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이후' 도대체 뭐가 문제였나
        2007년 12월 18일 07: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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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87년 체제’ ‘진보/개혁의 위기’ 등 거대담론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87년 이후 20년, 97년 이후 10년이란 물리적 시간과 이 기간 동안 진행된 우리 사회의 질적인 변화가 이같은 용어들을 자주 불러냈을 것이다.

    87체제는 ‘한계’와 함께 거론됐으며 진보와 개혁 세력은 뭉뚱그려서 위기와 함께 언급되곤 했다. 따라서 한계와 위기에 대한 처방이 제출된 것은 당연한 일, 이른바 무슨 개조론이니 대타협론이니 솔루션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이번에 펴낸 책,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후마니타스)도 어떻게 보면 그 대열에 함께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한국 사회가 재설계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 국가’를 그 열쇠말로 제시한다.

    진보정치연구소는 하지만 자신들의 책은 기존의 처방들과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고 말한다. 연구소는 이 책의 특징으로 △민주노동당의 지난 수년간 활동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뤄진 다양한 정책 성과들을 총망라했다는 점 △‘녹색 평화 사회-민주주의’부터 ‘사회연대국가’까지 최근 진보 학계와 연구 진영에서 제출한 대안 담론들을 ‘사회 국가’라는 틀로 종합하려 했다는 점 △이론 진영과 실천 진영 사이의 연결과 대화를 통해 좀 더 깊이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려 했다는 점을 꼽았다. 

    연구소는 이 책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진보 세력이 위기를 딛고 ‘사회 국가 운동’이라는 ‘제2의 민주화 투쟁’을 시작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며 "그 출발점이 대체로 어느 좌표 위에 있는지 궁금한 독자들에게도 유익한 지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레디앙>은 진보정치연구소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책 내용 가운데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해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싣는다. 이 책의 서문은 조승수 연구소 소장이 썼으며 내용은 장석준, 성은미, 조진한, 이상호, 정택상, 강병익 연구위원들이 맡아서 썼다.

    내용 중 푸른 색의 제목은 원책자에 나온 것이며 검은 색의 굵은 글씨 제목은 편집진에서 임의로 붙인 것이다. <편집자 주>

    서문

       
     
     

    “대한민국은 과연 살만한 나라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까?”

    이 책의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만족하는 사회를 모두가 참여하여 결정하고 이를 위해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현재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만족하고 있는가?

    ‘88만원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수 만 대 일의 구직경쟁에서 자신의 청춘을 소진하고 있다. 젊은 부모들은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아침저녁으로 전쟁 치르듯 바삐 움직인다.

    직장인들은 아파트 당첨과 주식투자에 인생의 희망을 내건다. 노인들은 몸이 아파도 자식에게 손 벌리기가 어려워 병원에 가기를 꺼린다.

    사회 속의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모두 자신의 문제들을 혼자 떠안고 살아갈 뿐이다. 여기에 사회는 없고 국가도 없다. 이것이 주어진 운명일까? 과연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시장만능과 무한경쟁의 사회는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 같은 사회체제일까?

    사회를 통해 진보를 구현하는 인류의 경험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사회연대라는 공동체의 가치 속에서 개인의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치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연대라는 단어는 저 먼 곳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 상상 밖의 현실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상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기간에 달성한 저력있는 나라이다. 와이브로(Wibro)같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첨단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온 국민이 키워 온 삼성과 현대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나라의 경제력은 분명 세계에서 11번째이다.

    분명 우리에게는 사회연대를 구현할 물질적 토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한 정치의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가로지르며 살고 있다. 그러나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극화로 주조된 소수의 번쩍이는 금화가 아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조화로운 사회로 녹여낸 새로운 희망의 동전이다.

    이 희망을 통해 악화를 녹여내고 양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희망은 첨단산업사회를 사회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치관이며 형식적 민주화를 뛰어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다. 

    새롭고 총체적인 사회 체제의 디자인

    결국 현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편적 정책이 아니라 새롭고 총체적인 사회 체제의 디자인이다. 자본 국가, 시장 국가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 국가로의 재설계’만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는 지난 3년여의 연구 성과를 결산하면서 하나의 대안 국가를 디자인하였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일자리, 주거, 교육, 의료 등 대중 생활의 네 가지 기본적 권리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 연대의 핵심을 복지동맹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거시, 미시적 차원의 대안적 경제와 산업의 방향, 생태, 평화, 정치 제도와 국기기구 개편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진보 세력의 당면 과제를 마지막 장에 서술했다.

    왜 사회국가인가, 특히 굳이 국가 체제를 대안 모델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국가기구는 억압적 요소를 그 속성으로 하고 있기에 국가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진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도 이에 동의한다.

    나아가 진보는 특정 시기 특정의 내용에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수용하며 새로운 가치를 자신의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국가를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진보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되 현 단계 한국 사회의 비전을 제시할 때는 국가를 단위로 하는 사회운영 원리와 구체적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가령 민주노동당이 2007년 대선에서 집권한다면 과연 어떠한 정책을 펼쳐나갈지를 염두에 두고 그간 당의 주요 정책 부서들과 연구소의 성과들을 하나의 종합적인 정책 보고서로 집약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적절하겠다.

       
      ▲10년의 배반 이후 또다른 더 강력한 배반의 세월이 서민들 앞에 놓여있다. 07년 대선의 결과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명박 후보 유세 모습(사진=뉴시스)
     

    이 작업이 끝날 무렵 제8장의 결론 부분 토론을 위해 연구소 식구들과 남도의 지리산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주능선은 우리가 마음먹은 각오와 체력을 다 소진하고 나서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사회의 재설계라는 과제도 이런 과정 속에서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주능선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신념은 바로 그 정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 *

    1장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1절 민주화 20년, 세계화 10년,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2007년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가 20년째를 맞는 해였다. 그런가 하면 1997년의 외환위기와 함께 ‘세계화’(Globalization), ‘구조조정’ 그리고 ‘신자유주의’ 같은 말들이 한국 사회의 최대 유행어가 된 지 10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민주화 20년과 세계화 10년이 서로 교차하는 해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민주화 20년의 의미를 묻거나 외환위기 후 10년의 현실을 짚는 논문이나 토론회, 언론 기획 등이 쏟아졌다.

    한데, 이들 토론회나 연재물들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고 낙관적이지 못했다. 하나같이 좀 어둡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성과보다는 한계를 강조했고, 희망을 제시하기보다는 조심스러운 회의적 전망을 내놓거나 아니면 미래를 전망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그만큼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 간단명료한 표현이 ‘사회 양극화’다. 원래 ‘빈부격차’라는 고전적 용어가 있고 한때는 ‘20 대 80 사회’라는 외래어가 회자되기도 했지만, 요즘 주로 쓰이는 말은 바로 이 ‘양극화’다. 사회가 잘 사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양 극단으로 쪼개지고 있다는 것. 부유한 소수는 더욱더 부(富)를 늘려 가는데, 그렇지 못한 다수는 오히려 소득도, 자산도 줄어들고 있다.

    ‘민주화’를 제압한 ‘세계화’, 그리고 그 결과인 ‘양극화’

    지난 20년간 서민의 삶이 계속 나아지기는커녕 되레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래의 표에 잘 드러난다. 이 표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은 전체 국민소득 중 일하는 사람들이 임금으로 가져간 몫을 나타낸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나라의 부 중에서 다수 서민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직후 몇 년간을 보면,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1997년 전까지는 계속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적어도 민주화 직후 10년간은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에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이 떨어진다. 급기야 1999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3 포인트나 급감한다. 그러고 나서 2000년대 초반 내내 1990년대 중반 수준(60% 이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소득분배율을 임금소득자의 증감 추이와 비교해보면, 외환위기 이후 분배 상황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003년 현재 노동소득분배율은 59.8%인데, 전체 취업자 중에서 임금 소득자의 비중은 65.1%다.

    그런데 노동소득분배율이 비슷한 수준에 있었던 1994년의 경우를 보자. 노동소득분배율은 59.3%인데, 임금 소득자의 비중은 2003년보다 훨씬 적은 62.9%다. 그렇다면 개별 노동자의 소득은 1994년에 비해 지금이 더 못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민주화 이후 한 동안 조금씩이나마 늘어나던 서민들의 분배 몫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 – 바로 이것이 양극화라는 미친 듯 질주하는 자동차의 엔진이다. 손에 쥔 것이 줄어든 쪽이 있다면 반대로 그 몫이 늘어난 쪽이 있게 마련이다. 따로 통계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재벌 대기업, 해외 초국적 자본 그리고 부동산-주식 등 자산 소유 계층들 … 

    국민소득 중 임금소득자에게 돌아간 몫은 얼마나 되는가? (%) 

                  자료: 한국은행, 통계청
    연도
    노동소득분배율

    취업자 대비

    임금 소득자 비중
    1987
    53.0
    56.2
    1988
    54.4
    57.0
    1989
    56.6
    59.2
    1990
    58.0
    60.5
    1991
    58.8
    62.7
    1992
    58.8
    62.7
    1993
    59.1
    62.1
    1994
    59.3
    62.9
    1995
    61.3
    63.2
    1996
    63.4
    63.3
    1997
    62.3
    63.2
    1998
    61.9
    61.7
    1999
    59.6
    62.4
    2000
    58.8
    63.1
    2001
    59.5
    63.3
    2002
    58.2
    64.0
    2003
    59.8
    65.1

    일이 잘못된 것은 확실히 1997년부터다. 자본에게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주면 만사형통이라는 신자유주의 교리가 한국 사회를 평정한 게 바로 이 해였다. 사실 그 전에도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대자본가들과 그 대변자들은 민주화가 시작되던 그 무렵부터 ‘자유화’라는 구호 아래 신자유주의 이념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것을 ‘국제화’ 그리고 ‘세계화’라는 또 다른 구호로 포장해서 적극 추진했다. 그 첫 결과는 얼마 안 있어 곧 드러났으니, 1997년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외환위기의 ‘구원 투수’로 나선 IMF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화를 처방으로 내놓았다. 이 때 드디어 신자유주의는 일부 광신적 전도사의 포교 내용이나 특수 집단의 신앙을 넘어서 국가 공인의 유일 신앙, 즉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이른바 ‘민주’ 정권들, 즉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이 교리의 충실한 집행자 노릇을 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이 대한민국을 온통 지배하기 시작한 기점을 1997년으로 잡는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이때부터 세계화 흐름이 그 전까지의 민주화 흐름을 제압했고 더 나아가 이를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의, 눈에 보이는 결과가 곧 양극화다.
    다음 그림은 이러한 진단을 도식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민주화와 세계화, 양극화의 관계

       
     
     
     
     
     
     
     
     
     
     
     
     
     
     
     
     
     
     
     

    세계화와 그 산물인 양극화, 과연 숙명인가?

    신자유주의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면 중도우파부터 좌파까지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이러한 진단에 동의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 사회학)는 200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칼럼에서, 87년 이후 등장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봉착한 위기 요인들의 첫 번째로 ‘세계화’를 들고 있다.

    문제는 87년 체제가 새로운 전환의 시험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전환을 요구하는 첫 번째 동인은 세계화의 충격이다. 세계화는 무한경쟁을 강제함으로써 경쟁에 합류한 집단과 탈락한 집단간의 양극화를 가속화한다.

    두 번째 동인은 사회 불평등의 심화다. 지난 18년의 민주화 과정에서 작지 않은 성취가 있었음에도 소득분배는 오히려 악화돼 왔다. 민주주의의 목표 중 하나가 평등에 있다면 이는 87년 체제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환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동인은 동북아 질서의 변동이다. 87년 체제를 둘러싸고 있던 동북아의 냉전적 질서는 이미 균열을 보여 왔으며, 우리 사회에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남북한 평화공존이 꾸준히 모색돼 왔음에도 탈냉전적 동북아 질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기로에 놓인 ‘87년 체제’」, <조선일보> 2005. 4. 7.)

    좌파의 대표적 논객인 손호철(서강대 교수, 정치학)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요인들을 제시하면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요인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세계화의 도전에 맞서 적절한 대안을 추구하지 못하면 민주화의 성과가 오히려 파시즘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고까지 경고한다.

    진짜 문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유기적 요인, 구조적 요인이다. 세계화라는 지구적 추세 속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조직하고 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 한 박정희 향수는 계속될 것이며 서민들이 극우 정권을 지지하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파시즘의 위협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오는 대선(2007년 대선-인용자)에서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냉전적 보수세력의 집권을 저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설사 범여권의 자유주의세력이 오는 대선에서 승리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계속하는 한 사회적 양극화는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로 치달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민주주의 20년: 성과와 한계 그리고 위기」,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학술대토론회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도전>(2007. 6. 5.) 발표 논문)

    하지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사회 양극화가 무슨 불가항력의 숙명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 세계화의 덫에 걸려든 모든 나라에서 어느 정도든 양극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자본의 재량이 확대되면 어디서나 예외 없이 각종 자산 수익은 늘어나지만 임금 소득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확실히 정도 차가 있다. 유럽의 복지 국가들도 세계화의 그물망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양극화의 정도가 우리 같지는 않다.

    특히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복지 수준을 자랑하는 북유럽 여러 나라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삶의 질도 전반적으로 높으면서 동시에 소득 격차도 낮다. 아래의 표에 나와 있듯이, 이들 나라의 지니 계수는 한국보다 낮다. 지니 계수는 낮으면 낮을수록 빈부격차가 적다는 것을 뜻하다. 한편 이들 나라는 UN 인간개발지수 측정에서 높은 순위를 자랑한다. 이것은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니 계수 및 UN 인간개발지수 순위 비교 

    국가
    지니 계수 (UN 발표)

    UN 인간개발지수

    국가별 순위

    (2004년 자료에 의거,

    2006년 발표)
    스웨덴
    25 (2000)
    5위
    노르웨이
    25.8 (2000)
    1위
    핀란드
    26.9 (2000)
    11위
    덴마크
    24.7 (1997)
    15위
    독일
    28.3 (2000)
    21위
    오스트리아
    29.1 (2000)
    14위
    한국
    31.6 (1998)
    26위

    전통적 복지 국가들이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정도가 우리보다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나라가 유독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로부터 벗어난 외딴 섬이어서? 그렇지 않다.

    다음의 표는 그 이유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세금을 내고 사회복지수당을 받기 전의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 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스웨덴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오히려 스웨덴 쪽이 더 불평등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조세-복지 체계, 즉 재분배 정책이 작동한 뒤에는 한국이 0.385, 스웨덴이 0.230으로 우열이 뒤바뀐다. 스웨덴 쪽이 훨씬 더 평등한 것이다. 결국 동일한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도 국가 정책의 차이에 따라 양극화의 정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조세-복지 체계 작동 이전과 이후의 지니 계수에 대한 국가별 비교 

    국가

    시장소득 지니 계수

    (A)

    가처분소득 지니 계수

    (B)

    재분배 효과

    (A-B)
    스웨덴 (1994)
    0.439
    0.230
    0.209
    핀란드 (1995)
    0.379
    0.228
    0.151
    프랑스 (1994)
    0.417
    0.278
    0.139
    아일랜드 (1994)
    0.461
    0.324
    0.137
    영국 (1995)
    0.428
    0.312
    0.116
    독일 (1994)
    0.395
    0.282
    0.113
    네덜란드 (1995)
    0.348
    0.255
    0.093
    노르웨이 (1995)
    0.335
    0.256
    0.079
    한국 (2000)
    0.403
    0.385
    0.017

    다시 말하면,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는 현실의 변화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 대응해왔다는 이야기다. 1987년 이후 민주 국가가 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도 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의 ‘민주’ 국가에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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