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 L은 'N L들'로 분화돼야 한다
        2008년 01월 03일 08: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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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NL을 한 덩어리로 보지말고 그것을 구성하는 이질성에 주목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NL들’ 내부로부터 ‘새로운 운동을 잉태하지 못하는’ NL에 대한 비판이 나와야 되며, 그럴 만한 힘이 NL 진영 내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또 NL의 중심 명제에 대한 재해석과 재창조를 통한 새로운 운동 노선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중심명제는 ‘반식민성-반식민지주의’와 ‘민족-민족주의’로 이 둘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NL운동의 역사적, 변혁적 힘의 핵심은 ‘반식민지주의’에서 나오며, 남한에서는 ‘민족주의자’들에게 이것이 전유돼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새로운 운동 창출의 핵심은 ‘반식민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이라고 필자는 강조한다.

    이론적이고 구체성이 다소 떨어지며 읽기도 쉽지 않은 글이지만, 한때 ‘NL 운동’에 몸 담았다가 현재는 이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며,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필자의 이 글이 최근 민주노동당 내부 논쟁에 한 시사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레디앙>에 싣기로 했다. <편집자 주>

    민주노동당의 대선 평가와 당 혁신의 모든 논의가 자주파에 대한 입장의 문제로 전환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논의 지형이 자주파와의 동거 혹은 분리라는 이분법 위에서 작동하는 이유는 평가와 혁신의 모든 논의가 구체적인 실천적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선택의 문제로 논의 지형이 발전한 것은 이것이 민주노동당 위기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극단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 글은 다시 ‘운동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들의 내적 차이를 조직할 것을 요구합니다.

    길이 없는 곳은 모든 길로 향할 수 있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모든 길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실천을 위한 답이 아니라, 실천을 만들어내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1. NL운동의 긍정적 재구성 : NL운동의 ‘내적 차이’와 이질성

    나의 제안은 NL 운동공동체를 이질적 공동체로 분자화하여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NL 운동공동체를 단일한 하나의 대오로 파악하게 되면 그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차이들은 외부와의 경계와 대립 속에서 사장되거나 내부에서 작동하는 동일화의 압력에 의해 해체됩니다.

    NL 운동공동체는 실제로 서로 모순적이며 갈등하는 두 개의 중심 명제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명제의 재해석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과 영역의 운동으로 발전할 잠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잠재성에 기반을 두고 NL운동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연대의 방법론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는 세심한 배려와 구분을 통해 ‘NL’이라고 부르기 전에 ‘NL’을 구성하는 다양한 이질성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기존의 운동 질서 안에서 새로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가려는 운동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배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심한 배려와 구분을 통해 ‘권력’과 ‘운동’을 구별-분리해야만 하며, 그들 모두를 하나의 범주로 이해하는 일종의 ‘범주적 폭력’에 반대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분리와 동거라는 실천적 이분법 이전에 고려되어야 하는 운동의 윤리적 요청이며, 우리들의 운동을 NL과 PD라는 오래된 대립구도 속에서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2. “차이를 창조하라, 그렇지 못하면 떠나라”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잉태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프롬의 이 표현을 빌려, 운동을 잉태하지 못하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운동을 잉태하지 못하는 운동은 그 자체가 박제화된 운동이며 화석화된 운동입니다.

    박제화되고 화석화된 운동은 이미 기존 질서의 일부입니다. 운동은 자신이 대항하는 외부와의 경계와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운동의 생산에 의해 정의되어야 합니다.

    운동은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질서의 일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운동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해방적 상상력과 기획의 현실화를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운동이 단지 대상과 혹은 다른 운동과의 ‘외적인 차이’에 의해 규정되고 파악되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운동은 멈추게 됩니다.

    우리는 운동 그 자체를 운동의 대상으로 사유하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것만이 운동의 화석화를 방지하고 운동 그 자체의 해방적 잠재력을 극한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운동은 끊임없이 ‘내적인 차이’를 조직해 내야만 하며, 그 ‘내적인 차이’에 의해 새로운 운동들이 기존의 질서로부터 벗어날 때만이 운동은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운동, 내적인 차이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 경계를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이러한 운동을 지지합니다. 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운동공동체인 ‘NL’과 ‘PD’라는 양 운동공동체의 역사성을 인정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질서를 거부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의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들의 질서 자체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상상력이며, 그러한 새로운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운동을 파악하고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흐름입니다.

    나는 ‘PD’의 이름으로 ‘NL’을 향해 진행되는 비판이 아닌, 반대로 ‘NL’의 입장에서 새로운 ‘NL’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새로운 운동을 잉태해내지 못하는 ‘NL’이라는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요구합니다.

    1948년체제에 대한 저항과 대항 이래 근본적 운동혁신과 새로운 운동을 잉태하고 있지 못한 ‘NL’이란 운동 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려는, 나의 표현을 빌면 ‘N-L’운동을 지지합니다. 이 운동은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발견될 수 없다면 ‘발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발명’이란 언급을 통해 이 운동이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시에 이러한 차이의 창조를 위한 내적인 힘이 이미 ‘NL’운동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은 기존의 운동 권력과 대항하며 자신의 존재를 현실화시킬 것입니다.

    그 힘과 결합하는가, 결합하지 못하는가의 지점에 NL로부터 탈주하는 새로운 NL의 등장이 가능한가의 핵심이 존재합니다. 새로운 운동의 힘은 이미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 힘과 대면하고 그 힘과 결합해야 합니다. “차이를 창조하라, 그렇지 못하면 떠나라!”

    3. 반식민성 : NL운동 중심명제의 재해석

    ‘내적인 차이’의 창조를 위해 NL운동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NL운동 일반에 있어 익숙한, 너무나 익숙하여 사고의 판단중지 영역에 자리 잡은 중심명제들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재해석은 재창조로 이어집니다. 재해석은 하나일 수 없습니다. 재해석은 늘 ‘재해석-들’로 존재하며, ‘재해석-들’은 내가 기존의 해석 및 질서와 어긋나는 모든 지점에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운동은 그러한 ‘재해석-들’의 교통을 통해 새로운 ‘공통적인 것’으로서 운동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재해석을 승인하지 않는 운동, 자신에 대한 절대적 승인과 절대적 거부만을 허용하는 운동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닙니다.

    모순 없는 논리체계가 불가능하듯이, 모순 없는 운동의 이론체계도 불가능합니다. NL운동의 이론체계 역시 서로 갈등하는 두 개의 원리에 의해 구성된 운동입니다.

    NL운동은 ‘반식민성-반식민주의’라는 계열과 ‘민족-민족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원리에 의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독자적인 중심성이며, 독자적인 계열을 생성합니다. ‘반식민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한 것은 특정한 역사적 산물로 이해되어야 할 뿐, 그 둘은 필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NL운동이 가진 역사적, 변혁적 힘은 바로 ‘반식민주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민족주의’는 이 힘을 전유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민족-민족주의’ 계열에 의해 전유된 이 힘을 새롭게 복원하고 ‘반식민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운동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운동을 창안하는 과정의 핵심은 ‘식민성’ 그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식민성’을 민족과 민족의 대립구도 속에서만 파악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민족주의에 포섭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식민성을 단순한 민족 혹은 국가의 경계가 아닌 보다 다차원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민화된 모든 영토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합니다. 우리들의 식민화된 영토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 의해 구획되고 식민화된 영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차별한 다수의 억압선들의 교차에 의해 구획되고 식민화된 영토, 그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는 모든 운동을 우리는 ‘반식민성’이란 테제로 옹호하고 그 힘과 결합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반식민주의 행동주의자의 길입니다.

    4. “나의 운동을 해방하라”

    국가와 자본, 그리고 민족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과정은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진영, 최소한의 조정과 통합을 위한 중앙집중적 조직, 다시 말해 당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저항과 운동이 해체하려고 하였던 그 ‘괴물’의 형상을 띠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미래가 되기 위해서, 바로 지금-여기에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억압과 권력들에 대한 ‘전선’을 그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운동을 해방하라’는 구호를 내걸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마주하는 전선에서 ‘우리’를 해체하기 위한 구호가 아니라 마주하는 적과 닮아가는 ‘우리’에 대항하기 위한 구호입니다. 이 구호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의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 두 개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운동, 이 두 개의 운동이 서로 분리되어 진행될 때, 오지 않는 최종 목적을 위해 새로운 주체형성을 위한 ‘지금-여기’의 해방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억압할 때, 우리는 새로운 운동을 창안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운동과 조직이 ‘괴물’의 형상을 따라 조직되는 것에 스스로 저항하기 위한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경찰’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해야만 합니다. 만약 NL운동이 이러한 운동이 될 수 없다면, NL운동은 이미 실패한 것이거나,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식민화’하는 모든 권력관계로부터 나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 그것이 모든 주체 형성의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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