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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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22일 0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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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교육 현실은 광란 그 자체다. ‘한번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미친 세상’이 낳은 결과다. 교육 광란을 낳는 대학서열체제는 ‘반상(班常)’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열’을 매기는 제도다.

    초중고 교육은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과정으로 왜곡되었다. 교육현장에서 ‘80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점수가 몇 등인가만 중요하고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진정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점만으로도 초중고 교육이 왜곡되었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초·중·고 학생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암기하고 문제 푼 것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게 무엇인가?

    그것이 벗과도 자연과도 사귀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등수와 등급의 노예가 되어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진 인성, 닫힌 상상력에 값할 만한 것인가? 조기유학과 국외연수 열풍,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에 값할 만한 것인가?

    고전 한 권 읽지 못하는 학생

    모든 가정이 겪어야 하는 사교육비의 과중한 부담은 둘째 치고 우리 아이들을 경쟁의 아수라장에서 구해내야 한다. 자연과도 벗하고 친구와도 벗하면서 마냥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 시절을 온통 빼앗아 좁은 공간에 가두고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사회가 온전한 사회일 수 있는가.

    등급과 석차 스트레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아이들을 자살로까지 몰아가는 현실을 계속 용인할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인권을 말할 수 있고 상식과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대학서열체제 아래 교육과정은 필연적으로 상대평가를 요구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이웃 학생은 더불어 사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 대상이 되고 모든 사회구성원을 어린 나이 때부터 경쟁의 각축장으로 내몬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경쟁을 요구한다. 굳이 교육이 경쟁을 부추기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충분히 경쟁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회구성원들에게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대신 연대의식을 심어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회에서 자아실현의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학교 현장의 모습은 정반대다. 연대의식 형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사회구성원은 어린 나이에서부터 집 바깥에서는 그 누구하고도 서로 위하는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로지 경쟁하는 관계에 서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 핵가족 단위의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는 배경이다. 이처럼 경쟁의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내몰리고 인간성은 황폐화되고 사회는 ‘동물의 왕국’이 된다.

    공부 안하고 게으른 학생을 만드는 학벌체제

    학벌체제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입시지옥은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구성원들에게 현대판 신분제의 당연한 결과로서 사회적 불평등을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벌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서 특권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귀족화한 사회상층에 대한 견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신분제에선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의 사회상층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긴 자와 패배한 자가 모두 학벌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획득하는 지위, 명예, 권력과 부를 그들의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교육비 지출은 투자처럼 인식된다. 경쟁 승리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투자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상층에게서 사회 환원의식이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오로지 특권의식과 집단이기주의로 무장한 패거리로 존재하게 된다.

    학벌체제는 대학생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도록 작용한다. 이미 만18살에 인생의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 공부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명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그 유리한 고지를 지키면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학벌을 따라갈 수 없다는 낭패감으로 공부를 게을리 한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일생 동안 오직 두 번 긴장한다. 대학입시 때 한 번, 그리고 임용이나 취직할 때 또 한 번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기에 일단 대학생이 되면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기도 하거니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각종 학습노동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도 공부를 게을리 한다.

    또한 일찍부터 남과 경쟁하는 데에 익숙해짐으로써 정작 자기와의 싸움을 게을리 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평생 공부하고 연구하며 자기완성의 길을 모색하지 않게 된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학문 연마와는 관련이 없다. 오로지 학점 관리하고 토익 점수 높게 받아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이 취업준비학원이 된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을 연마하지 않는 대학에서 학문경쟁력이 나올 리 없고 학문경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경쟁력이 나올 수 없다.

    야만적 동물의 왕국을 거부하자

    대학평준화가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부디 유럽에 눈길을 보내기 바란다. 그리고 어느 구조에서 경쟁력이 생길 수 있겠는지 생각을 발동하라. 서열화된 한국처럼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거의 마감되는 구조와 평준화된 유럽처럼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시작되는 구조의 둘 중에서 어느 쪽에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는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사회구성원을 대학간판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대학간판의 억압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남과 경쟁하는 것만이 아닌 자기와 싸우면서 공정한 경쟁게임에 나설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이 상호 비판과 견제 아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될 때 국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민도가 높아져 문화국가의 지평을 열 수 있다.

    더 이상 광란의 한국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잠깐이라도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분을 지켜 ‘야만적인 동물의 왕국’을 거부하자.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거부하고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하자. 무수한 담론을 넘어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회복하자.

    우리 모두 대학평준화를 적극적으로 상상하자.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나서자. 11월 24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범국민 행동의 날”은 그 실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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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세화 대표는 11월 24일(토) 5시 광화문에서 열리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문화제”에 대표 발언을 할 예정입니다. 이상으로 <레디앙>과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공동으로 기획한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연속기고’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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