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뭔가 있다
        2007년 11월 17일 1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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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떠나기 직전인 1992년도 봄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는 민중당의 선거운동을 도운 적 있다. 나는 한 동을 책임지고 있었다. 나의 팀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던 한 친구는 그 당시에 이미 선거판의 매력에 혹했던지, 물론 당선되진 않았지만, 국회의원후보로 두 번이나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눈에서 가시지 않는 게 있다면 후보들의 합동연설회에서 민중당 후보의 선전용 팜플렛을 흔들면서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던 다른 한 친구의 모습이다. 그 당시에 나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에서 민중당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정치인, 선거꾼 그리고 마약중독자

    그 순간만큼은 그가 가장 행복하게 보였다. 한참 동안 두고 보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죄를 저지른 양 겸연쩍어 하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상처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다. 물론 아름다운 추억거리다. 그 때 깨달은 게 있었다. 선거판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정치를 위해 조직된 집단이라기보다는 오직 선거만을 위해 조직된 선거조직이다. 당연히 정치나 선거나 별 차이가 없어져 버린 게 오늘날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그러니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을 보통 “정치가”라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선거꾼”이란 명칭과도 호환된다.

    ‘정치(선거)는 마약과 같다’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정치(선거)가 마약과 같다면 ‘정치인(입후보자)은 마약중독자와 같다’는 비례등식도 성립된다. 지금 정치권(선거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대학시절 총학생회 선거 때부터 이미 선거판(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었다.

    한 번 선거판에 맛을 들이면 이 판을 떠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당연히 이들은 선거판에서만큼은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숙련된 기술을 쌓았다고 공인된 셈이다. 정치권에서 이들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들의 선거판 경력 때문이다.

    선거판에서의 능력은 후보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대중의 심리를 조작하는 능력이다. 속되게 말하면 후보에 대한 과장된 선전과 광고를 통해 대중들을 속이는 능력이다. 합법적 노조도 선거판 경력이 쌓여가기 때문에 앞으로는 노조출신의 선거전문가들도 양산될 것이 분명이다.

       
      ▲사진=뉴시스
     

    후보 이미지 변형 통한 대중심리 조작

    선거철만 돌아오면 소위 ‘선거백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백수로 지내다가 선거 때만 되면 제철을 만난 듯 바삐 움직이면서 작업을 개시한다. 별 뚜렷한 직업없이 평생을 이리저리 정당을 옮겨 다니면서 선거백수로 살아온 사람의 숫자도 적지 않다.

    보통 이들은 모정당의 간부라는 직함을 즐겨 사용하며 직업은 항상 정당인이다. 이보다 한 단수 높은 선거백수들은 소위 ‘정치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은 노쇠하여 추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정치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신문에 언제나 오르내리는 이들의 이름은 30년 전이나 40년 전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다. 이들은 스스로 원로라 자처하기까지 하면서 정치판에서 떠나기를 거부한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음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자신의 모습이 TV에 나올 때마다 사회적으로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천상의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론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선거가 왜 사람들을 중독자로 만드는지 살펴보자. 선거운동 기간이 되면 후보가 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스타로 떠오른다. 원래 스타가 아닌 사람이 스타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온 거리가 후보의 얼굴로 도배되고 어디를 가나 후보의 이름이 거론된다. 선거운동원들은 떼를 지어 몰려 다니면서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고 후보의 사진이 찍힌 홍보물을 돌린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후보를 알아보고 위선적인 인사를 건넨다. 그전에는 누구 하나 후보를 알아보거나 인사를 건넨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변해 줘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 세상이 변한 것이다. 자신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세상이 갑자기 자신을 위해 변해준 것이다. 세상이 하루 이틀만 변해주면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데 몇 주동안 계속되니 세상이 정말로 변한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자연히 후보는 세상이 자신만을 위해 돌아가는 걸로 착각하게 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 따로 없다. 엑스타시를 복용하지 않고도, 히로뽕이나 코카인을 피속에 주사하지 않고도, 이런 황홀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조금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당연히 이런 맛을 한 번 보게 되면 그 때부터는 영원히 이 굴레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이미 중독이 돼버린 것이다. 이 맛을 즐기면서 당선되는 경우에는, 더 큰 황홀한 맛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

    떨어져도 결코 후회는 없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그 맛을 한 번 봤기 때문에 결코 비싸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떨어졌다고 물러나면 사나이가 아니다. 이 맛을 다시 한 번 더 보기 위해 나중에는 주위 친지들의 재산까지도 끌어들이게 된다.

    지난 번에 이미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탕진해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친지들의 재산까지도 탕진하는 셈이다. 물론 당선되는 경우에는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 이 맛을,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아니 영원히 죽을 때까지 보기를 갈망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거금이 필요한데 아주 비밀스럽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야 한다. 박스떼기나 차떼기가 터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배를 산해진미로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선거판의 그 황홀한 맛을 지속하기 위해서다.

    마약 구입 대금 같은 검은 정치자금

    계속적으로 터지는 대형 부정사건은 바로 이 맛에 중독된 정치인들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맛들인 정치인들도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인데 하물며 대통령 선거에 맛들인 후보들이야 이보다 몇 백배, 몇 천배나 더 큰 착각과 황홀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 맛은 아편보다 강하고 코카인보다 환상적인 천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맛이다.

    정계를 떠났던 이회창 전 총재가 대권삼수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 대권삼수는 이회창 후보만이 아니라 꽤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안타깝게도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도 이에 포함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인제 후보도 몇 번이나 나선 바 있지만 물러설 줄 모른다.

    지난 세기 한국현대정치사의 거의 반을 차지했던 3김씨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참으로 선거판의 진미를 봤던 대중선동가들이다. 이들은 여러 번 정치판을 떠난다고 공언했지만 한 번도 정치판을 떠난 적 없다.

    왜 떠날 수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이 짙어가는 지금까지도 그 때 그 맛을 못 잊어 한 번씩 훈수를 두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가 왜 대선에 돌아왔는지는 너무 어렵게 분석할 필요도 없다.

    대선판의 그 맛이 얼마나 강했으면 그렇게 강한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돌아왔겠는가. ‘대쪽판사’가 자신과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을 깰 정도라면 그 황홀한 맛의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 같은 선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몇 번이나 정계를 떠난다고 했다가 번복했고 완전히 정계를 떠난 듯 했다가도 다시 돌아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선거판의 쾌락을 가장 많이 즐긴 사람을 들라면 당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이회창 전 총재가 정계은퇴를 번복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례가 큰 힘이 됐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원초적 욕망 앞에 맥을 못추는 계급의식 

    사실 이들 정치가들의 눈에 비치는 국민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떠났다고 발표해놓고도 다시 돌아오면 언제나 따뜻하게 반겨준다. 정계에서 은퇴했다고 집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게 지내야 하는데 말이다.

    선거판에서의 그 맛은 정치인들이 100% 완전히 독점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조금 나눠주게 마련이다. 90%를 정치가들이 맛본다면 10%는 선거운동원들의 몫으로 떨어진다. 선거운동원들도 이 맛을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대부분은 선거판을 떠나지 못한다.

    선거판에서는 이성이 마비되고 오직 원초적인 쾌락만이 지배한다. 평소에는 노동계급과 민중들의 이익이 어떻고 지역주의가 어떻다느니 비판하다가도 선거철만 돌아오면 기가 푹 꺾이고 만다. 차가운 이성과 논리는 뜨겁고 폭발적인 원초적인 욕망 앞에서는 아예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원초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똑같은 행위를 수십 년 동안 반복해왔다. 선거판에서는 후보들의 고의적인 지방사투리까지도 대중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주는 마약의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후보들이 제공하는 현금봉투나 관광버스, 삼겹살은 대중들을 이성을 더욱 마비시킨다.

    결국에는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서 물불가리지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까지도 그것도 노조위원장들까지도 반노동자적인 정당에 투표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누가 누구를 먼저 타락시켰는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공방으로 다시 저질스러워진다.

    이것이 오늘 날 대선을 치르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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