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 탁아소 생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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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14일 0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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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 탁아소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 2학년 선배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물가물한 내 기억에 의지하건데 그 날은 아마 ‘여성’에 관한 세미나를 하던 날이었을 거다. ‘페미니스트를 자청하는 선배의 얘기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몇몇 동기들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잘생긴 그 형(오빠)를 바라 봤다.

    그럼 비정규 악법은 혁명적 법안이게?

    “직장에 탁아소를 세우는 건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해서 여성들이 혁명으로 나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개량공작이다.”

    어이없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다. 대학새내기인 내가 보기에 그 발언은 어떻게 보면 맞는 얘기 같고, 어떻게 보면 틀린 발언이었다. ‘혁명이 중요한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탁아소가 필요없다는 것은 좀 억지스러운 것 같고, 그렇다고 탁아소를 지어주자니 확실히 여성노동자들의 자본가에 대한 분노가 좀 사그러 들것도 같고…’

    지금이야 ‘대학교 2학년짜리가 할 만한 귀여운 발언이구나’ 하고 허허 웃으며 회고하지만, 그 땐 한동안 나의 화두였다. 사람이 빠진 것. ‘혁명’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 형의 발언에는 사람이 빠져있었다. 그 논리대로라면 비정규직 양산하는 비정규직 법안은 ‘노동자로 하여금 계급적 각성을 하게하는’ 혁명적인 법이게?

    게다가 사람에 대한 믿음 역시도 빠져있었다. 자기만 명문대생이라는 간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휩쓸리는 일 없이 민중과 함께하는 지식인이고, 노동자들은 배부르고 등 따시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바보란 말인가?

    이 무렵에 만난 사람들이 바로 모 단체였다. 하나같이 행색이 초라하고 하는 행동은 세련이랑은 거리가 먼데다 사람들이 ‘주사파’라고 수군거리기까지했지만, 난 자기가 좌파연 한다면 저 정도는 해야된다고 생각했다.

    모 단체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아침 8시에 나와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팜플렛을 돌리고, 10명짜리든 20명짜리든 투쟁의 현장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가고, 집회 나가자고 되든 안 되든 끊임없이 조직하고.

    비록, 끝없이 이어지는 OO투쟁, 무한 반복을 걸어놓은 듯한 투쟁발언 결의발언, 사전집회 정리집회, 4분의 4박자짜리 노래에 싫증 잘 내는 성격이 또 다시 도져버린지라 모 단체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여튼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고민하는 새내기에게 모 단체 선배들의 얘기는 확실히 힘이 있었다.

    모 단체 선배들 얘기나 탁아소 필요없다는 얘기나 둘 다 처음 듣기엔 미심쩍긴 마찬가지였으나, 모 단체 선배들 얘기는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보자’로 귀결됐고, 탁아소 얘기는 ‘뭐가 틀렸는지 증명해보자’로 귀결됐다. 집회 한 번 나오는 일 없이 담배연기 가득한 동아리방에 앉아 기타를 치며 주먹 쥐고 혁명을 노래하는 사람의 말에 힘이 실릴 리가 없었다.

    저번주 말 ‘신민영 담당’인 김은성 기자에게 원고 압력을 받고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다. 글 쓰기 좋은 소재가 둘이나 있지 않았는가? 삼성사태와 100만 민중대회 불허문제.

    글이 안 써진 진짜 이유

    (1) 민주공화국이란 허상을 뒤흔든 삼성사태 – 절대절대절대절대절대 단순한 부패문제가 아니다. 한보가 떡값을 돌리고, 신동아가 옷로비를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재계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삼성이 정부조직까지 이미 통째로 쥐고 흔들고 있었다는게 밝혀 진거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뽑아봤자 허수아비다. 공무원,정치인 등등이 이미 충성을 공화정이 아닌 삼성왕정에 바치고 있는 상황이다.

    (2) 집회 불허 – 공화국이 삼성왕가에 의해 농단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렇게도 무력하던 그들이 ‘대선을 앞두고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는 것은 사회 안정을 저해 한다’고 했다.

    껍데기만 남은 대선을 명목으로,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있어 집회나 선거나 모두 수단에 불과 할진데 언제부터 선거가 손 댈 수 없는 절대가치가 되었단 말인가? 는 요지로 분노를 토하는 글을 한 편 써볼까 했었다. 그런데, 거창한 소재와 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찾는데만도 3일이 걸렸다.(그 와중에 담당기자인 김은성 기자만 속이 타들어갔다. 일요일 저녁때까지 주기로 한 글을 수요일이 넘도록 쥐고 있었으니 그저 미안할 뿐이다.) 글이 나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 가슴과 발로 써야할 글을 머리와 손끝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마음 없는 ‘재기발랄’은 말장난

    100만 민중대회를 막기 위해 서울시내 전역을 전경버스가 막고 있을 그 무렵, 나는 출근을 위해 차안에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시내 곳곳은 차로 쩔어 있었다.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해서 차 안에서 심드렁하게 있었다. 길이 막힌다고 ‘민주노총’ 같은 데에 저주를 퍼붓는 쪽도 아니었고, 쏟아지는 폭압을 뚫고서 달려 나가는 처지도 아니었다.

    어디에도 발디딘 곳이 없이 붕뜬 상태로 교과서에서 배운 국민주권, 민주공화국으로 글을 쓰려니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글이 나아가지 않았다. 고민 고민하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영화 스타워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요걸 갖고 써볼까 했지만 역시나 글이 나아가질 않았다.

    공화국을 지키는 것이 임무인 검사 – 제다이. 이 제다이가 황제의 꼬임에 넘어가 황제의 앞잡이 다스베이더가 되는 것이 바로 스타워즈의 메인 플롯아니던가? 하하~요걸 바탕으로 해학과 촌철살인이 넘실대는 글을 써볼까 생각 했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기도 따뜻한 마음이 있을 때만 빛나는 거지, 따뜻한 마음이 없이는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집회에라도 꾸준히 나가야 하는게 아닐까 고민을 해보지만, 선뜻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슷한 내용의 투쟁발언, 4분의 4박자 짜리 투쟁가 ‘등쌀’에 나가봤자 한 30분을 못 버티고 광장시장에 들어가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기울이고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집회라는게 재미로 하는게 아니다. 누군가는 당장의 생존을 걸고 사수를 하는 것이다.’ ‘니놈이 맛이 가서 그러는 거다.’ ‘민영이 형은 자유주의자가 되었어요’ 라는 얘기가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근데, 이렇게 얘기하면 나나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나 무슨 발전이 있냔 말이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 * *

    *필자의 ‘서태지’ 2편은 다음에 게재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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