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님, 정규직 작업복 좀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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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21일 05: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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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0일 화요일, 아침 6시 40분. 전주에서 완주로 달리는 길. 7시가 가까워오자 완주산업단지로 향하는 차들이 너른 찻길을 메운다. 만경강 자락 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넌다. 더러 자전거를 타고 산업단지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7시 15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당원들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전주공장위원회 간부들이 공장 앞에 벌써 나왔다. 민주노총 차량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가 바삐 오가는 사람들 발걸음에 얹힌다.

    건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건널목에 선다. 수신호에 맞춰 오던 차들이 멈추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넌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내민 손을 외면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잡아준다.

       
      ▲사진=진보정치
     

    노동자로 살기가 참 힘든 나라

    공장으로 들어가는 양쪽 문 앞에서 노조 간부들이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한 장으로 된 ‘노조소식’지를 나누어준다. ‘금속노조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저지 파업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현대자동차지부 전주공장위원회 김명선 의장’ 소식이 앞장에 실렸다. 기사 끝자락에 적힌 ‘노동탄압’이라는 글자에 눈이 간다.

    참 오랫동안 “노동운동 탄압하는 ○○○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친 때가 있었다. 지금 이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아주 작은 권리나마 찾자고 노동조합을 만들다가, 파업하다가, 점거하다가, 규탄하다가, 반대하다가 갇힌 노동자들(2007년 10월 22일 현재 구속노동자 51명, 구속노동자후원회 현황)이 있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려고 하면 정권과 언론은 아는 낱말이 ‘불법’과 ‘엄정 대처’밖에 없는지 그 말만 되풀이한다.

    그리고 공권력 투입은 누구 하나 눈치 볼 필요 없이 수월한 일이 되어버렸다. ‘노동운동’ 탄압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이 문제다. 여전히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목숨을 끊어야 하는 때이다. 노동자로 살기가 참 힘든 나라에서 우리가 산다.

    ‘노조소식’지를 손에 쥐고 공장 문 저쪽으로 잰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어쩌다 한두 명 빼고 모두 곤색 잠바를 입었다. 얇은 홑잠바를 입은 사람도 더러 있다. 곤색 잠바 모두 똑같아 보이는데 그게 아니란다.

    예전엔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현대마크가 찍힌 잠바를 입었다는데 지금은 하청업체 이름이 적혀 있단다. 하청인 줄은 모르고 아들이 현대자동차에 다닌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는 누군가는 정규직으로 일하는 아는 형에게 “형님, 옷 있으면 좀 줘요”라고 해야 한다.

    "형님, 정규직 옷 좀 빌려줘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는 모두 5천 명 정도가 일한다. 사무직까지 포함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4천 명,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 명이라고 한다. 소식지 앞장 아랫부분에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자 모집공고가 났는데 11월 10일은 전 공장에 특근이 없다고 한다.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하는데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해당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건너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오는데 회사 정문으로 바로 들어가는 차들이 보인다. 정문 앞부터 한길 앞까지 청소하는 용역 소속 노동자 아주머니께 물으니 이런 차들은 부장급이나 협력업체 사장들 차라고 한다. 표시딱지가 붙어있다고 한다. 다른 차는 세우지 못한다고 한다.

    줄을 이어 통근버스가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7시 30분쯤 되니 퇴근하고 나오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출근과 퇴근이 섞이는 시간이다. 퇴근하고 가는 아침, 날이 쌀쌀하다. 밤새 뜬눈으로 있다가 나오는 사람들. 어젯밤 9시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침 7시30분까지 일을 하고 하나씩 둘씩 밖으로 나온다. 교대하는 주간 노동자들은 이제 저녁 6시 50분이 되어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쉬이 잠들 수 있을까. 검고 두꺼운 커튼으로 햇빛을 막고 잠을 청하거나, 아예 더 몸을 움직이다가 출근하기 몇 시간 전에 눈을 붙일지도 모르겠다. 사택에서는 밖에서 큰 소리가 나면 싸움이 붙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수면제와 각성제 그리고 노동

    언젠가 우연히 동네 약국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노동자가 야간근무에 들어가야 하는데 수면제에 취해 어찌할 줄 몰라 정신 차리는 약 좀 달라고 하는 걸 보았다.

    아침에 퇴근하고 나오면 도통 잠을 잘 수 없어 수면제를 먹었다는데 저녁 출근을 앞두고 눈은 떴지만 몸이 깨어나지를 않는 거다. 여자는 타이밍을 원했지만 약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해 피로회복제 하나 마시고 갔다. 생산은, 24시간 생산은 꼭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일까, 사람보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일하는 배형봉 민주노동당 완주군위원회 부위원장은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가 가장 위험한 노동”이라고 말한다. 피곤한지 모르고 돌아가는 기계들과 멈추고 싶지 않은 자본은 때가 되면 쉬고 자야할 사람들을 억지로 잠들지 못하게 해 기계 앞에 붙들어둔다.

    전주공장은 버스부는 맞교대로 트럭부는 주간으로 일한다. 아침에 퇴근해 건널목 앞에 선 노동자에게 “힘들겠어요?” 하니 옅은 웃음을 띠며 “하, 뭘요”라고 한다.

    대기업인 현대자동차는 주5일 근무제다. 그러나 사실은 주5일 근무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잔업과 철야, 특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면 대기업 노동자라고 해도 이들이 받는 건 월급이 아니라 시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규 노동시간만으로는 돈벌이가 안 되는 것이다. 더 많이 벌려고 잔업과 특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생활이 되려면 잔업과 철야, 특근에 목을 매야 한다.

    잔업, 특근, 철야 수당이 월급의 40%

    “잔업, 특근, 철야로 받는 돈이 전체 월급의 40%가 된다. 시간대에 따라서 150%, 200%, 350%를 쳐 준다. 시급이라 생각 않고 월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시급제로 받는 월급이다. 이 시급제를 월급제로 바꾸지 않으면 잔업과 철야, 특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배형봉 부위원장한테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한 달 일하고 받는 돈의 40%가 잔업과 특근, 철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공장 밖 사람들은 알까. 대기업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투쟁할라치면 ‘고임금’을 들먹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사실은 외면한 채.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 몸이 따라갈 수 없어도 기나긴 밤 노동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차라리 돈이 줄어도 시간을 벌겠다고 마음먹어도 그게 개인이 원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 않는다는 것은 모른 채.

       
      ▲사진=진보정치
     

    잔업과 철야, 특근이 일상적인 구조에서는 노동자 개인이 하고 안 하고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80년대 불렀던 노래 중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이 어떤 식으로든 지금까지 이어지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몸은 노동자, 머리는 자본가 사상?

    “노조에서는 2009년부터 주야간 맞교대를 주간연속 2교대로, 시급제를 월급제로 시행할 것을 단협으로 체결했다. 2008년 10월부터는 전주공장이 그 시범 공장으로 먼저 시행한다.”

    노동자가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권리를 찾고 좀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내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하청업체 노동자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받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다른 이가 당하는 차별을 못 본 채 외면하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오랜 기간 노동자가, 노동조합이, 노동운동이 싸워온 것은 민주와 평등, 인간을 위한 것이지 않았던가. 무수한 차별과 맞서 싸워온 것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배형봉 부위원장은 “노조가 통합되면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조건을 하락시킬 거라고 오해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노조에서 조합원들에게 교육한다. 사측에서 비정규직 라인을 들이려고 하는 것을 막고, 평균 결원 인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하는 등 계속 싸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현장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을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일, 그래도 ‘나’는 살아서 다행이라고 한 숨 쉬기도 전에 어쩌면 ‘나’는 자본과 자본가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닌지 두려워해야 한다. ‘몸’은 노동자이면서 ‘머리’는 자본이 퍼부어대는 사상에 물드는 일, 경계해야 한다.

    이동 시간이 끝나고 생산 시간으로

    자본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자들을 나누고 떼어놓으려 할 것이다.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로, 세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로, 어쩌면 갈기갈기 나눠 고립된 한 사람 한 사람으로까지 나누려 할지 모른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생산하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이 자기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자본가가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 옆에 공구를 들고 일하는 동료가 차별받을 때 그 차별은 곧 내가 당하는 차별이 될 것이다.

    7시 56분. 출근하는 사람들도 퇴근하는 사람들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건널목을 정리하던 경비 노동자도 사라졌다. 순식간이다. 그렇게 바쁘게 많이 오가던 노동자들이 어디론가 싹 사라졌다. 8시 정각. 공장 앞은 딴 세상처럼 조용해졌다. 잠깐 고개 돌린 사이에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이 상황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이제 이동하는 시간이 끝나고 생산하는 시간이다. 해가 기울어 저 공 장문으로 다시 나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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