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과 북은 최선의 파트너가 아니다”
        2007년 12월 24일 10: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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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코리아 또는 한반도와 거기에 살고 있는 코리안, 또는 한민족이 시간을 초월해 영속적으로 존재하며 그 주체의 정상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설사 어렵더라도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18세기의 한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잇는 오늘날의 조중 국경 이남과 거의 다르지 않는 지역에 혈연적, 문화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 고구려는 유목민족 기병을 이용하여 한반도와 중원에 대한 약탈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민족이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다고 볼 수도 없다.

    한국이라는 명칭의 유래 한(韓)은 우리 역사에서 마한, 진한, 변한 등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 말의 유래는 신채호에 따르면 몽골 내지 만주 등의 유목민이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칸과 같은 것이라고 하며 오늘날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등 유목민의 나라 이름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한민족이 만다린을 사용하는 중국의 주류 한족(漢族)과는 역사적, 혈연적, 문화적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증거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는 중국의 확장사이다. 이에 반해 한민족의 정체성은 중국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은 중국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

    황하 유역에서 한자(漢字)와 만다린을 사용한 이래 정복과 피정복을 거치며 중국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중국인은 증가했다. 그런 과정에서 양자강 이남, 내몽고, 신강, 만주, 그리고 최근에 티벳까지 중국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한민족과 문화적으로, 혈연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고 고구려와 여러 가지로 동맹 및 반목했으며 한때 한반도에 출몰했던 말갈, 거란, 여진, 만주족은 이제 중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로 내려와 남았거나 계속 한반도에 살아왔던 사람들은 한민족이 되었고 코리아, 한반도, 조선이라는 중국과 구분되는 공간을 형성했다.

    코리아라는 공간은,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혈연적 동질성을 가지는 집단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최근의 모습을 띤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는 북방 민족의 침략의 역사다.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원(中原)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다. 그러면 북방 민족이 쳐들어온다. 중원은 혼란에 빠진다. 북방 민족은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국가를 형성하여 토착세력과 항쟁한다.

    그러다가 대체로 강건한 북방 민족이 세운 왕조가 중원을 통일한다. 혼란기를 통해 성장한 무장력과 행정력을 바탕으로 넓은 중원에 강력한 통일 왕조가 지속된다.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왕조의 행정력은 쇠퇴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쳐들어오거나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중원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중국사의 첫 번째 순환이 일어난 것이 진, 그리고 한의 중원 통일이다. 이렇게 성장한 한 왕조는 아마도 만주 및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역사책은 BC 108년 위만조선의 패망하였고 한사군의 설치되었음을 적고 있고, 기원 후 3~4세기까지 한반도 내에 낙랑국 또는 낙랑군의 이름으로 중국 문화권이 존재했던 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만주, 몽골 고원에 이르는 지역은 황하 유역의 중원의 왕조가 직접 통치하기에는 너무 먼 지역이었다. 그리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제외하고는 이주민이 살기에는 척박한 지역이었다.

    한민족의 기원이라고 하는 고조선은(쥬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이 쥬신의 음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근거지가 만주 어딘가라고도 하고 평양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경우든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한 왕조와 대립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문제의 원정을 통해 그 세력은 일격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가 주장하듯이 상당한 실체가 그 이전에 존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에는 강력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조선 실체 불분명

    고구려는 이런 상황에서 성장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기록은 축소되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데 어쨌든 험한 산악 지형을 바탕으로 한사군 및 여러 중국 세력과 충돌하며 고구려는 성장했다.

    고구려가 여타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와 대비되는 것은 약탈 및 진출의 방향이 중원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것이었다. 평양 주변 낙랑의 중국 문화 지역을 획득하여 강화된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백제와 만나고 마침내 4세기말 광개토왕 시기에 이르러 만주 지역의 강자가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백제 및 왜 세력을 제압하였다.

    북방 민족의 대거 유입 이후 중원이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다. 한반도 평야 지대의 물산과 만주 지역의 유목 기병의 연합 및 지형을 이용한 강력한 수비전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만주 또는 몽골 지역의 강자들이 중국의 군대와 싸워 이기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의 승리를 특별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무적의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에서 패퇴하듯, 따뜻한 평야 지역의 대규모 원정군은 추운 지역에 와 패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북방의 정복국가로서 고구려의 특징은 중원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북방 민족의 진출 이후 강자가 득실거리는 중원으로 가지 않고 한반도로 향했다. 고구려에게 신라, 백제, 가야 등이 만주 지역의 부여, 말갈, 거란 등에 비해 특별히 더 가깝거나 의미 있는 존재였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당시는, 광개토대왕비와 백제 멸망시 부흥운동에서 보듯, 백제가 일본 열도의 세력과 연합하여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분명 지금처럼 ‘코리아’라는 정체성을 가진 한반도라는 공간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신라, 백제, 가야 vs 부여, 말갈, 거란

    중국사의 두 번째 순환은 수 그리고 당이라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수립되면서이다. 한반도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신라는 나당연합을 형성하였다. 나당연합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시기의 전투에서 백제와 연합한 일본 열도의 세력은 최후의 패배를 당하고 일본 열도와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단절되게 되고 백제의 귀족들이 일본으로 망명한다.

    나당연합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중원은 통일된 반면 고구려가 분열되었을 때 승패는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평양은 초토화되었고 많은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중원의 지배자 당은 변방의 골칫거리가 너무 많았다.

    여타 북방 민족과 연합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원정이 필요했지만 토착 세력의 강고한 저항을 무릅쓰고 한반도를 직할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의 세력은 곧 한반도를 떠났고 만주의 고구려 잔류 세력이나 몽골, 서역 등의 유목민과 결전을 벌였다. 8세기가 되면 상황은 중원의 당, 옛 고구려 땅에는 발해, 남쪽의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구분되며 한반도 주변 세계의 원형이 성립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한민족’이라는 동질적 정체성이 어느 정도 확립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에는 오히려 경주의 세력이 나머지 세력을 정복했다는 측면이 강했고 중앙권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청해진에 근거를 둔 장보고가 경주를 유린하고 정권이 교체된 것이나, 신라말 다시 백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견훤이 등장하고, 고구려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궁예가 등장하는 등의 사건은 고려나 조선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이겠지만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근 천 년 동안 한 번의 지방반란도 중앙정부를 전복시키지 못했고 2년을 버틴 지방반란 조차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된 한반도의 국가는 김유신이나 김춘추보다는 왕건의 공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그는 한반도 중부에 근거한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고 평양을 재건했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칭하고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될 수는 없었다. 농업과 상업에 기반한 따뜻한 남쪽의 고려는 수렵과 약탈에 기반한 고구려와 같은 전쟁국가가 될 수 없었고 거란, 말갈 또는 여진을 휘하에 두고 만주를 경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함으로써 거란, 여진이 고구려처럼 한반도를 약탈하며 남하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요와 금은 중원으로 진출했고 한반도는 고려 치하에 무장 평화를 유지했다. 한반도의 정체성은 이렇게 성립한다. 외부에 이 지역의 이름이 고려를 따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징키스칸이 나타났다. 그의 출현 이후 이른바 ‘세계사’가 출현했다고 하는데, 한반도 역시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몽골이 침략했을 때 고려는 강력히 저항한다. 강화로 이동한 고려 왕조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강화도로 상륙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는 상당히 오래 버텼다. 이 점은 그러나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같은 전승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몽골의 전쟁 방식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불과 100만 남짓으로 전 세계를 경영하는 몽골은 매우 일관된 성곽 함락 작전을 사용했다. 성 주변을 초토화시켜 공포감을 자극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성으로 피난한다. 성으로 피난한 난민은 한편으로 식량을 고갈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공포감을 자극해 사기를 떨어뜨린다.

    강화도, 난민으로부터 왕조를 지키다

    이를 바탕으로 몽골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킨다. 강화의 좁은 바다는 몽골 기병보다는 오히려 고려의 난민으로부터 왕조를 지켜주었다. 결국 고려 왕조가 항복한 것은 1260년부터 10년 간의 몽골의 원정 때이다.

    이 때 몽골은 자기들의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강화 상륙작전보다는 한반도 내에서 지속적인 민간인 학살작전을 수행했고 고려의 굴복을 기다렸다. 그리고 10년 만에 정변과 함께 고려는 굴복한다. 그리고 100여 년이 넘는 반식민지기간 동안 고려는 한편으로는 수탈을 당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과 결탁한 귀족에 의한 극심한 부패를 경험한다.

    약 100여 년 후 몽골은 쇠퇴하고 중원에는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것은 고려에게 자주성 회복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몽골의 평화가 끝났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고려는 혼란에 빠진다.

    여진족 거주 지역 출신으로 원의 군사기술에 밝은 무인 이성계(여진족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는 불분명하고 적어도 여진족 세력과 연합한 것은 분명하다)와 신진 세력인 정도전 및 성리학자의 조선 건국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회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귀족의 특권 폐지, 기존 토지 소유권을 무시한 전면적 토지 국유화, 과거제를 통한 실력 위주 관료제 구성, 기존 종교인 불교에 대한 탄압 등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유사한 측면이 여러 가지 있다.

    조선은 국가정체성 면에서 고려와는 극명하게 대립된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여, 거란, 여진과는 대립하면서도 대등하게 관계를 맺었던 데 비해(요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거란, 여진은 고구려 국민이었으니까), 조선은 사대주의, 소중화, 화이론을 도입하며 스스로를 오랑캐가 아닌 문명국으로 정당화하며 여진과의 단절과 쇄국정책을 단행했다.

    어쩌면 이는 이성계, 이방원 자신이 여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한반도 내에 기반을 둔 중소 지주들인 신진사대부 출신 관료 장악을 위해 자기 부정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북방 세력이 세운 조선

    실제로 조선 초기 이시애, 이징옥의 난 등 북방의 반란이 있었고 남이의 경우에서 보듯, 북방에서 성장한 무인 세력에 대한 중앙 관료의 불신도 깊었다. 즉 조선은 북방 오랑캐가 왕이 되어 중원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소중화’의 나라가 되었고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여진을 오랑캐로 자신을 ‘소중화’로 개념짓게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대주의는 안보 현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와의 관계가 국방의 관건이었지만 정통 중국 왕조와는 군사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 건국 이후 그 많은 북방민족들이 대부분 정체성을 잃고 중국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엄청나게 강해진 중국 명과 대치해야 하는 조선은 이전과 같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할 수가 없었다.

    한편 거란, 여진, 몽골이 그 정체성을 잃고 사라졌다는 것은 조선 왕조에게 자신도 중국이 되어 사라질, 그래서 왕조의 기반이 없어질 위험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쇄국정책이나 상업의 억제, 그리고 한글의 창제는 그런 면에서 왕조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선택의 측면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왕조의 정책은 문화적으로, 혈연적으로 그 동질성의 강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한민족’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조선의 왕조 및 사대부가 명과의 관계에 군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임진왜란의 전개 및 그 과정에서 성장한 이순신, 북인 세력, 광해군의 죽음, 그리고 명청 교체 이후 북벌론의 지속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이 존재했을 때 조선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일본에 문화 수출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지만 명청 교체 후 평화는 그럭저럭 유지한다고 해도 점차 낙후되어가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강화도 조약 이후, 명청과 같이 천하 질서 하에서 관대한 무역만으로 만족하는 전근대의 강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약탈적 무역 질서를 감행하는 일본 및 서구 열강을 맞이했을 때 단지 ‘오랑캐’라고 거부하는 것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외세에 의해 강화된 수탈로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 진압할 수단을 찾지 못해 청의 원병을 청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것이다.

    한민족 민족주의는 청일전쟁 때부터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청일전쟁의 패배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이야기되는 듯하다. 많은 인물이 있지만 역시 이념적으로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은 신채호라고 할 것이다. 신채호가 생각한 것은 동질성을 가진 조선인들이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해 외세를 물리치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중국 세력을 물리치고 한 번 해양 세력이 장악한 이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은 어느 한 편이 완전히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 이후 소련과 미국의 분할 점령,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미국과 중국의 각각 출병과 중미전쟁의 수행으로 지금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오늘을 형성한 과거 역사의 주체들은 어떤 이념형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야기하는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100년 정도의 수명밖에는 없다. 과거의 이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고자 노력했고 그것이 현재를 형성한 것이다.

    동일한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좀 더 커다란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유형이다. 그리스를 통일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했고, 몽골을 통일한 징기스칸은 세계를 정복했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게르만족의 영광을 내세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후 2차 대전을 일으켰다 패배하고 현재의 UN 질서가 성립하면서 끝났다. 핵무기가 출현한 현재, 코리아연방공화국이 건설된다고 해도 일본을 정벌해 복수할 것도 아니고 이미 1억이 넘는 중국인이 살고 있는 만주로 영토를 넓힐 것도 아니다.

       

    ▲ 차 마시기를 배우는 코시안 어린이들. 5년 후면 초등학생의 10% 이상이 ‘한민족’이 아니게 된다. (사진=뉴시스)

     

    지금은 모든 국가가 기본적으로 비젼을 안으로 가지고 가는 시대이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코리아연방공화국을 형성하기보다는 자기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물론 각자의 문제를 푸는데 코리아연방공화국이 해답이 될 가능성도 있다.

    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적응해야 하고 이를 위해 식량과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세계와 교역할 수 있는 정치, 행정, 경제적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남은 잘살아보기 위해 도입하고 발전시킨 무한경쟁체제가 초래한 체제 구성원들의 소외, 즉 나라가 잘 살게 될수록 사람들은 더 살기 어려워지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또한 이에 수반된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 해결과 인적 자원의 부족 상황 타개를 위해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필요하다. 남과 북은 서로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남북은 최선의 파트너가 아니다

    그러나 각각 최선의 파트너가 아니다. 북은 유사한 변화를 체제나 정권의 붕괴 없이 치루어낸 중국이 훨씬 편한 상대이다. 중국은 식량, 자본, 에너지, 시장, 기술 등 북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 지금처럼 조중 국경 인접 지역에 만다린을 쓰는 한족(漢族)이 1억씩 살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이미 북의 중국 경제권으로의 편입은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남북경협은 어쩌면 북에게는 중국 경제권 편입 과정에서 대중 발언권 강화를 위한 하나의 대안 내지는 교섭을 위한 지렛대로써의 의미가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남 역시 필요한 사람을 외부에서 끌어 쓴다면 중국 그리고 동남아이지 북이 아니다. 현재 남에 있는 탈북자는 1만 명 정도이지만 외국인은 100만 명을 넘어섰고 농업 종사자 남성의 40% 이상이, 전체 남성의 10% 이상이 외국인과 결혼하고 있다.

    연 80만 명 이상 출생한 58년~74년 세대가 점차 노령화되면서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체제의 유지는 심각한 인구구조의 압박에 부딪힐 것이고, 현재의 추세라면 이미 자본주의에 충분히 적응된 동남아인들의 유입을 통해 해결을 도모할 것으로 예상된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우리 못지 않게 동질적이었으며 이민 수출국이었던 나라들에서 외국인 또는 이민자가 인구의 10%를 넘어선 상황은 아마 15년 정도 있으면 남에서도 현실로 닥치게 될 것이다.

    당장 5년 뒤에는 초등학생의 10% 이상이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닌 상황이 온다. 조선 왕조를 거치며 형성되었던 상대적으로 매우 동질적이었던 혈연 집단으로서의 성격은 이제 곧 과거의 일이 된다.

    결국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최소한의 갈등 속에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이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보다는 그 가치를 포기해 나가는 과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북이 핵을 포기하면 10년 뒤 GDP 3000달러를 만들어 주겠다”는 이명박의 공약은 북의 군부에 대해 당신을 자본가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약속이고 남의 자본주의가 북에 던지는 최대의 제안일 수 있다. 이명박이 대북정책에 대해 보수파 내에서 계속 도전받는 것은 멸공통일이라는 기본적인 한국 보수주의의 가치로부터 이명박이 일탈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좌파의 가치는 국가관에 대한 반성

    통일이라는 민족민주운동의 전통적 가치로부터 일탈하는 움직임은 민주노동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반전(反戰)이 좌파의 슬로건이었고,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전통적 국가상에 대한 반성이 좌파의 가치였다.

    한국에선 통일의 문제를 둔 채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전통적 국가상에 대한 반성이 가능할까? 억압당한 기억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때 스스로 억압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 1950년 김일성은 통일의 기치 아래 영토 확장 전쟁을 감행했다. 그 후 50년 이상 지난 지금 남과 북은 얼마나 더 나아간 것일까?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자부는 2007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를 지향하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자부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가슴이 더 뜨거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볼 때에 행자부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더 ‘진보’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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