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간 동지들, 묻어둔 80년대로의 여행
    2007년 12월 14일 05: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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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이기도 하다. 한국이 먹고 살만해지고 기본권인 여행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시작된 시점이 묘하게 겹친다.

<사회평론 길>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한겨레21> 등에 글과 사진을 기고하는 이상엽의 사진책은 여행이 자유화되고 장벽이 열렸음에도 아직은 낯선 ‘9,938km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난 아득한 여행’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러시아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이라는 제목도 그러하고, 어두운 구름을 배경으로 음울하게 떠있는 레닌 동상의 표지 역시 그러하다. ‘혁명의 추억, 추억의 혁명’이라는 부제가 더욱 심증을 굳혀준다.

“20세기 인류의 최대 도전이었던 사회주의가 무너지던 그날, 레닌의 이상은 인민을 배반했다. 그렇지만 인민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의 육체는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쪽 끝 사할린까지 오늘도 여전히 서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러시아 전역에 서 있던 스탈린은 사라졌다.”

   
 모스크바의 레닌 동상(사진=이상엽)
 

물론 그 ‘레닌’은 레닌이 아니다. 모스크바의 ‘레닌’은 자본주의 기업 광고에 둘러싸여 있고, 블라디보스토크역 ‘레닌’ 앞의 인민들은 국영기업 아닌 노점상에서 빵을 사지만, 여전히 줄을 서긴 마찬가지다.

동상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나는 대부분의 레닌 동상 사진이 맘에 안 든다. 레닌 뿐 아니라 ‘위인 동상 사진’이 거개 그러한데, 위를 우러러 찍혀 있어 눈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상들이 크니 아래에서 잡을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굳이 높은 빌딩을 찾아 내려다보며 ‘위인 동상 사진’을 찍는 사진가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상엽의 여행은 더 먼 과거를 향하기도 한다. 그 역시 시베리아를 찾는 여느 여행객들처럼 바이칼의 부랴트족에게서 ‘데자부 또는 낯익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민족 기원’을 찾아 바이칼을 찾아든 범몽골리안주의자는 아니므로 당연히 더 먼 곳으로 침잠한다. 바이칼호 알혼섬 통나무집에서 그는 몇 해 전 죽은 후배를 만난다.

“어느 순간 이 방에 나 말고 누군가 있는 듯했다. 자작나무가 타고 있는 페치카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다. … 아무 말 없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미안했다. … 그래도 나는 묻고 싶었다. 너는 이제 편하냐고. 그녀가 답하는 듯했다. 그럼 선배는 어때요? 나? 아니!”

   
  ▲ 유즈노사할린스크의 고구려 복장 소녀들(사진=이상엽)
 

그래서 러시아 곳곳의 레닌 잔상은 사라져간 동지들에게로의 여행이고, 자연스레 잊었거나 억지로 묻어둔 80년대 옛 기억으로의 귀향이다.

책은 몇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9,938km에 이르는 지리와 변화무쌍한 기후가 낳은 갖가지 풍광들은 가만 들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책이 풍경만을 담고 있으면 좀 심심할 터이니, 사람 사는 모습 특히 다양한 인종의 젊은 여성들이 이 뷰파인더의 주인이 한국에서 온 남성임을 알린다.

여행이 한 고비를 넘는 중간마다에 자리하고 있는 ‘Tip’은 기차 여행을 하며 읽을만한 책을 소개한다.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대한 『샤먼의 코트』, 22권에 멈춰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등이 작가가 권하는 책이다.

“내가 본 레닌의 모습들은 한 시대 종말의 지표이자 미래 사회에 대한 묵시론적인 풍경이다. 레닌이 서 있는 풍경 속에서 나는 ‘율리시즈의 시선’으로 러시아를 봤다. 그저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떠돌이 이방인의 눈으로 말이다. 굿바이 레닌. 안녕히 소비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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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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