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겁하고 눈치보고 반당적인 당 지도부
        2007년 11월 17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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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5일 민주노동당 김선동 사무총장이 한국노총을 방문하여 사과공문을 전달했다. ‘한국노총 사과 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당 내외의 거센 논란을 빚은 끝에 11월 8일 최고위원회의 사과 철회 결정으로 일단락되었다.

    물론 사건이 깨끗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사과 공문은 철회했으나, 이번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책연대’에 대해 명확한 거부 입장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깔끔하지 못한 여운을 남겼다. 사과 철회에 대해 한국노총 정치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이쯤에서 이번 사건을 중간평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의 정체성을 유린하는 행위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총은 태생부터가 자주적 노동운동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권력과 자본에 빌붙어 자주적 노동운동을 말살하는데 앞장섰던 반노동자 집단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집단이라도 과오를 반성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노총의 반노동자 성격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만 꼽아보자.

    한국노총은 이른바 노사정 타협을 통해 복수노조 유예에 야합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금도 자기 의사를 대변할 조직결성의 자유를 제약받고 있다. 동일한 사업장 내에서 이중으로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이 특히 극심하다.

    한국노총이 앞장서서 동의한 비정규직 악법에 의해 불안정노동 양산과 대량실업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랜드와 코스콤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이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그들은 또한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에 의해 노동자의 기본권 제약을 합의해줬으며, 비정규직의 처절한 투쟁이 격화하는 시점에 정부를 대리하여 외자유치 활동에 나섬으로써 투쟁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신자유주의 공세에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또한 최근 정해진 열사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까지 던지며 처절히 투쟁하는 현장의 이면에는 어용 한국노총의 배신과 탄압이 존재했다.

    한국노총은 이처럼 권력과 자본에 야합하여 노동계급 배신으로 일관했으며, 그들의 반노동자 입장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집단을 비판한데 대해 사과함으로써 문성현 대표는 한국노총의 반노동자 행위에 면죄부를 쥐어줬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열사에 대한 배신이며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에 기초하여 건설된 당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유린하는 행위다.

    명분도 실리도 잃는 아둔함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정책연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한국노총의 행보는 저들의 오랜 기득권을 지켜줄 권력의 이동방향을 찾는데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이미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각 지역에서 당선 가능성 높은 한나라당 후보에게 줄을 섰듯이, 중앙권력 재편기를 맞아 권력의 이동방향을 추종하는 것이 지금 사태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집권 가능성이 가장 큰 한나라당이 유력한 연대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노동자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이 반노동자 집단 한국노총과 연대하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실리도 없이 허상을 쫓다가 계급대중의 신뢰만 상실하는 아둔한 정치공학인 것이다.

    문성현 대표의 비겁한 태도

    이번 사건의 책임자인 문성현 대표는 당 내외의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11월 2일에 사과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사과문에서 “한국노총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던 자신의 과도했던 발언 부분만을 사과하도록 했고, 정책연대와는 추호도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하도록 지시”했다고 해명했다. 문 대표의 해명은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사실관계 왜곡이다.

    한국노총은 10월 8일 민주노동당에 공문을 보내 “민주노동당이 한국노총에 대해 행한 과거의 언행에 대하여 공개사과와 향후 재발방지에 대한 명확한 약속을 할 경우 2007년 대선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포함한다”는 결정을 통보했으며 “귀 당 책임자가 노총을 방문하여 사과문을 전달하고, 언론을 통해 공개사과 및 재발 방지를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공문에는 답변 시한이 10월 16일로 못박혀있다. 문성현 대표는 답변시한을 하루 앞둔 10월 15일에 사과공문을 보냈다. 이 공문에는 “한국노총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할 것”이며 “굳건한 연대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는 표현이 들어있다. 이것이 한국노총의 오만방자한 요구에 대한 답변이며 굴복임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것이다.

    10월 29일 한국노총 중앙정치위원회는 “민주노동당이 한국노총에 행한 과거 언행에 대해 공개사과와 향후 재발방지에 대해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 명의의 공문을 보내옴에 따라 정책연대 대상 후보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공문으로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실천을 촉구하기로” 했다.

    한국노총은 민주노동당이 보낸 공문을 정책연대를 구걸하는 서약서로 해석했으며 이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정책연대와 관련 없다는 문성현 대표의 해명은 명백한 거짓인 것이다. 더구나 “정책연대와는 추호도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하도록 지시”했음에도 실무자가 실수로 작성했다는 변명은 정치지도자로서 비겁하고 염치없는 태도다.

    반당행위를 소신으로 간직한 김선동 사무총장

    사과공문을 들고 한국노총을 방문한 김선동 사무총장은 당대표의 반당행위에 한술을 보탬으로써 파문을 증폭했다.

    그간 민주노동당 소속의 지방의원들은 한국노총에 대한 부당한 예산지원을 감시하고 견제해왔다. 진보정당의 지방의원으로서 당연한 임무인 것이다. 그에 대해 김선동 사무총장은 한국노총 지역본부와 상의해서 진행한다는 내부지침을 공유했노라고 발언했다.

    이는 당내에서 논의된 바 없는 일로서 발언 자체가 거짓말이며 월권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원의 자율적 의정활동을 봉쇄하는 일이며, 권력에 빌붙어 누려온 한국노총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그에 대해 김선동 사무총장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단지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소신임을 분명히 했다. “당 내부 지침으로 공유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거냐”라고 용감하게 항변했고 “의지를 사과하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당에서 의견을 물어 이 내용을 관철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진보적 의정활동을 봉쇄하고, 한국노총의 관변단체로서의 기득권을 옹호하겠다는 소신을 숨김없이 내뱉고 있는 것이다. 반노동자 반당행위를 소신이라고 공언하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떤 평가가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그가 비정상임을 말하기보다는, 그런 사람이 사무총장으로 버젓이 앉아있는 이 당이 정상인가를 생각해볼 일이다.

    최고위원 다수의 사보타지

    최고위원회는 이 사건과 관련해 4차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최고위원들은 사과공문 철회를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고 시작했다. 사태해결의 핵심적 고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논의에서 제대로 된 결론이 도출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고위원 다수는 정책연대 거부 결단에 끝내 반대했으며 책임회피와 함께 노골적인 사보타지를 감행했다. 3차 회의까지도 결론이 유보된 상황에서, 11월 6일에는 최후통첩을 담은 ‘전진’의 2차성명이 나왔다. 마침내 네 번째 회의가 소집된 11월 8일에는 전진, 해방연대, 전해투, 당노조(공공노조 민주노동당지부) 등이 중앙당사 앞에서 합동으로 항의시위를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집회 대오에는 전직 최고위원도 포함돼 있었다. 출근하던 문성현 대표는 자기 당원들의 집회대오를 우회하여 당사에 들어가야 했다. 결국 그날 4차 회의에서야 비로소 ‘사과 철회, 정책연대 유보’라는 어중간한 결론이 내려졌다.

    비정규직 투쟁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 대선투쟁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등의 문제로 4차에 걸쳐 최고위원회가 소집되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성실함에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의 정체성에 비추어 지극히 명백한 사안에 대해 지리멸렬한 논의를 거듭했다. 공개된 속기록을 읽어보면 최고위원 다수의 무능과 무책임에 놀랄 것이다. 최고위원 다수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최고위원회 논의 과정에 있어서 소수파의 소극적인 대응방향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문제해결의 핵심 고리인 사과공문 철회를 불가능한 것으로 예단하고 정책연대 거부에 초점을 맞추는 소심함을 보였다. 그러나 사태가 일단락된 것은 정반대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당내투쟁의 성과는 명쾌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반당행위를 방조한 권영길 후보

    당 내외를 뒤흔든 이 사건의 전 과정에 걸쳐서 권영길 후보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사건 발단의 당사자는 비록 문성현 대표지만 이 사건은 권영길 후보와 무관할 수 없다. 위에서 사실관계에 의해 입증한 바와 같이, 사과 요구와 사과 공문 모두가 정책연대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이 당면한 대선에서의 정책연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당의 대선후보는 이 사건의 주요한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선 국면에서 후보는 실질적인 당의 구심점이며 대선 결과에 따른 일차적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대선 후보가 끝내 침묵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권영길 후보가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지 이러저러한 전언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일들을 이 글의 논거로 삼지는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결론만은 분명하게 도출할 수 있다. 사안의 주요 당사자이며 내용적 책임자인 권영길 후보의 침묵은 무책임을 넘어서 반당행위에 대한 묵시적 방조가 된다. 범죄에 대한 방조는 그 자체로 범죄가 될 수 있는데, 정치적 무한책임을 가진 대선 후보에게 있어서 그 책임은 더욱 명백하다고 볼 것이다. 그렇지 않음을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권영길 후보 자신에게 있다.

    각 정파의 반응 – 당파성의 리트머스

    이 사건을 경과하면서 당 지도부의 행태 외에 각 정파의 반응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당의 계급적 정체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견해는 당파성의 문제가 된다.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입장을 낸 곳은 전진, 해방연대, 다함께 등이다. 그중 공동대응에 참여하고 직접행동을 조직한 곳은 전진과 해방연대 뿐이다. 나머지 조직들이 왜 침묵했는지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대표가 반노동자 집단 한국노총에 굴복하고 정책연대를 구걸한 이 사건이, 공동대응과 직접행동을 조직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 당내에서 몇몇 개인들은 공공연하게 분당을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특정한 이념을 가진 새로운 정파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나는 지금이 분당을 결단할 시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 정파를 만든다는 분들이 주장하는 그 이념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 새로운 정당이나 새로운 정파질서를 고민해야할 시점이 도래한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각 정파의 대응방식은, 어디까지가 함께할 수 있는 세력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기준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각자의 견해는 당파성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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