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세상에 이기는 싸움도 있다
        2007년 12월 05일 04: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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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깊은 얘기’를 쓰는 이근원 현장기자가 아주 오랜만에 원고 한편을 보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과 생각에 관심 많은 이근원이 이번에 만난 사람은 엄마 노동자 임정재. 그녀는 해고 5개월만에 구청에 복직했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나. 회유와 흔들림, 깨달음과 투쟁이 응축돼서 나타난 그 다섯 달의 속내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사진=공공노조
     

    송파구청 비정규직 임정재 조합원을 인터뷰 해야겠다고 마음 속에 콕 찍어 놓은 것은 지난 7월 13일 KTX 투쟁 500일 투쟁 문화제를 할 때부터였다. 요즘 나는 집회 사회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그 문화제의 사회를 보면서 연설하는 임정재 조합원을 처음 봤다.

    ‘초짜’라고 하기에는 인생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인권위원회에서 농성하는 자리를 같이 하면서 인터뷰 하겠다는 마음을 다시 굳혔다.

    그러는 사이 오랜 투쟁 끝에 복직이 확정되고 말았다. 축하하는 술자리를 한번 가지면서 약속을 잡았고 드디어 지난 11월 30일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출근하는지부터 물었다.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초짜’

    =12월부터로 했는데 휴일이라서 3일부터 출근해요. 꼭 5개월만이네요. 비정규법 시행령이 7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6월 30일자로 해고되었으니까.

    그러면서 웃는다. 그러나 누가 짐작 할 수 있을까? 구청에서 5년 6개월이라는 세월을 하루같이 전화교환 업무를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온 이 사람이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고 살아야 했던 지난 5개월을… 더구나 남편은 간암으로 쓰러져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 받아오고 있었다. 생계를 고스란히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일시사역 일용직이었는데 이번에는 계약갱신 없이 아마 상용직 정년에 준할 때까지 일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중간에 전환시킬지도 모르니까 그건 모르는 거죠.

    5월 31일, 그러니까 해고를 앞둔 지 불과 한 달 전에 노조에 가입했단다. "짤릴 줄 알고 가입한 거네요?" 했더니 또 웃는다.

    =솔직히 얘기해서 저희 같은 경우는 노동조합 자체를 몰랐잖아요. 노동조합에 가입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공무원들의 직장협의회 같은 경우는 지네들끼리 가입해서 지네들 권리만 찾는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들 문제는 신경도 안 쓰고 그런다고 생각했거든요.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공무원 직장협의회와 민주노동당, 그리고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남동지구협의회랑 이렇게 3팀이 4월부터 꾸준히 간담회를 했어요. 그러면서 처음부터 말한 게 아니라 살살 노동조합 얘기를 비쳐주기 시작했어요.

    노조에는 처음 6명이 가입했다가 저만 남았죠. 11년 동안 일하다가 해고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해고가 철회되었어요.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7월 6일 잡았는데 열심히 해 왔던 그 분이 나오지 않았어요. 구청에서는 이 사람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해고된 직후부터 바로 일하고 있어요.

    "제가 해고될 줄은 몰랐죠"

    저는 제가 해고될 줄 몰랐어요. 6월 12일 계장님이 불러서 "비정규직법이 시행되어서 어렵다"고 말했는데 저는 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그 동안의 정도 있고, 안면도 있고, 예산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데 다른 사람들이 "언니 잘렸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6월 18일로 해고가 된 거에요. 그래서 바로 6월 21일부터 선전전을 시작했어요.

    "바보잖아요" 했더니 "맞아요. 바보예요"라면서 또 웃는다. 그 다음 순서는 뻔하다. 그래도 그나마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어 ‘시사 투나잇’, ‘취재파일 4321’ 등에 나온 게 다행이다. 자신이 비정규 투쟁을 처음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투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었단다.

       
     
     

    다소 생뚱맞지만 복직을 하는 입장에서  아직도 투쟁을 해야 하는 KTX 여승무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임정재 조합원이 연설하는 걸 들은 그날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었다.

    =가슴이 저며요. 젊은 아이들이잖아요. 더군다나 이철 같은 분은 운동을 했다는 분이 과거를 까마득히 잊고 어째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참담했어요.

    그래서 그때 발언했던 것이 "이철 사장님 같은 분께서 운동하면서 가졌던 과거의 추억들이, 그 아름다운 기억들이 지금의 이 일로 다 지워져서는 안되는 게 아니냐?"라고 말했던 거예요.

    사람들이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 쉬워요.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시인하는 것은 정말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거든요. 잘못을 인정하는 그런 새로운 사회적 물결이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아름다운 조연

    구청도 저 같은 경우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잖아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선례를 남기고, 그런 사례가 따뜻하게 번져나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 아니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000 송파구청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구청장이다. 그래서 임정재씨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구청장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읽고, 구청에 전달하는 바람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구청장은 그 긴 투쟁 기간 중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누구나 인생의 드라마를 쓴다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가 주연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작품의 주연일 수도 있지만 조연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주연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조연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비정규직법을 시행하는 데 구청장님이 따뜻한 모범을 보이는 주연 역할을 하시면 저는 조연 역할을 해서 주연을 훨씬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얘기를 썼어요. 그런 아름다운 드라마가 써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가식이 없는 절절함을 가지고 가정적인 어려움과 누구보다 대민업무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호소했지만 당연히 무시되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투쟁 기간 중 있었던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겠다고 말을 잇는다.

    정말 죽을 생각했어요, 진짜로

    =7월 2일부터 출근투쟁을 했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제가 뭘 알겠어요? 저기 가서 앉아 있으라면 앉아 있고, 나오지 말라면 나오지 않고 죽치고 있었어요. 창피하기도 했고,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이 짓을 해야 하나라는 마음도 들었어요.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고 정말 죽으려는 생각을 했어요. 진짜로. 지난 삶들도 내가 힘들게 살아왔는데, 사람이 죽을 때 잘 죽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내가 희생을 하고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죽음도 값어치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죽으려고 했어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치스럽고, 모욕과 모멸이 심했어요. 단식으로 죽으려고 냉장고에 물도 다 준비해 놓고, 진짜로 다 준비해 두었어요. 하다가 중단하는, 하는 척하는 단식이 아니라 정말로 죽는 단식을 하려구요. 그만큼의 인내력이 저한테 있거든요.

    그래서 총무과와 투쟁을 지도했던 공공노조 서울본부 권혁무 부장에게 편지를 주었어요. 근데 조직국장이 "아줌마 이건 마지막에 하는 거예요. 해 보지도 않고 이거부터 하는 거 아니거든요. 아줌마가 이렇게 한다고 하면 안 도와 줄 테니까 맘대로 하세요."라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아줌마가 여기서 단식하면 용역들이 냉큼 들어다가 다른 곳에 둘 거라고 하구요. 안 도와 준다는데 어떡해요.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재미있는 사건이라더니 죽으려고 했던 얘기를 한다. 느닷없이 죽는 방법을 ‘단식’으로 했다고 해서 둘이 한참을 웃었다. 서로 잘 알고 있기에 웃긴 했지만 당시의 절박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억울함과 비참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임정재의 어린 ‘사부’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을 하면서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절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겠는가? 대화가 진행될수록 공공노조 권혁무 미조직비정규직 사업부장 얘기가 많이 나온다.

    투쟁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 한마디로 죽을 결심을 바꿔 놓은 사람, 그 사건으로 인해 임정재 조합원이 마음 속으로부터 ‘사부’로 정리한 사람이다. 그는 민주노총의 50억 기금을 통해 비정규활동가로 뽑혀 공공운수연맹에 배치되고, 다시 공공노조 서울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송파구청 앞에서 복직을 축하하러 온 동지들에게 인사하는 임정재 조합원. 옆에는 서 있는 사람이 ‘사부’ 권혁무 부장이다.
     

    임정재 조합원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투쟁을 함께 해왔다. 투쟁을 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석 전에 복직 얘기가 있었어요, 시설관리공단 업무직을 시켜준다는 거예요. 그 자리는 임금도 배로 올라요. 사람들에게 축하인사도 다 받았어요. 노조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잘 된 일이라며 모두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어요.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는구나 싶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구청 총무과에서는 쉽게 생각했지만 공단 이사장과 조율이 안돼서 결국 없었던 게 되고 말았어요. 그 사실을 알고 추석 연휴 전에 사람들이 위로해 주었는데 집에 가는 택시에서 엄청 울었어요. 택시 타고 혼자가 되니까 갑자기 너무 슬퍼지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기사가 놀랄 정도로 엉엉 울었어요.

    집에 가서도 밥도 안 해 주고 울면서 하루 종일을 누워 있었어요. 추석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나도 안한 거예요. 남편도 물어보지도 않더라구요. 그 때 딱 맘속으로 정리를 한 거죠.

    처음 시작할 때 내가 노조에 가입 안 했으면 그냥 집에 와 있을 상황이고 제로의 상황이었을 텐데 이게 부당하니까 같이 해보자하고 시작한 거잖아요. 비정규직법이 잘못된 거고, 공공기관에서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데 그렇지 않잖아요.

    유혹에 넘어간 나약한 인간

    내가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초연해졌어요. 그래서 이번에 복직이 되면서 사람들이 나에게 기쁘냐고 묻는 데 기쁨이 없는 거예요. 그 때 하도 심하게 느껴서 아직까지 기쁨이 없어요. 항상 공허해요.

    회유도 많았다. 8월 9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현재와 같은 자리에 무기계약직으로 오라는 제안이 있었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계약서에 독소조항도 있었다. 당연히 거부되었다. 8월 29일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농성할 때도 다시 그런 회유가 있었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처음 들어가면서 두려웠어요. 배가 아플 정도로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그렇게 들어갔는데 보안요원들이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잡아가는 줄 알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어요. 하하하. 나중에 보니 괜찮더라구요. 눈 큰 사람이 겁이 많잖아요.

    인권위 농성을 4명이 같이 하면서 정말 보람을 많이 느꼈어요. 지지 방문을 엄청 왔거든요. 농성에 들어가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구청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 노조에 얘기하지 말고 와라. 그러면 계약서에 독소조항 다 빼주고 1년 후에 상용직 되는 걸 내가 책임지고 해 주겠다"는 거예요.

    집에 가서 얘기하니까 아들은 "엄마, 가. 노조에 얘기하지 말고 가!"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사부’를 배신할 수 없는 거였어요. 그 전에도 사부가 근로계약서만 검토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 왔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침에 권혁무씨를 만나서 신이 나서 말을 했죠. 혼자서 가려구요, 독소조항은 다 빼준다고 했으니까.

    기쁜 일이 더 많았던 노조 활동

    그런데 같이 가자는 거에요. 그 쪽에서는 혼자서 오라는데. 그래서 다투었어요. 혼자서 가면 개인적인 일이 되고 마니까 같이 가야 된다는 거예요. 옥신각신 하는데 사부가 "아줌마가 알아서 해요"라고 화를 확 내고 가버리는 거예요.

    자긴 회의가 있어 가야 한다면서요. 결국 못 갔는데 그 때 되게 힘들었어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우리 사부가 툭하면 가버린다고 해서 그랬던 거 같아요. 하하하.

    임정재 조합원은 말을 참 잘한다. 연설을 처음 듣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천주교 교리반에서 노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단다. 교리를 쉬운 말로 풀이해서 가르치다 보니, 어떤 상황이 머리 속에서 순간순간 ‘딱’ 정리된단다. 활동이 여의치 않은 남편과 회사에 다니는 27살 된 아들, 고1이 된 17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다. 부모님이 모두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키워주셨단다.

    =노조 활동하면서 슬펐던 일보다 기뻤던 일이 더 많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사랑받고 살았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아요. 여기 와서는 모든 분들이,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의 손길이 느껴져서 좋아요.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학식과 지위에 따라서 대우하고 대하는 게 다르잖아요.

    심지어는 결혼하고 살아보니 똑같은 며느리가 있어도 그 사람이 자라 온 환경과 학벌에 따라서 저희 시어머니가 대하는 부분이 다르고, 집안에서조차도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걸 전혀 찾을 수 없었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큰 기쁨이었어요.

    친척들은 만나면 "너 이제 클났다"라고 말해요. 노동조합을 맨날 싸움이나 하는 집단으로 보는 그런 선입견이 있어요. 이제는 대화가 잘 안돼요. 그런 사회적 모순과 생각하는 기준을 바꿔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싸우면서 엄청 많이 변했어요

    괴리가 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론이 단절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우리가 투쟁하게 되면 시끄럽다는 면만 비춰주잖아요.

       
     
     

    저 사람들이 어떤 문제와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 보도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고,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단 "저것은 나쁜 짓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다보니까 전혀 동조가 안 되는데 이게 바로 사회적인 문제라고 봐요.

    그리고 커다란 문제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신문이나 방송이나 다 광고수입으로 하다보니까 그 사람들을 건드리기 어려워져 정말 없는 사람들, 광고를 전혀 받지 못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 보도를 안 해 준다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지만 그게 느껴진 거예요.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은 변화한다. 그런데 임정재씨도 그럴까? 혹은 본인이 그걸 느끼고 있을까?

    =엄청 느껴져요. 저 자신이 사고하는 방식부터 벌써 달라졌어요. 아주 쉬운 예를 들면 대통령 선거를 한다하면 기존의 제 생각은 될 사람을 찍어주자는 거였어요. 나의 주권을 어디다 올바르게 행사한다기보다는, ‘내가 이 사람의 의견과 주장과 생각이 좋으니까 표가 적더라도 이 사람을 찍어줘야 한다’는 게 아니었죠.

    그런 사람을 아예 꽝 무시해 버리고 "될 사람을 찍는다"라고 지금까지 사고가 그랬거든요.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몰랐어요. 이 상황을 겪으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느꼈어요. 내가 그 조그만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정말 주관있게 나의 거를 얘기해야 한다’, ‘큰 거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나 자신부터 변화가 되어야 다른 부분이 변할 수 있는 거다’라는 거를 느꼈어요.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변하기를 바라면 변화가 되겠어요. 안 되지. 그런 귀한 거를 배웠어요.

    내가 변해야 큰 거를 변화시킬 수 있어

    사실 이런 얘기를 듣기는 쉽지 않다. 혹시 철학공부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술자리에서도 깊이 있는 얘기를 하곤 한다. 중학교 때부터 ‘인생무상’을 생각하기도 하고, 하모니카를 들고 충남 서산 들판을 헤매며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고 한다.

    남들처럼 부모님이 없다는 점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남자처럼 키워 20살이 될 때까지 남자애들과 싸워서 진 적이 없었단다. 그 때 배운 하모니카 실력은 12월 6일 공공노조 서울지역본부 송년의 밤에 오면 ‘철의 노동자’와 ‘비정규직 철폐가’을 들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평생 농사꾼이던 할아버지가 "살면서 힘든 때가 온다. 인생의 70%는 자기 노력과 어쩔 수 없는 30%의 운명이란 게 있다. 운명은 사주와 손금과 관상에서 온다.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좋으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얼굴은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오더라도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이겨내라. 항상 착한 마음 밝은 마음을 가지고 얼굴을 가꿔가라. 그러면 네 30%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힘든 일이 생겨도 결코 좌절하지 마라"라고 가르쳤어요. 아마 제가 항상 잘 웃는 이유가 그 말씀 때문인 거 같아요.

    복직하는 부서는 5년 넘게 해왔던 전화교환이 아니라 주차관리 부서다. 날씨는 춥고 어려울 것 같다. 여성은 혼자뿐이라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이후에 본인처럼 비정규직 투쟁으로 몰리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물었다.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며 살 거예요. 구청에서 주어진 일은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근무시간 외에는 할 수 있는 만큼 노조 일을 할 거에요. 권리라는 것은 주어졌을 때 본인이 찾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거를 얘기해 주고 싶어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어요. 법이란 게 본인이 찾지 않으면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요즘은 많은 투쟁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주어진 권리만 찾는 게 아니라 없는 권리도 우리가 투쟁해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다녀요.

    본인이 찾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권리

    인터뷰를 마치면서 인권위원회 농성장에 붙어 있었던 임정재 조합원의 글을 남긴다. 농성장에서 본 이 글이 좋아 메모지에 써서 지금까지 지갑에 보관해 왔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이다"라는 그 말이 가슴에 남아서였을까?

    "인권위원회에 도착하여 보니 감회에 젖어 회상에 잠겨본다. 어느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요즈음 나의 일상은 흐르는 물결에 나의 몸을 맡겨 빠르게 느리게 또는 장애물에 걸려 돌아서 가기도 하고, 무엇이 있을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떠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목표는 설정되어 있겠지? ‘장애인 차별금지 실천연대’와 함께 하면서 또 다른 세계에 대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누구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장애인이란 정해진 틀이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 있고, 이해를 뛰어 넘어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생각해 봤을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나의 인권을 얼마나 보장받으며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면서 인권의 문제를 좀 더 폭넓게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게 생각된다.

    비정규보호법이 인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오해를 뛰어넘어 이해하게 되고, 이해를 뛰어넘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게 되면 기적을 이룰 수 있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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