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민주 국가, 사회 국가를 향하여
        2007년 12월 27일 04: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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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이번에 펴낸 책,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후마니타스)는 한국 사회가 재설계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 국가’를 그 열쇠말로 제시한다.

    <레디앙>은 진보정치연구소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책 내용 가운데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해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싣는다. 이 책의 서문은 조승수 연구소 소장이 썼으며 내용은 장석준, 성은미, 조진한, 이상호, 정택상, 강병익 연구위원들이 맡아서 썼다. <편집자 주>

    3절 ‘강한’ 민주 국가, 사회 국가를 향하여

    비정규직 증가, 청년 실업, 영세 자영업 부도, 농업 붕괴, 부동산 대란 …. ‘양극화’라는 말 뒤에 자리한 지금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다. 이들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대응 방안도 날이면 날마다 신문 지상을 장식한다. 하지만 응급 처방이나 개별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 국가, 시장 국가가 버티고 있는 한.

    위에서 우리는 ‘약한’ 민주화의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이 자본 국가라고 진단했다. 그럼 자본 국가에 맞서려면 어떤 원칙에서 출발해야 하겠는가? ‘약한’ 민주 국가, 즉 민주주의의 허약성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말했다, “민주주의가 문제를 갖고 있다면 그에 대한 처방은 바로 더 큰 민주주의”라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20년 간의 민주화의 맹점과 한계에 도전하는 ‘강한’ 민주주의다.

    ‘약한’ 민주주의는 대통령 직선제를 민주화와 등치시킨다. 보수 정당끼리 정권을 교체하고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걸 바라보는 게 민주화라고 한다. 그러나 ‘강한’ 민주주의는 노동 현장과 거리의 사람들이 직접 권력을 쥐지 않는 한 민주화는 완성된 게 아니라고 본다. 모든 결정 과정에서 대중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못 받는다.

    ‘약한’ 민주주의는 청와대나 국회 같은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재벌 회장실이나 공장 담벼락 앞에서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 때문에 자본 국가가 들어설 여지를 항상 열어둔다. 하지만 ‘강한’ 민주주의는 가진 자의 권력에 손을 대지 않고서 그게 무슨 민주주의냐고 단언한다. 독재자라면 총칼의 독재자뿐만 아니라 황금의 독재자도 용납할 수 없다.

    ‘약한’ 민주주의는 자본 주도의 세계화에 속수무책이고 되레 그것에 편승한다. 자본의 이권 확대에 함께 하는 반면 대중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데는 무능하다. 그래서 ‘약한’ 민주주의 아래서 서민들의 입에서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허나 ‘강한’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민중의 생존권 더 나아가 행복할 권리를 가장 우선한다. ‘강한’ 민주주의는 다름 아니라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다.

    ‘강한’ 민주 국가의 다른 이름, 사회 국가

    이제부터 우리는 ‘제2의 민주화’의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강한’ 민주 국가를 세워야 한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딛고 7년 만에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을 물리치며 민주화를 시작했던 것처럼, 사회 양극화의 폐허 위에서 우리 세대의 모든 열망과 역량을 모아 ‘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야 한다.

    ‘약한’ 민주 국가가 자본 국가, 시장 국가를 불러들인 것과는 달리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강한’ 민주 국가는 자본 국가, 시장 국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자본 국가와는 정반대되는 그 지향을 우리는 ‘사회 국가’라 부른다. 즉, ‘강한’ 민주 국가의 또 다른 이름은 ‘사회 국가’다.

       
    ▲ ‘사회주의 국가’를 외치는 베네수엘라 인민들 (사진=로이터/뉴시스)
     

    사회 국가는 민중의 생존권 및 행복추구권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권리들을 소유권이나 경영권 같은 다른 권리보다 위에 둔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에 따라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구축한다.

    자본 국가에서 소수의 자본 소유자들이 대다수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것과는 달리 사회 국가에서는 사회 전체의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본 소유자들의 권한을 제어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기득권 자체를 해체해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되돌린다.

    ‘사회 국가’는 본래 독일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제정된 독일 각 주의 헌법은 ‘사회 국가’나 그 비슷한 말을 즐겨 사용한다. 바이에른 주 헌법 제3조는 바이에른 주가 ‘사회 국가(Sozial staat)’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헌법 제43조는 ‘사회적 인민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독일 전체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제20조 1항은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 사회적 연방국가”라고 규정한다.

    이웃 나라 프랑스도 헌법에 비슷한 개념을 담고 있다. 1946년 제정된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은 제1조에 ‘사회적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담았다. 이 제1조의 정신은 현재의 제5공화국 헌법에도 계승되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1조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분리 불가능한 세속적, 민주적, 사회적인 공화국이다.”

    독일, 프랑스, 베네수엘라의 ‘사회 국가’

    21세기 벽두부터 급진적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도 ‘사회 국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1999년 새로 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 제2조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법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 국가(a Democratic and Social State)로서 생명, 자유, 정의, 평등, 연대, 민주주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인권과 윤리, 정치적 다원주의의 보편적 실현을 법질서와 집행의 최고 가치로 삼는다.”

    독일식의 ‘사회 국가’ 개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복지 국가’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복지 국가의 법률적, 법학적 표현이 사회 국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보면, 이 이름을 굳이 서유럽 복지 국가에만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하는 이 나라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이 돼 있는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는 명칭으로 ‘사회 국가’를 채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사회 국가’도 이러한 폭넓은 스펙트럼을 전제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일정하게 조절하면서 사회권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북유럽 복지 국가들도 사회 국가의 한 유형이라 생각하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사회 체제를 구축해서 사회권을 실현하려는 베네수엘라 같은 사례도 사회 국가의 또 다른 유형이라고 본다.

    어쨌든 이 두 유형 모두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한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사회 전체를 자본의 독재 아래 헌납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와는 적대 관계에 있다.

    국내에서는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사회학)이 우리와 같은 시각에서 ‘사회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다. 조희연은 박정희의 국가자본주의 축적 모델과 신자유주의 양극화 축적 모델을 동시에 극복할 급진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이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나는 박정희와 싸웠던 민주세력들이 주도하는 민주정부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와 대척점에 서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박정희 모델의 변형된 재생산정부라고 판단한다.

    이를 넘어서지 않는 한 진정으로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대안을 가지고 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축적 모델은 단순히 서민이나 하층대중만이 아니라 중간층 중산층마저 몰락시키는 총체적인 양극화 모델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사회국가는 바로 이러한 총체적 재구성의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 조희연, 「진보논쟁에 이어, ‘진보적 희망의 언어’를 위하여」, 진보 싱크탱크 연합토론회 발제문, 2007. 3. 22.

    우리가 제시하는 ‘사회 국가’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현재의 자본 국가, 시장 국가에 맞서는 대안의 밑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포괄하는 이름이 곧 ‘사회 국가’다.

    사회 국가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서유럽형 복지 국가도 있고, 다양한 사회주의적 시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로 다른 유형들을 꿰뚫는 공통의 특성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권리들의 최대한의 실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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