하게 소송을 건다. 바로 투자자 국가소송제다.

    ‘우아한 세계’는 복잡해서 그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세계, 가장 직접적인 세계가 시스템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모델로 적합하다. 그것이 바로 갱스터의 세계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세계. 초국적 자본과 국제 조약의 세계는 그들이 어떻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지가 잘 안 보이는데 반해 갱스터의 세계는 한 눈에 보인다. 그들은 우아하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프랭크 루카스는 일반적인 갱스터물의 무뢰한처럼 굴지는 않는다. 그는 극히 냉정하다. 동시에 사람에게 부과되는 윤리적 규제들을 무시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자본에게도 윤리적 당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자본은 극히 냉정해서 인간 같은 열정 따위도 없다. 그러므로 냉정한 프랭크 루카스는 살아 움직이는 자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자신이 번 돈을 향유하지도 않는다. 과시적 소비 따위의 욕망은 그의 사전에 없다. 자본도 스스로 향유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은 오로지 증식과 축적 뿐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시합 때 딱 한 번 인간적인 행위, 즉 과시적 행위를 하는데 그때가 바로 몰락의 시작이 된다.

    펀드 투자자는 갱스터

    가장 자본에 가까운 자본은 자본 그 자체인 자본이다. 숫자로만 이루어진 자본, 바로 금융자본이다. 사람들은 펀드를 통해 여기에 참여한다. 펀드 수익률에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 펀드 수익률이 조금 더 올라가기 위해 기업이 정리해고를 하고 비정규직을 늘려 노동자의 가족들이 죽어난다고 해서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의 행태는 그런 금융자본을 닮았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때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기업 재무제표와 투자 수익률만을 따지는 투자자의 행태와 놀랍도록 닮았다. 자본은 인간에 대해 갱스터의 역할을 한다. 프랭크 루카스는 갱스터로서 자본의 성격을 구현한다.

    영화 속에서 프랭크 루카스보다 그를 쫓는 형사의 생활이 오히려 더 문란하다. 형사는 자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방종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영역인 성적 문란 행위도 악당인 프랭크 루카스보다 형사의 몫이 된다. 프랭크 루카스는 이윤을 추구할 때 빼놓고는 매우 모범적인 사람이다. 자본에겐 인간적인 일탈의 욕망이 없으니까.

    프랭크 루카스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흑인으로서 자신이 당한 차별에서다. 그는 여기에서 ‘악에 받쳤다.’ 한국인도 범국가적 차별행위인 양극화에 악에 받쳤다. 윤리고 뭐고 무조건 경제만 살려달라고, 이윤만 안겨 달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펀드에 가입, 투자자가 된다. 투자수익률은 기업을 쥐어짜고 기업은 노동자를 쥐어짜게 된다. 갱스터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인간성이 사상되고 이윤 원리만 판을 치는 사회. 그것은 또한 마피아의 세계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시장 원리만을 중시하는 아메리칸 스탠더드의 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메리칸 갱스터’는 ‘아메리칸 자본주의’의 은유, 주인공은 ‘아메리칸 자본’의 인간적 구현이 된다.

    인간이되 인간 같지 않았던, 가장 자본에 가까웠던 사람의 이야기.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정직, 근면, 성실하게 업무를 봤던 갱스터의 이야기. ‘아메리칸 갱스터’는 그런 이야기를 보여준다. 90분짜리 롤러코스터도 좋지만 이런 영화도 때로는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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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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