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 미친 자와 성한 자의 경계선
        2007년 11월 18일 01: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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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는 문제작이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하면, 제목에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오가닉 푸드’ 등등의 단어가 풍기는 기름기와 이 소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럭셔리’나 ‘강남필’도 마찬가지다.

    또 그것과는 달리 한 차원 높여 이 소설을 환경이나 생태주의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런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이번 소설집의 메인 테마라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 던지는 소설

       
     
     

    한강이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으로 의도하는 것은 지금 모두에게 통용되고 이해되는 삶-욕망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한국문학에서 요사이 찾아보기 힘들었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인 셈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졌고 그 세 편을 통틀어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여자 두 명은 자매이고 남자 두 명은 각각 그 자매의 남편들이다.

    소설 속에서 남자들은 떠나고 여자들은 남는다. 아니다. 여자들은 미쳐가고 남자들은 도망간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매들끼리도 역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남자들 곧 동서들끼리는 거의 의사소통하지 않는다.

    동생은 혼자 앞서가고 언니는 그 동생에 때로는 살의마저 느끼기도 한다. 손윗동서와 손아래동서의 삶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삶이다. 곧 일가(一家)의 삶이 있고, 그 안의 각자의 삶은 다 따로따로인 셈이다. 각자의 삶에 구원군은 없다.

    나무가 되고 싶은 여자

    좀 더 소설의 속내로 내려가 보자.
    영혜는 어느 날 문득 채식주의자로 돌변한다. 그 까닭은 삶의 질 따위의 새로운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꿈 때문이다. 그녀의 꿈속은 핏빛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는 식의 핏빛이다. 어릴 적 자식들에게, 유독 자신에게 모질었던 아버지의 매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녀의 채식을 옹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채식을 넘어 아예 나무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두고 집안 식구들은 정신병자로 몰고 간다. 영혜의 남편은 재빠르게 그녀와 이혼한다.(「채식주의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나는 아내로부터 처제에게 몽고반점이 남아 다는 말을 듣는다. 예술적 영감이 고갈된 상태였던 나는 그 말로부터 처제를 욕망하고 죽어버린 예술혼을 욕망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진다는 몽고반점. 그러나 시간과 상식을 거스른 그 어떤 흔적. 곧 몽고반점에서 발원하는 꽃피는 욕망의 나무를 그는 보고자 한다.

    처제의 육체를 모델로 삼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비디오를 찍고 급기야는 자신의 몸에도 나무를 그려넣음으로써 그녀와의 합일도 이룬다. 금기의 욕망인 동시에 예술적인 욕망이기도 한 그 두 욕망이 한꺼번에 다 충족되는 순간 가족이라는 틀은 붕괴되고야 만다.(「몽고반점」)

    삶은 지극히 위험한 짐승

    이제 나에게 가족은 없다. 남편은 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고 잠적을 했고, 부모와 동생들은 영혜는 물론 자신까지도 외면한다. 비극으로부터 아예 시선을 돌려버리는 셈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듯 영혜를 챙긴다. 그러나 그 돌봄이 영혜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

    아니 그녀를 이해하려면 할수록 자신의 삶마저 곤궁해지고야 만다. 그러나 그녀가 대면해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녀 역시 위태로워진다.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삶은 지금 지극히 위험한 짐승이다.(「나무 불꽃」)

    소설의 또 다른 속내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미치지 않은 자와 미친 자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든다. 미치지 않은 자들은 미친 자로부터 재빠르게 달아난다. 소설은 달아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미친 자라기보다 미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이다.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미친 자인 영혜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언니와 형부가 경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다. 누가 그녀의 뒤를 쫓을 것인가? 예술과 금기의 욕망을 충족시킨 형부인가 아니면 동생을 돌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언니일까?

    형부는 실패했다. 그는 어쨌든 현실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인물은 언니뿐이다. 언니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p.200)

    그녀는 과연 영혜처럼 새로운 그러나 오랫동안 잠복됐던 욕망의 불꽃을 태울 것인가? 아니면 이미 달아나버린 사람들처럼, 한번은 성공했던 남편처럼 현실로 귀환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이제 소설의 마지막 속내는 책을 읽고 느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다. 그녀를 미치게 만들거나 미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결국 우리들의 욕망으로 남겨진 것이다. 당신의 삶으로 패를 던져라!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이미지 하나. 섬뜩하고 아름답다.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p.180)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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