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만세, 빼빼로데이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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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14일 03: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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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에서 11월 11일 민중대회를 떠들길래 마땅치 않았었다. 이런 막연한 대회한다고 뭐가 뒤집힐 리 없지 않은가. 지금은 왜 한국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논리를 세울 때지, 되지도 않을 세 과시에 역량을 쏟을 때가 아니다. 세 과시해봐야 어차피 나오는 사람은 맨날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나마도 점점 줄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건 그거고 일단 사단이 나긴 났으니까 나도 ‘구경’삼아, 그리고 ‘응원’하러 서울 시청 앞에 가봤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이 충돌 현장에 가면서 자신은 ‘투쟁’하러 간 것이 아니라 ‘응원’하러 간 거였다고 했던 생각이 난다.

전철역에서 나오니 날 반기는 건 닭장차(전경버스)로 쌓은 담벼락이다. 또다시 원천봉쇄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군사독재 이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단어, 원천봉쇄. 80년대 음악풍인 원더걸스의 텔미가 유행하고, 복고 댄스가 유행하는 세상인데 ‘복고 탄압’이 등장하는 게 무어 그리 대수랴. 마침 대선후보도 ‘복고 후보’가 나오고 있다.

작년에도 원천봉쇄가 등장했었는데 이번 원천봉쇄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한다. 주최측에 의하면 군사정권 이래로 전국 노동자 대회가 원천봉쇄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나? 오예~ 역시나 노무현 정권, 화끈한 노무현 정권. 한미FTA 때는 기자회견도 불허했던 노무현 정권인데 뭘.

오랜만의 정겨운 단어, 원천봉쇄

양심수 부문에서 이미 김영삼 정권 이래 최대치를 돌파한 노무현 정권께서는 군사정권 이래 초유의 전교조 대량징계 기록도 보유하고 계시다. 맞아죽고 분신해죽는 노동자들은 이제 이 아름다운 민주화 세상의 기본 풍경이 됐고.

절차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만은 지키겠다던 참여정부가 점차 ‘빤스 바람 난닝구 바람’으로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우경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원칙마저 내던지고 있다.

투자자(주주)와 소비자에겐 자유를 주겠지만, 그래서 주가를 올리고 소비자 선택권을 자율화하겠지만 시민과 노동자에겐 자유 따윈 필요 없단다. 투자자와 소비자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돈을 가진 존재라는 것. 자기가 가진 돈 만큼 자유를 누리는 존재라는 것.

그러나 시민의 기본권은 돈과 상관없이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돈만큼 자유를 누리게 하는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모두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기본권과 충돌하자 주저 없이 후자가 내버려졌다. 원천봉쇄. 우리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 이거 왜 이러십니까들.

여피정권. 기만정권. 사기정권. 주주와 소비자만 참여하는 정권. 시민과 노동자의 참여는 필요 없는 정권. 대통령이 펀드에 돈 집어넣어 돈 벌었다고 자랑하는 정권. 대통령이 자기 자식은 미국에 MBA 유학을 보내 금융서비스업 개방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는 정권.

펀드에 집어넣을 돈은커녕 먹고 죽을 돈도 없다고? 자식을 투자금융사나 로펌에 들여보낼 능력이 없다고? 그럼 ‘닥치고 가만히 계세요. 세금으로 복지예산 편성해 굶지는 않게 해드릴게.’

교통이 통제되어 시청 앞 길이 시원하게 뚫렸다. 자동차가 안 다니니 마음만은 통쾌하다. 하지만 수많은 닭장차들이 내뿜는 매연으로 머리는 어지럽다. 이젠 최루탄이 아니라 매연으로 죽이는구나. 닭장차들은 혹시 보다 매연이 잘 나도록 개조된 것들일까?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뻥 뚫린 길을 걷고 있자니 옛날 연희동에서 있었던 전두환 체포 대회 생각이 났다. 그때 전경들과 충돌하기 전, 즉 아직 아수라장이 펼쳐지기 전에 뻥 뚫린 길에서 물정 모르는 동네 학생들이 “여의도 갈 필요 없어, 여기서 타”하면서 자전거를 탔었다. 곧 전경들이 행동을 개시하면서 대폭주가 시작됐는데 그 아이들의 생사는 어떻게 됐는지….

사방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가 뚫렸다” 하면서 몰려가는 사람들. “저기로 가지 않으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고립됩니다”라고 외치는 사람. 전경은 곳곳에서 소대 단위의 함성을 지르고 있고.

와중에 빨간색 꽃다발과 빨간색 선물 바구니를 든 10대 후반의 ‘빼빼로데이’ 커플이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우리 민주주의는 딱 여기까지구나. 옛날 같으면 전경과 대치할 때 나 같은 사람은 무서워서 안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을 텐데. 이젠 슬슬 걸어가면서 구경할 수도 있고, 빼빼로데이 커플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로질러 갈 수도 있고, 하지만 원천봉쇄도 현실이고. 딱 여기까지구나.

지랄탄과 백골단의 공포 없이 시위를 할 권리가 15년 민주화정권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대신에 우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노동자의 실질소득이 상승했던 나라에서 전두환 시절보다 더 심한 양극화로의 추락이라는 독배를 마셨다.

사람들은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자산투기에 미쳐 돌아가고 자산이 없는 이들은 하늘만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다. “우리도 사람이야, 사람은 직선제 투표권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여기에 대한 대답은 ‘원천봉쇄’. 2007년이다. 민주화다. 참여정부다. 참여가 원천봉쇄된 민주화다.

대통령께서 결단하시고 지시하시면 모두 따라야 한다. 갑자기 한미FTA를 왜 해야 하지? 대통령께서 결단하기 전에 한미FTA가 한국사회의 의제였나? 아니 이 사람아 그런 걸 왜 따지나. 대통령 결단 사항일세. 민주화 만세, 여유로운 빼빼로데이 만세다. 이제 빨간 색은 빼빼로데이 선물포장지로만 남았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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