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민들에게 민노당은 여당 2중대였다"
        2007년 12월 21일 0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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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권이 출범할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고졸의 인권변호사로, 광주청문회의 스타의원으로 민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거의 90%에 달하는 절대적인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시작했다.

    4년 전 노정권이 출범할 당시로 돌아가서 90%의 지지율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잘 생각해보자. 90%의 의미는 10%만 제외하고 대부분이 노 정권을 지지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10%의 반대파는 한나라당을 지탱하는 수구 골수들로 노정권을 혐오하면서 지역적 배타주의와 이해타산으로 뭉쳐진 그룹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않는 이상 어느 정권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비토파로서의 역할을 한다. 물론 10%라는 숫자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그룹의 활동가들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분류된다. 이를 제외한 90%는 대다수를 말한다.

     90%에는 전라도도 경상도도 희석돼버리기 때문에 지역주의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선거때는 지역적 계층적 기반을 토대로 표를 획득했지만 선거가 종료되고 새정권이 출범하게 되면 지역주의적 분열은 희석돼버린다.

    90% 지지 받았던 노무현 정권

    다시 노정권을 지지했던 90%의 지지층에 대해 살펴보자. 50% 이상의 국민들은 처음 출범하는 정권이니 잘 해보라는 격려의 차원에서 지지했을 것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출범에 많은 기대를 걸었고 사실상 노무현 정권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고 지지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탄핵사태를 계기로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국회의 다수파를 형성하면서도 노대통령을 탄핵하지 못했다. 이유는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국회에서 발생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태는 대중들을 하나로 결집시켰고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이들은 80년대 민주화투쟁을 통해 군사독재를 붕괴시켰던 386세대인 40대가 주를 이뤘다. 이 세대는 노정권의 개혁정책이 진정으로 성공하기를 기대했다.

    이들을 민주화세력이라 칭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민주화세력이 노 정권 출범 당시에 진정으로 원했던 개혁의 내용은 노 정권이 지지세력을 잃어버린 이유와도 일치한다. 당시 국민들은 우선 극도로 벌어진 빈부격차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97년도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이유는 IMF사태 때문이었다. 그 뒤 정권을 잡은 김대중 정권은 IMF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중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빈부격차를 극단적으로 벌려놓았다. ‘양극화’라는 말은 집권세력에 의해 사용되는 냉소적인 의미의 어휘로 현상을 왜곡시키는 단어다.

    ‘빈부격차의 극단적 심화’라는 말 대신에 사용돼온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갈등까지 은폐시키고 있다. 양극화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민중들의 도탄에 빠진 삶을 왜곡시키는 것만 보더라도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의 성격은 당연히 반민중적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을 배신하다

    어쨌든 민중들은 정부와 재벌기업들이 불러온 초유의 경제적 파탄인 IMF사태라는 짐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서도 김대중 정권에 별 다른 큰 저항없이 인내했다. 당연히 고통스러운 5년을 보냈던 민중들에게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중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두 가지다. 극단적인 투기자본의 양성과 이에 대한 민중세력의 대응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뒤를 이어 집권한 노 정권은 4년 동안 빈부격차를 줄이기는커녕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욱 벌려놓았고 이를 부추긴 주원인인 부동산투기는 더욱 가열됐다.

    그 동안 노무현 정권의 이중성에 기만당해왔던 노동자 진영은 4년이 지난 마당에 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노 정권이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대북정책문제를 들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햇빛정책을 계승하면서 북한핵의 해결을 장담하면서 대북지원을 지속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 정권의 장담과는 달리 북한과의 회담과 대북지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온 북한의 미사일발사나 핵 실험 등은 남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특히 북한의 핵 실험은 민중들을 완전히 노 정권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통해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한다는 햇빛정책의 선전과는 달리 북한은 개방이나 개혁은커녕 폐쇄와 고립의 길인 미사일 실험이나 핵 실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 햇빛정책이라는 실험은 실패했음을 증명해버렸다.

    당연히 북한 정부로부터 아무런 결과가 없는 대북지원은 ‘퍼주기’라는 용어로 우익진영에 의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햇빛정책의 주도세력이나 노무현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건수를 통해 대중적 지지도를 만회해볼 생각이었지만 민심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북핵이 햇빛정책 실패 증명

    노 정권을 지지하던 90%나 되던 지지세력은 4년이 지난 뒤 10%로 줄어들었다. 즉, 80%의 지지세력이 떨어져 나가버린 셈이다. 10%는 최소한의 골수지지세력으로서 노 정권의 특혜를 받은 부동의 지지세력이라고 간주한다면, 이들을 제외한 모두는 떨어져나갔다는 결론이다.

    그럼, 80%는 어디로 갔는가? 이들 중 절반인 50%는 한나라당으로 갔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지난해 지방선거들을 봤을 때 한나라당이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는데 노 정권과 여당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들 중 절반이 한나라당 지지세력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

    노 정권에서 떨어져 나온 지지세력의 반은 정치에 실망하고 분노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정치회의론자로 침잠해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지난 4년 간 노 정권의 지지세력에서 이탈해나온 대중들을 민노당에서 획득했더라면 민노당은 단연 수권정당으로서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보통 여당이 지지도를 잃게 되면 야당의 지지도가 올라가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여당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도리어 민노당의 지지도까지도 동반추락하는 현상을 보여줬다.

    이는 ‘민노당은 여당의 2중대’라는 대중적 인식이 만연해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노 정권이나 여당은 민노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기층 민중들에게 전달해주는 창구 역할을 하는 정도로 민노당을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여당의 2중대라는 대중들의 인식은 대선에서 드러나는 민노당 후보의 낮은 지지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민노당 스스로도 대중들의 2중대 시각을 깨뜨리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빈부격차 문제나 대북 문제에서 야당인 민노당의 의회 내외의 투쟁 어느 것도 여당과의 차별성을 뚜렷이 드러내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민노당이 여당의 2중대 역할을 적극적으로 한 예를 든다면 북한의 핵실험 후 방북을 들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 뒤 있었던 민노당 지도부의 방북은 당시 반북정서와 반노정서로 들끓고 있던 남한 민중들을 더욱 민노당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북핵에 어정쩡했던 민주노동당

    민노당 지도부의 방북은 대중들에게 궁지에 몰린 노 정권과 여당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모습으로 비쳤다. 남한 대중들이 당시 민노당에 원했던 것은 북한에 대한 단호한 비판적 태도였다. 당시 대중들이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보였던 비판적 태도는 진보진영의 어정쩡한 태도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대부분 대중들은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화해와 협력을 해야할 존재로 여기고 있지 무력으로 타도해야 할 적대적인 대상으로는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동안 동구권과 중국이 개방되면서 구공산주의국가들의 실상을 많이 접해왔고 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가 공개되면서 대중들의 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온 것은 분명하다.

    남한의 대중들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은 지지하고 있으며 남북정상회담같은 교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주의와 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이는 87년 민주화투쟁 이후 20년 동안 축적해온 민주화에 대한 민중들 스스로의 투쟁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변화된 대중들의 의식을 고려했다면 북한의 핵 실험 후 민노당이 보여줬어야 했던 대응은 북한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함께 선을 긋는 모습이지 북한 방문이 아니었다. 북한 방문을 통해 민노당이 획득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살기 힘든 대중들에게 핵무기 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일삼는 북한은 단지 부정적인 대상이다. 사실 북한의 변화와 개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은 남한의 자본가들이며, 이들은 북한의 개방을 통해 자본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

    햇빛정책의 핵심적인 목표는 북한의 개방을 통한 남한 자본의 진출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의 개방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 지 장담할 수는 없다. 또한 북한 정권이 원하는 것도 몇 개의 지역을 개방해서 경제적인 수혜를 보겠다는 의도밖에는 별다른 게 없다.

    통일이란 남북한 민중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를 뜻하지 몇 개의 구역을 개방해서 이곳에만 경제적인 목적의 왕래와 교류를 보장하는 것은 통일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일이다. 남북한정권 모두 남북한 대중들을 ‘통일’이라는 단어로 들뜨게 만들어 왔지만 사실 정권들의 의도는 통일과는 전혀 달랐다.

    남북한 민중들의 통일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가끔씩은 남북정상회담같은 쇼도 해야 했다. 물론 쇼의 효과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남한의 대중들도 알만큼 다 알아버렸으니 극적인 드라마는 힘들게 돼버렸다.

    지금까지 남한의 진보진영은 친북과 반미, 통일과 반미라는 구도로 살아 남아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고립시키는 구도가 돼버렸다. 지금까지 남북대화와 남북교류를 통해 북한의 실상이 대체적으로 드러나면서 통일문제는 북한의 변화라는 문제로 넘어갔다. 대중적이고 급진적인 통일운동은 바로 이 문제에 부딪치면서 제동이 걸려버렸다.

    베트남을 예로 든다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호치민과 미국 내의 반전운동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호치민이라는 지도자를 들 수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남과 북을 통털어 누구에게나 가장 존경받던 지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서유럽에서도 대중들이 존경하는 세계적인 영웅이었다.

    미국 내의 반전운동도 호치민과 무관하지 않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무렵, 미국 내와 서유럽의 수천 수만의 대중들은 반전시위 때면 언제나 베트콩의 지도자인 “호치민”의 이름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이 전쟁을 치르는 적국의 지도자인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장면은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호치민과 김정일의 차이

    위에서 호치민을 거론한 이유는 김정일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미국을 몰아내고 베트남처럼 한반도에서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요소로 호치민처럼 남북한을 통털어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김정일은 호치민처럼 반미의 선봉에 선 영웅이 아니라 단지 독재자로 세계의 대중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세계언론에서는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농담의 대상이 돼버린 지 오래다. 세계의 여론을 잘 아는 북한이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정일에 대한 남한 대중들의 지지도는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도 고려해볼 문제다. 남한 대중들 대부분은 김정일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반공의식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남한 대중들이 김정일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북한 정권의 경제 실패와 이에 따른 북한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핵무기에 대한 질책도 여기서 출발한다.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어느 정도 경제적 수준에 올라 있고 북한의 지도자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되면서 남한 대중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면 통일은 그다지 힘든 과제가 아닐 것이다. 이를 잘 아는 북한도 이제는 그다지 통일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고 단지 권력 유지에만 골몰해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진보진영의 통일관도 변해야 하며 전략전술도 변화해야 한다. 통일은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노당이 여권의 2중대로 값을 톡톡히 치른 다른 이슈를 들라면 한미FTA투쟁을 들 수 있다. 올해 4월,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친구 집에 갔다가 한우소고기 100g에 8,890원이라는 가격표가 적힌 냉장소고기 포장을 본 적이 있었다.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한우

    100g에 8,890원이라는 숫자는 나를 한동안 생각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미국 달러화로 환산한다면 100그램에 9달러,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고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유럽의 소고기 값은 어떤지 궁금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kg에 10유로나 그 이하로 보면 될 것이다. 우리 돈으로 1만 3천원 정도다.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의 소고기 값은 서유럽 국가들의 반값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방목해서 기른 질 좋은 소고기 1kg이 우리나라 돈 7천원 정도다.

    관광지로 물가가 비싸다는 프라하에서도 가장 질 좋은 부분의 소고기 1kg 가격은 우리 돈으로 1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소고기 100g으로 환산하면 단돈 700원이나 1,000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폴란드나 체코의 물가를 한국의 물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100g에 9,000원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위 한우라는 소고기는 폴란드 소고기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도 더 나을 게 없다. 방목으로 키워낸 폴란드의 소와 공장에서 생산된 항생제와 영양제가 배합된 사료를 먹여 우사에서 키워낸 한우를 비교한다는 것도 언어도단일 뿐이다.

    고기 뿐만 아니라 또 과일값은 어떠한가? 오랜만에 사촌 형님을 방문한다고 아파트촌의 슈퍼마켓에서 종이상자에 담긴 사과 한 상자를 선물이라고 산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25,000원을 지불했다.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열 일곱 개 정도가 포장돼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최상품이 아니라 중품 수준의 사과였다.

    어쨌든 그 정도의 사과 하나에 1,000원이 넘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일 가게의 아주머니도 과일 가격이 너무 비싸서 미안스럽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더 크고 좋은 사과는 하나에 2,000~3,000원을 훌쩍 넘어선다는 말도 들었다.

    보통의 사과 하나에 1,000원이면 다시 미화로 환산한다면 1달러가 넘는다는 말이다. 좋은 사과는 2달러나 3달러라는 말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가봤지만 그렇게 비싼 사과는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다.

    다른 과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지에 가서 과일을 사더라도 값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조금 더 싱싱하다는 것 빼고는 시골 산지의 가격이 서울의 시장가격보다 더 비싼 것이 현실이다.

    물론 아이슬란드나 그린랜드, 시베리아 같이 겨울철에는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서 과일이나 채소를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야 과일값이 그 정도로 비싸도 이해할 만 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땅을 그런 동토와 비교할 순 없지 않는가.

    어쨌든 동토에서 파는 과일 가격보다 비싸다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물가 사정은 지난 4월보다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한 번 오른 물가가 내려간 예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배고픈 서민은 미국산, 한국산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비싼 고기나 과일 때문에 돈이 있다는 사람들까지도 불평이 대단하다. 하기야 수백억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이야 시장물가에는 큰 관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머니사정이 빡빡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에게 고물가는 삶의 큰 부담이 아닐 수 없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할 정도다.

    가족들을 위해 시장에 갔다가 소고기값이나 과일값을 보고 부담이 돼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가난한 주부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절로 새나올 것이다. 2만 달러 시대의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거창한 대한민국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고기나 과일도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 살고 있다.

    이는 물가를 통제할 의무가 있는 노무현 정부의 책임이다. 물가가 서민들의 삶을 압박할 정도로 올랐다는 건 공무원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까지 오도록 직무를 유기한 정부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고 나선 쪽은 없었다.

    서민들은 이런 일을 민노당이 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이지만 민노당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런 활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민노당은 단지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FTA 정책을 반대하는 데만 투쟁의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제대로 된 야당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에서 한미FTA를 반대하는 당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대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은 당리당략에만 눈이 멀었고 미국과의 문제라면 무조건적으로 친미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민노당이라도 나서서 한미FTA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두 정당들과 싸워야 하는 민노당으로서는 애초부터 벅찬 싸움이었다. 물론 싸워야 하는데 왜 싸워야 하는지를 민중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슈가 미국산 소고기로 초점이 맞춰졌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민중들은 미국산이든 호주산이든 값싸고 질만 좋다면, 비위생적인 중국산만 아니라면, 먹는 음식에 굳이 민족주의적 관점을 고집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간다면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의 공급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인 이슈가 된다. 그럼에도 민노당에서는 쇠고기가 미국산인가 아닌가라는 사실상 가난한 대중들에게는 무의미한 문제를 핵심적인 이슈로 도마 위에 올렸던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민중들의 삶을 압박해왔지만 계속적인 속임수 정치로 정권을 유지해왔다. 한미FTA의 추진도 반민중적인 속임수 정치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한미FTA 정책을 추진하면서 10% 밑으로 맴돌던 노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갑자기 30%대로 치솟은 데는 가난한 도시서민들의 지지도가 큰 몫을 차지했다.

    노무현 정권의 ‘잔대가리’ 유시민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한미FTA 추진으로 값싼 농산물이나 고기를 사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도시 서민들에게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반면 한미FTA 반대투쟁을 주도한 민노당은 FTA를 주도하는 정부팀과의 TV공개토론에서조차 논리적으로 거의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부터 계속 지지율은 하강곡선을 그려왔고 이제는 당의 존재 기반까지 회의적인 상태로 왔다. 국회에는 10명이나 되는 의원들이 있지만 해결책은 없이 가두투쟁만 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심어준 덕택이다.

    물론 거리투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거리투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미FTA 없이도 가난한 사람들이 싼 과일이나 소고기를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해결책(정책)은 내놓지도 못하면서 단지 거리로 나온 민노당에 대한 민중들의 심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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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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