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재구성의 신호탄인가?
    2007년 12월 17일 1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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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선거가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선거를 사흘 남겨두고 공개된 이명박 후보 광운대 특강 동영상이 막판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지금,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BBK라는 영문 세 글자만 머릿속에 남는 대선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대통령 선거라는 공간이 정책과 가치, 비전의 대결로 치러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교과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만 것 같아 씁쓸하다.

어제 내가 일하고 있는 한국사회당 중앙당사로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보낸 것이었다. 『사회 국가, 한국사회 재설계도』(진보정치연구소 지음, 후마니타스, 2007)라는 책이었는데, 1판 1쇄 발행일이 2007년 12월 10일자였다. 내용을 대략 훑어보고 나니 불현듯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2차 대전 직후 독일에서 등장한 사회국가 개념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독일 사민주의 운동의 산물이다. 사진은 1970년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찾은 빌리 브란트 수상.
 

타이밍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좀 더 일찍 발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 비전과 민주노동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코리아연방공화국 비전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토론되고 경쟁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사회국가, 코리아연방공화국, 사회적 공화주의

또한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 비전과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국 비전이 같은 반열에서 토론될 수 있는 타이밍도 놓쳤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 비전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대선이 끝나가는 시점에 등장한 이러한 국가 비전은 대선 직후 민주노동당 내에서 벌어질 논쟁의 신호탄과 같은 존재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을 넘어서서 진보정치 전체의 혁신과 질서 재편을 위한 불쏘시개로도 읽혀진다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독일 헌법에 녹아 있는 ‘사회 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 개념은 사실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지향을 담고 있는 말이다. 베네수엘라 헌법에도 ‘사회 국가’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 국가’라는 개념은 독일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물론 독일 내에서도 각 정당마다 ‘사회 국가’에 대한 이해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아무튼 진보정치연구소는 ‘사회 국가’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비전에 ‘공공’, ‘연대’, ‘참여’라는 특성을 부여했다. 이 중에서 특히 ‘참여’ 부분은 유럽의 사회 국가 혹은 후견 국가의 문제점으로 누차 지적되어 온 것이어서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한국사회당이 굳이 ‘사회 국가’라는 표현을 빌리지 않고 ‘사회적 공화주의’, ‘사회적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에도 이러한 맥락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 공화주의는 급부와 사회권의 문제로만 이해되어 온 사회 국가 개념을 근대 국가 발생의 최초형태인 정치적 국가의 가능조건으로 파악한다. 즉 사회적 공화주의라는 개념은 사회 국가의 급부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서 사회권과 참정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며 전자를 후자의 전제로서 인식한다.

… 사회적 공화주의가 급부를 강조하는 대신에 ‘급부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급부체계를 통해 대중의 참여를 역으로 봉쇄하는 후견 국가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후견 국가의 폐해는 복지확충의 의의를 물질적 복지 그 자체가 아니라 복지를 통한 사회적 과정에의 참여에서 찾음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 금민, 「탈배제 강령과 사회적 공화주의」

사회국가와 참여의 문제

위의 인용은 사회적 공화주의와 기존 사회 국가의 급부 중심적 사고방식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간단히 정리한 부분이다. 여기서 “급부체계를 통해 대중의 참여를 역으로 봉쇄하는 후견국가”라는 정의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관련하여 『차이의 정치, 이제 소수를 위하여』(이남석 지음, 책세상, 2001)라는 책에 마침 이러한 설명을 보충할 수 있는 대목이 있어 몇 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사회적 공화주의와 사회 국가와의 차별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복지 국가는 영원한 경쟁이 낳은 희생자 집단을 구제하려는 기획이다. 복지는 자유주의 경제 원리인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의 실패를 정치가 예방하고 수습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를 제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경영적 또는 관료적 합리성에 의해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복지 국가는 “이 모든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부자유의 국가이다”라는 말처럼 자유주의의 탈정치화 기획을 더 강화하여, 정치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강화시켰다.

복지 국가 하에서 “다원주의라고 하는 현실 그 자체도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으며 기만적이다. 복지 국가의 현실은 조작과 동질화를 축소시키기보다는 확대하며, 불행한 통합을 제지하기보다는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이남석, 『차이의 정치, 이제 소수를 위하여』138~139쪽

“복지 국가는 정치에 의한 경제의 보정을 목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유주의가 의도한 탈정치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복지를 도입한 후 ‘소수 정당에 대한 투표, 총선거에서의 낮은 투표자 수, 지방 선거에서의 보잘 것 없는 낮은 투표자 수, 참여와 항의에 있어서 이슈 중심적인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복지 국가의 진정한 위기는 흔히 말하듯 복지 국가 재정의 위기가 아니라 시민의 정치적 참여 의지의 결여, 즉 정치 참여 부재에 있다.” – 위의 책, 140쪽

한편,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는 ‘평화 공동체’와 ‘녹색’ 지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사회당 또한 사회적 공화국은 ‘평화국가’이자 ‘녹색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여 한국사회당은 ‘세계시민국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진보정치연구소 또한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패러다임에 사로잡힌 진보진영 일각을 명확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크게 차이 나는 부분은 없다.

낡은 유산으로서의 민족주의

진보정치연구소는 “민주노동당이 사회 국가 운동의 정치 부대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당의 전면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진보정치연구소는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민주노동당이 노조운동에 의존만 하던 허약 체질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프로그램 중심의 진보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자기 인식이다. 이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혁신의 화두를 던진 것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베려는 알렉산더(사진=위키미디어)
 

그리고 진보정치연구소는 버려야 할 유산과 새로 맞아들여야 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세기에 한때 진보적인 의미를 지녔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과거의 유산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이를테면 민족주의가 그러하다. 이런 ‘20세기 진보’는 이제 극복의 대상이다. 진보정당은 우선 당 안에서부터 20세기의 이 낡은 유산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리고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등으로 표상되는 ‘21세기 진보’의 흐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는 진보정치연구소가 일단 큰 방향은 잘 잡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많은 세세한 질문들은 여기서 생략해도 좋다. 그 방향에 대한 합의를 좀 더 넓히고 공고히 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대통령 선거 직후 내부 평가 논란과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을 둘러싼 논란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진보정치의 새로운 좌표에 대한 생산적이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 국가’와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국’, 민주노동당의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서로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면 한다. 그 과정에 한국사회당 또한 최선을 다해 참여할 뜻이 있다.

누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벨 것인가

진보정치연구소는 마지막으로 “누가 진보정당운동의 전면적 재구성에 앞장서고 그것을 책임질 것인가”라는 문제를 던졌다. 한국사회의 위기와 진보정치의 위기가 착종된 ‘고르디우스의 매듭(페르시아 왕 고르디우스가 신전에 전차를 묶어둔 매듭. 알렉산더가 칼로 잘랐다고 전해진다 -편집자 주)’을 누가 끊을 것인가라는 문제다. 진보정치의 혁신을 바라는 모두가 알렉산더 역을 자처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진보정치 혁신의 논의가 사회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 선거라는 사회적 행위 과정 속에서 진보정치 혁신의 의제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누구에게 투표하느냐 혹은 투표하지 않느냐는 그 자체로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위여야 한다. 주어진 기회를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편을 앞당길 수 있는지 현명한 판단이 요청된다.

최광은 / 한국사회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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