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민 '종이 짱돌'로 복수하다
        2007년 12월 21일 11:0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는 예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결과에 직면했다. 3% 지지에 712,121 득표. 5년 전 대선에 비해 단순 표로만 25%에 해당하는 245,027표가 줄었다. 그 의미를 두고 민주노동당 당 체제 전반의 위기라는 인식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지난 대선과 단순 비교될 수 없기도 하다. 그 사이에 민주노동당은 13%의 지지로 제도권에 진입했고, 한때 지지도 20%를 넘나들면서는 미래의 유력 정당으로 평가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은 기존의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칫 지난 민주노동당 역사 자체가 무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

    2.

    대통령선거는 양당제로 수렴하는 제도 효과를 갖는다. 이번 선거에서처럼 1~2위 득표차가 크게 나타나는 사례는 잘 보기 어렵다. 지난 두 번의 대선은 모두 2% 안팎의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이번 대선은 달랐다.

    잘 알다시피 보수 블록이 65%에 가까운 일방적 득표지배력으로 간단히 승리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보수블록이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열되어 실패했다고 자탄했지만, 이번에는 이회창 후보의 독자 출마에 대해 걱정하는 기색조차 찾기 힘들었다.

    정동영 후보 26%. 1위 후보와 20%포인트가 넘는 차이이다. 5년 전 노무현 후보는 48.9%를 얻어, 이번 이명박 당선자보다 더 많은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2004년 탄핵정국에서 대통령을 구원했고 뒤이은 총선에서 과반수 집권당을 만들어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이들 민주파 유권자들의 요구는 그만큼 강렬했다. 이번에 그들 중 절반이 완전히 돌아섰다. 이곳은 또 왜 이렇게 되었을까?

    3.

    대통합신당 혹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선거 결과를 유권자의 문제로 돌리고 싶어 한다. 겉으로는 결과에 승복하고 “통절하게 반성”한다는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명백한 부패세력’을 지지할 수 있는가를 항변한다.

    유권자를 이해할 수 없다거나 때에 따라서는 ‘대중의 비합리성’ 내지 ‘유권자의 무책임성’을 질타하는 경우도 많다. “노망난 유권자”라는 말은 그래서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선거에 대한 민주적 해석의 방법마저 상실했을 만큼, 이들은 지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실력조차 못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권자의 보수화’로 이번 선거 결과를 설명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유권자의 이념 성향과 관련된 그 어떤 조사도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현재 유권자의 절대 다수는 20년 전의 민주화와 10년 전의 IMF 외환위기 하에서 투표를 시작했다.

    적어도 이들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유권자들만 놓고 보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유권자가 절대다수이다. 11월 19일자 <경향신문>의 여론조사를 보면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로 밝힌 응답자가 24.7%인데 반해 ‘진보’는 41%로 나타났다. 어떤 경우이든 유권자 때문으로 문제를 환원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4.

    다른 지면에서 나는 대통합신당 혹은 넓게 봐서 집권파의 완패 원인을 “유권자의 복수”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비정규직의 양산과 불평등의 심화로 나타난 신자유주의 정책들, 이라크 파병,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주장, 느닷없는 원포인트 개헌론, 반대와 비판을 억압한 한미FTA 협상 강행 등을 거치는 동안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계속 누적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전개되자, 민주파 유권자들은 불만을 표출하고 항의의 신호를 여러 형태로 보냈다.

    2004년 총선 이후 27차례의 재, 보궐 선거에서 집권당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2006년 지방선거는 그 결정판이었다.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민주파 유권자의 항의는 강렬했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파 정당은 1967년 선거 이후 처음으로 수도권에서 크게 승리했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도 모두 승리했다.

    이번 대선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결과를 완전히 똑같이 재현했다. 한마디로 말해, 2006년 선거 이후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집권파는 유권자가 보낸 비판의 시그널을 진지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결과는 기본적으로 ‘인민의 평결(people’s verdict)’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파는 반응(responsiveness)과 책임(accountability)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궐선거는 보궐선거일 뿐’이고 ‘지방선거는 지방선거일 뿐’이라며 이를 집권세력에 대한 주권자의 문제제기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노무현식으로 해 보겠다”며 마이 웨이를 강조했고 아예 판을 바꿔보겠다며 대연정과 개헌론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것도 안 되자, 그 후엔 언론 전체를 반노무현 여론의 조직자로 공격했다. 인민의 의사가 무시당하고 억압되자, 이제 그들은 이번 선거에서 아예 복수를 꿈꾸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유권자는 한 장의 표만을 쥐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승자를 만들기는 어렵다. 오로지 표로서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의 민주주의에서 대중권력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책임추궁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들의 표는 무서운 효과를 만들어낸다.

    첫째는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며 둘째는 반대파 후보 지지로 스윙함으로써 애초 지지했던 후보에게 두 배의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며, 셋째는 아예 이탈함으로써 정치체제 전반의 정당성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할 때 그들의 투표용지는 ‘종이로 된 짱돌(paper stone)’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 대중은 이 모든 수단을 이용해 집권파에게 힘껏 종이 돌을 던졌다.

    5.

    그렇다면 왜 집권파에 실망하고 분노한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왜 민주노동당은 집권파와 같은 사이클로 무너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민주주의의 절차적 원칙으로서 반응과 책임의 원리를 준수하지 않은 것은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였다. 2006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선거평가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임지는 주체도 없었다. 당내 지배 분파인 자주파와 소수파인 평등파는 반응과 책임을 무시하는 데 공모했다.

    문제를 제기할라치면, “패배에 짓눌린 세력은 사멸”할 수밖에 없다거나 “소모적인 논란” 대신에 당의 단합에나 노력하자는 등의 담론적 억압이 되돌아왔다. 시민의 평결과 유권자가 보낸 신호는 민주노동당 안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

    당은 무기력에 빠졌고, 사실 위기감은 그때부터 누적되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선거 결과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6.

    어떻게 해서든 유권자의 불만과 항의에 반응했어야 했고, 책임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대통합신당도 마찬가지였지만, 민주노동당 지도부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고, 대중은 계속 멀어졌다.

    유권자의 눈에는 민주노동당 역시 편협한 정파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집단 이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및 노조지도부의 잇단 부패 사건 역시 매우 부정적 효과를 끼쳤다.

    진보파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권위주의적 태도의 계몽론이 두드러졌다. 현실의 세계 안에서 공감되기 어려운 이념의 논리만 무성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중과의 거리는 계속해서 크게 만들어졌다.

    당내 후보 경선은 민주노동당이 가진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냈다. 다수를 차지하는 지배 정파의 욕구 그리고 유권자의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갖는 후보 개인의 욕구가 사실상 경선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정당의 후보 경선 과정과 결과가 다수 정파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지배될 때, 그것을 민주적 결정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당내 비민주적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당원 대중의 변화 욕구는 경선의 과정에서 심상정이라는 새로운 후보 대안을 결선 투표에까지 밀어 넣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 기점으로 당 안팎에서 민주노동당의 변화에 기대를 걸었던 대중의 항의 이탈은 확정적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경선을 끝으로 대선을 끝냈다. 대선의 결과는 그 의미를 확인해주는 절차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당내 지배분파와 후보뿐이었다.

    7.

    실제 투표에 있어 민주노동당 지지자는 여러 형태로 분화되었다.

    첫째는 괴롭지만 그래도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런 충직한 유권자의 규모는 5년 전의 당세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둘째는 항의의 표시로 투표를 거부했다. 이번 선거의 낮은 투표율에는 분명 지금의 대안 없는 정당체제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반영되어 있다.

    셋째는 복수의 의미로 다른 후보에 투표했다. 스스로 변화하려 하지 않는 당에 대해 지지자가 변화를 강제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탈’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들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 당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 자체가 비극이다.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못하면, 이런 잘못된 방법으로 변화를 강요받게 된다는 것을 지금 민주노동당은 실증하고 있다.

    지금 민주노동당은 정당으로서의 존립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의 상황임에 틀림없다. 민주노동당에게 남아 있는 시간과 기회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번에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의 대중은 더 이상 돌을 던질 가치조차 없는 정당으로 평가할지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지지자 대중이 당 지도부에 보내는 항의에 신호를 수용하는 것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방법뿐이다. 당 지도부를 맡아왔던 지배분파와 권영길 후보가 먼저 책임 있는 답을 해야 하고, 그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본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