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아직까지 열사들 덕 많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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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21일 06: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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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일 아침 6시 55분, 부산 제1부두 위로 해가 떠오른다. 배, 크레인, 컨테이너가 즐비하다. 뭍으로만 돌다가 바다가 있는 곳으로 오니 그 느낌이 다르다. 7시 4분, 한진중공업에 도착했다.

    권영길 후보는 비정규 하청노동자들이 작업복을 갈아입고 일할 준비를 하고 나오는 생활관 앞에 섰다. 생활관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하청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쌀쌀한 바람을 뚫고 어디선가 힘찬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한진중공업 정치위원회 이름으로 환영하는 글귀가 적힌 펼침막, 이른 아침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사진기를 들고 나온 중년 노동자들을 보니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현장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진보정치
     

    스물 일곱에 들어와서 마흔 일곱을 넘기고

    만 21년 동안 한진중공업에서 배를 만든 정남수 교육선전부장이 작은 사진기를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스물일곱에 들어와 서른일곱을 넘기고 마흔일곱을 넘겼다. 정년이 쉰일곱이라는데 정남수 교육선전부장은 아무래도 쉰일곱도 이곳에서 맞이하지 않을까 싶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생활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여기는 협력업체 노동자들, 저쪽 건너편은 직영 노동자들,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임금이 많이 차이가 나나요? 비정규직 노동조합도 있는가요?”
    “임금이 차이 나죠. 비정규직 조합은 없습니다.”

    차이가 아닌 차별. 짧은 대답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조에 가입할 수 있나요?”
    “아, 그런 게 안 돼 있지요.”
    “그럼 노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 관련해서 준비하는 일이 있나요?”

    “지금 하고 있지요. 우리도 노동조합에 비정규직 담당자가 두 분이 있거든요. 체계적으로 하려고 설문조사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단점이 비정규직 사업은 장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노조 집행부 임기가 2년이라 2년이 끝나면 그 양반들이 현장에 내려오고 다른 분들이 올라가 그 사업을 받아 안고 가면 연속성이 약간씩 끊어지는 게 있지요. 그러니까 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생활관 앞에는 일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조선소공업협회 차원에서 신청해 1~2년 기한으로 산업연수생으로 온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100~200여 명 일한다는데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도 따로 있다고 한다.

    조선 호황 속 외국인 노동자들 많이 들어와

    우즈베키스탄, 네팔, 필리핀에서 많이 온다는데 생김새로 보아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이 많아 보인다. 한진중공업만 아니라 조선 업종이 지금 호황이라 수주한 물량이 넘쳐 대부분 조선소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비정규직 사업에는 이주노동자들도 포함되는가요?”
    “그렇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 이 문제는 비껴가서도 외면해서도 미루어서도 안 될 문제이다. 노동자들 집회와 시위에서 함께 ‘비정규직 차별 철폐’나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를 외치지만 현장으로 돌아오면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 통합 문제나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문제가 그리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구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습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외치는 구호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 그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상당히 더디게 갈 수밖에 없죠. 밖에서 말하는 구호도 ‘비정규직 철폐하자’ 이렇게 하는데 실제 철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무슨 자료라거나 근거가 있어야 되고, 노조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향성이 있어야 하는데 여태껏은 그냥 구호로만 되어왔던 거죠. 근데 지금 집행부가 새로 서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게 어려운가요?”
    “우리는 가깝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우리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 분들이 조직화된 노동조합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물론 언제 다른 데서는 겪어봤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현장에서는 아니고 어쨌든 아직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점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비정규직 요구를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스무 해가 지났지만 노동자들이 서로를 엮어 조직을 만드는 일이 쉬워진 게 아니라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되어버렸다. 현장을 조각조각 내어 여러 하청업체 소속으로 나누어진 노동자들은 옆 동료와 불만을 토로하기도, 불만을 한 목소리로 모아내기도, 노조를 만들기도 어려워졌다.

    관리와 감시가 오히려 스무 해 전보다 더 철저해진 건 아닐까. 스무 해를 지나면서 민주노조 운동이 커오는 동안 거꾸로 노동자들이 노조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매년 하는 임단투 투쟁에서 비정규 노동자 관련해서 회사 측에다 많이 요구를 하는데 마무리 단계에서는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거나 주장하는 거를 강하게 대변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지요. 그런 거에 불만이 아무래도 있죠.

    우리가 선전할 때는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약간이라도 호응해주고 우리가 투쟁할 때는 간접으로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거든요. 투쟁기금을 낸다든가 어떤 지원도 해주시는데 우리가 모든 노동자들을 안고 그렇게 끝까지 해결해드렸던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사이가 멀어지게 할 수 있죠.

    두 번째는 정규직인 우리는 어쨌든 가깝게 하고 ‘우리는 하나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때는 우리가 좀 더 고생을 해야지 이익을 챙기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는 관점의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이런 게 극복하기가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 하지만 쉽진 않습니다"

    “다른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조와 정규직 노조가 통합하려고 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던데 한진중공업 조합원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고 하지요. 어쨌든 우리는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집행부이니까, 사회 전반의 문제까지도 노동자가 안고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노조이니까, 사람을 가장 우선시하고 비정규직이니 정규직이니 구별을 안 두고 하려는데 그게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도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렇게 안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거죠. 최대한 가깝게 가려고 계속 노력은 합니다.”

    골을 낸 건 노동자들이 아니다. 골을 더 깊게 만들고자 하는 건 노동자들이 아니다. 누가 노동자 사이에 골을 내는지 잘 들여다 볼 일이다. 벌써 만들어진 골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 일터에서 아버지가 정규직으로 일하고 아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현실을. 어머니가 정규직으로 일하고 딸이 호출노동자로 일하는 현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가 어느 정도 되나요?”
    “전체 인원이 사무실까지 하면 2천 명, 협력업체는 약 천에서 천오백. 그런데 협력업체는 유동인구가 많잖습니까. 그래서 정확한 인원은 아무래도 알기가 어렵지요.”

    “시간이 가면서 협력업체 수가 늘어나나요? 아니면 고정되어 있나요?”
    “우리는 단체협약에 의해서 어느 정도 노조에서 그런 면에서는 참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규직 신규채용도 있나요?”
    “있지요. 정규직도 있고 협력업체도 있고.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면 조합에서 제도적으로 신입조합원 교육을 합니다. 그런 교육을 통해서 노조에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는데 협력업체로 채용된 분들은 그런 길이 딱 막혀 있는 거죠.”

    "노동자 삶이 다 그렇잖습니까"

    “대부분 나이들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정년퇴직 뒤에는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정년퇴직 하신 분들이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자 삶은 그렇잖습니까? 우리가 뚜렷하게 다른 걸 가진 것도 없고 결국 다시 노동자 생활을 하는 거죠. 노동으로 단련된 체력이 있으니까 일할 수 있지요.”

    “하루 일하는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아침 8시에 시작해서 5시 퇴근인데 잔업을 하게 되면 1, 2시간 더 하죠.”

    여성노동자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일할 곳으로 간다. 예전에는 정규직으로 용접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도 많았다는데 지금은 비정규직으로 거의 대부분 청소나 도장 일을 한단다.

    “일하는데 힘들거나 산재사고 같은 건 많지 않나요?”
    “공법이 기계화 되고 대부분 경력 노동자라 예전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지요. 산재사고는 많이 줄었습니다. 조선소는 산재사고는 계속 일어난다고 봐야 하는데 어쨌든 조합도 노력하고 회사도 노력하고 그럽니다. 아침에 보고대회라고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조합원들에게 보고하는 시간이 있거든요. 그때 마지막으로 항시 하는 얘기가 ‘우리 몸은 우리가 아껴야 한다. 산재사고 안 나게 작업할 때 조심하시라’고 계속 얘기하지요. 다른 사업장에 비해서 산재사고가 상당히 적다고 봐야지요.”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하는 일이 좀 힘든 거죠. 한국 사람이 안 하는 걸 좀 더 하는 거죠. 페인트칠도 하고, 청소도 하고, 조선소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그라인다…….”

    “그라인다, 어떤 일이죠?”
    “(생활관 앞에 철판으로 만든 배 몸체를 가리키며) 저 철판 있잖습니까. 녹슬었잖습니까. 저런 거를 벗기는 게 그라인다죠.”

    "솔직히 지금까지 열사들의 덕을 보고 있습니다"

    일일이 사람이 달라붙어 하루 종일 녹슨 걸 벗겨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득해진다.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하면서도 사람 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노동을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런 일은 사람들이 일일이 다 해야 하는 거죠?”
    “그렇죠. 예전에는 기계도 도입해서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기계는 잘 안 되고 사람이 하는 게 가장 정확하고 매끄럽고 깔끔하죠.”
    “저런 거를 다 용접을 한 거잖아요. 어떻게 뭘 타고 올라가나요?”
    “고소차라고 있거든요. 그것도 있고, 족장이라고 우리말로는 발판이라고 하는데 발판을 많이 까는 거죠.”

    아무리 기계화되고 자동화 되어도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온전히 사람 손길이 닿아야 하는 일이 있다.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도 처음에는 스프레이로 작업을 하지만 그걸로 완벽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람이 붓을 들고 칠해야 한다. 사람 손이 가야 완성이 된다. 노동자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배. 노동자 손끝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세상.

    “20대 노동자도 있나요?”
    “20대라도 학교 졸업하고 바로 오는 사람보다는 군대 갔다 오니까 23~25살 이 정도죠.”

    “조합이 하는 일에 노동자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나요?”
    “한진중공업 노조는 박창수 위원장 때부터 해서 김주익 위원장, 곽재규 열사, 이런 분들의 힘으로 그 덕을 솔직히 지금까지 보고 있다고 봐야지요. 우리 노조는 열사 투쟁 이후에 조직력은 복원되었고 어쨌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조합에 열심히 참여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점이 그래요. 다른 조선소보다 인원이 적다보니 형님 동생 이렇게 부르면서 인간적으로 맺어진 의리랄까요, 이런 게 어떻게 보면 동지애보다 앞서는 회사고 노조라고 볼 수 있죠.

    예전에는 그랬죠. 우리 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도 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들 자본이 만들어놓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선배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쟁취해왔던 것이죠. 그런 것을 이제 우리 대에 와서 누리고 있는 거죠. 우리도 열심히 투쟁해서 이후에 우리 회사에 들어오시는 노동자들한테 좋은 일터 물려주고 정년퇴직하고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배들이 쟁취해놓은 것들 후배들한테 물려주고 정년퇴직해야죠"

    지금 내게 돌아올 좋은 조건이 아니라 얼굴 모르고 스쳐 지나갈 앞으로 올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지금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남수 교육선전부장. 지금 누리는 그나마 나은 생활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프게 걸어온 이 노조가 제대로 걸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21년 동안 일하시고 운동하시고 그랬는데…….”
    “운동까지는 무슨……. 저는 조합 활동.”
    “운동이 대단한 무어라기보다 내가 발 딛은 현실에서 잘못된 거를 함께 더불어 바꾸어나가는 게 저는 운동이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21년 동안 이 현장에 계시면서 노동자로서 자랑스러웠던 것과 노동자로서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 좀 해 주세요.”
    “노동자가 자랑스러운 게 뭐 있습니까. 어쨌든 노조를 중심으로 조합원이 힘을 한 데 모아서 작은 투쟁이라도 승리했을 때 그때 오는 희열이랄까 그런 게 있고요. 가장 안 좋고 잊어버리고 싶은 그런 기억이 있다면 김주익 열사……. 그때 제가 또 직책이 교육선전부장이었는데 만 4년을 같이 옆에서 제가 보좌해 드렸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많이…… 지금도…… 아픕니다.”

    잠시 말이 사라졌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대 입에 문다. 기사로만 본 나도 지나간 그 시간이 생생한데 바로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호흡해온 사람에겐 말해 무엇 하랴. ‘아프다’는 말을 어찌 공감한다 말할 수 있겠는가.

    “4년이 되었네요. 지난 10월 17일 4주기 추모식을 했거든요.”

    담배 연기가 몇 차례 허공으로 사라지는 동안도 말을 잇지 못한다. 괜한 질문을 했던 걸까.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가 매운 것은 아니리라, 눈을 깜빡이는 건.

    “많은 분들이 지금도 아파하시죠?”
    “네. 어쨌든 다 사람이 하는 거니까 변화는 끊임없이 오는 거고. 그런 변화가 발전으로, 우리가 말하는 진보되어 가면 좋은데 밀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건 저 개인만의 생각일랑가 다른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 회사와 관계에 있어서 노조가 어려운 건 없고요?”
    “열사 투쟁 이후에 회사도 상당히 조심하지요. 될 수 있으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고, 노조도 굳이 회사에서 도발을 안 해 온다면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니까 회사도 조심스럽게 하고 노조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지요.”

    "느그들 믿으니까 잘해보자"

    “조합 간부들은 조합원들과 어떤 식으로 만나나요?”
    “노조가 일상 활동 속에서 조합원에게 가까이 갑니다. 일과시간에 현장을 자꾸 찾아갑니다. 조합원들하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얘기도 하고요. 일상에서 소통하는 관계를 만들어 이루어지는 것이지, 따로 퇴근해 일부러 보고 모이게 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조합원들도 간부들한테 ‘느그들 믿으니까 잘해보자’ 그러고, 간부들도 ‘나도 잘 하겠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니까 그런 거는 염려 없습니다.”

    아침 8시. 이제 하루 노동이 시작된다. 생활관 앞에는 더 이상 오가는 사람들이 없다. 모두 자기가 일할 곳으로 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만들리라. 정남수 한진중공업지회 교육선전부장은 갑작스럽게 다가가 앞뒤 없이 묻는 낯선 내게 정성껏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야기 하는 동안 시간이 금세 가버렸다. 잠깐 간단히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녹음기를 껐다 다시 켜고 껐다 다시 켜고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남수 교육선전부장이 해온 21년 노동과 노동운동의 세세한 결을 언제 다시 들여다보면 좋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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