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체제는 가라
        2007년 12월 20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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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변은 없었다.
    “내가 BBK를 만들었다”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자신의 동영상도 민생파탄을 가져온 민주화정권, 특히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고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민심의 분노를 막지는 못했다. 역시 신자유주의와 노무현 대통령의 힘은 역시 위대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상 유례없는 양극화를 가져옴으로써 민심의 보수화를 가져왔다. 게다가 노대통령의 독선과 품격없는 언행은 국민들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결국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정동영 대 이명박의 선거의 아니라 노무현 대 노무현의 선거였던 것이다.

       
      ▲손호철 교수.
     

    노무현 대 노무현의 선거

    그러나 이같은 객관적 조건 못지 않게 이번 대선의 결과를 가져온 것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대변되는 정치권의 자유주의 진영, 그리고 재야원로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 진영의 잘못된 선거전략이다.

    정동영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진영이 그나마 선거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발본적으로 자기비판을 하고 문국현 후보처럼 반신자유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며 다시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한 낡은 반수구논리로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한편 BBK 한 방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민심의 헛다리나 집고 있었던 것이다.

    재야원로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 진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선전략과 관련해 이 지면에 썼던 “두려움의 동원정치를 넘어서자”(2007년 2월 1일자) 등의 글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 사회는 97년 경제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적인 97년 체제로 변했으며 우리 사회의 주모순은 이를 둘러싼 반신자유주의의 문제이지 87년체제의 유제인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다.

    그러나 원로들과 시민사회의 일부 민주화 진영은 이미 사라진 87년 체제의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라는 낡아빠진 동아줄을 붙잡고 반수구, 반부패, 반한나라당 전선에 참여하라고 국민들에게 목소리나 높이고 있었다. 그 결정판이 검찰의 이명박 후보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결정을 내리자 광화문 촛불시위를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민심을 모르니 대선의 참패는 당연한 결과이다.

    낡은 동아줄과 철 지난 전선

    민심의 핵심인 민생과 반신자유주의 문제의 경우 진보적 자유주의자인 문국현 전유한컴벌리 사장이 정치에 입문하며 의제를 선점하고 나섰지만 너무 늦게 경기에 뛰어든데다가 조직적 열세 등으로 별 성과를 거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이번 대선의 최대의 패배자는 정동영 후보와 자유주의진영도, 문국현도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이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대선보다 오히려 후퇴를 해 3% 득표에 그쳤고 이회창, 문국현보다 못한 5위로 밀려났다.

    2002년 대선의 경우 민주노동당은 원외정당이었을 뿐 아니라 노무현, 이회창 간의 박빙 승부로 인한 사표심리, 막판의 정몽준 해프닝으로 인한 노무현 동정표의 이탈 등으로 아주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의 경우 원내 제 3당이 됐고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실정에 따른 민생파탄으로 진보정당 성장의 호조건이 만들어졌으며 어차피 이명박 후보의 독주체제로 인해 사표심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 마디로, 2002년에 비해 너무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의 패배 이상으로 자업자득이다.

    우선 이는 내가 다른 글(“손호철의 정치논평: 진보의 세대교체”, <한국일보> 2007년 7월 30일자)에서 이미 경고한 바 있듯이 권영길 후보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세대교체를 감행하는 대신 노욕을 버리지 못하고 출마함으로써, 그것도 당내 다수파이기는 하지만 대중적 정서와는 거리가 먼 자주파의 지지를 받아 승리하는 순간 이 같은 결과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노욕과 자주파

    게다가 대선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대중적 정서와도 거리가 먼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아니 세상에 북한과 같은 세습왕정을 민주화하지 않고 ‘세습왕정’과 (대한민국과 같은) ‘공화국’이 어떻게 연방을 한단 말인가? ‘코리아 왕정-공화국 연방’이라굽쇼? 소도 웃을 이야기이다.

    한국사회당의 경우 사회적 공화주의라는 담론을 가지고 새로운 진보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대중적 지지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동자의 힘을 비롯한 제도 정치권밖의 좌파들 역시 선거정치를 넘어선 반신자유주의 전선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목소리 높여 외쳤지만 별 의미 있는 투쟁을 전개하지 못 했다.

    그동안 이문열을 비롯한 냉전적 보수세력들은 한국사회의 대립구도를 수구적 좌파 대 진보적 우파의 대결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해왔다. 수구 대 진보를 단순히 변화에 대한 태도로 단순화시키는 이 같은 용법은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이번 대선을 되돌아보면서 이같은 용법이 그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냉전적 보수세력은 박근혜와 같은 낡은 보수로는 민심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해 이명박과 같은 실용적 보수, 새로운 보수에 베팅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 진영은 수구적 좌파라는 표현이 공감이 갈 정도로 변화하지 못하고 낡은 87년 패러다임에 매달려 있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민생파탄이 문제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진영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느니 “개성동영”이라는 구호 아래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수구대 개혁의 구도에 매달려 있었고 시민사회의 원로들 역시 철 지난 반수구 반한나라당 로고송이나 부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역시 낡은 주사파와 민족해방파의 논리에 의해 코리아연방 운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파-좌파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문제는 이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얼마나 자기개혁을 하고 새롭게 태어나느냐는 것이다. 정동영 후보는 대선 막판에 가서야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민생에 고통을 주었는지 절감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자유주의 진영은 지금이라도 그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발본적인 자기비판을 하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위기를 다시 한번 봉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재창당 수준의 대수술을 해야 한다.

    핵심은 북한에 대한 태도이다. 더 이상 북한은 진보적 체제가 아니며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정임을 인정하고 북한문제를 세습군주인 김정일 체제가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북한민중의 입장에서 다루는 방향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친북적인 조선노동당과 그렇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분당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새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당, 노동자의 힘 등 북한에 대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진보세력들과 연대해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주요한 또 다른 사안은 BBK 특검문제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의 지도부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해, 나아가 대선 결과에 대한 당내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지나치게 이에 매달려고 공세를 펴는 것은 잘못이다.

    BBK 특검보다 민생문제에 더 신경써야

    그 많은 의혹에도 민심은 압도적으로 이후보의 손을 들어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며 이를 검찰이나 특검의 사법의 논리로 대처하려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오는 총선, 그리고 그 이전이라도 노대통령 탄핵에 대한 국민적 분노의 폭발과 같은 사태가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다.

    특검보다는 맑스가 『자본론』서문에서 지적한 대로 이명박에게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에서 뛰어보아라”로 해야 한다. 검증의 핵심은 BBK가 아니라 민생 해결이다.

    확실한 것은 이명박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정권, 아니 노무현 정부보다 더한 신자유주의 정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현대 시절의 신화를 되살려 총량 기준으로 경제를 되살려 낼지는 몰라도 사회적 양극화와 민심파탄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많은 민초들은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 집권에 따라 예상되는 일정한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위에서 지적한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내부개혁은 미룰 수 없는 또 다른 과제이다. 더 늦기 전에 죽은 87년 체제에 대한 미련은 빨리 던져버려야 한다.

    이 같은 과제들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이명박의 집권이 일회성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길고도 긴 어둠의 시대가 지속될 수도 있다. 지난주 <프레시안>에 썼던 컬럼(“묻지마 지지, 5.18 너마져”)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이명박의 집권은 근본적으로는 정권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권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너무 절망하거나 호들갑떨 필요가 없다.

    게다가 스타일면에서도 이명박은 노대통령을 닮은 또 다른 노무현이라는 점에서 사고를 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나친 낙관도 문제지만 지나친 비관역시 지나친 낙관만큼이나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 *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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