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말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2007년 11월 09일 0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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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 TV토론이었다. 8일 MBC <100분 토론>에 나온 권영길 후보는 앞 절반은 안쓰럽게 헤맸고, 뒷 절반은 무난하게 잘 방어했다.

    저상버스 도입이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같이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한 일을 잘 설명한 대목을 제외하면 100분 토론의 전반부는 아주 좋지 않았다.

    "어떻게 지지율을 올릴 것인가,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홍윤기 교수의 질문에 권영길 후보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사실 왜 지지율이 낮은가 같은 질문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당한 질문도 아니고,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묘책이든 뭐든 그럼직한 이야기를 하는 게 후보의 의무인데,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 호남 만인보를 들먹인 권 후보의 답변은 어거지처럼 느껴졌다.

    노동조합 비리 문제에 관련하여 “같이 돌 맞겠다. 머리띠 맨 사람들을 끌어안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발언은 노동조합 뿐 아니라 비판의식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소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조 나쁜 놈들’이라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노조 개혁이나 비리 척결을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하겠다는 구체적 구상을 밝혔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친북파 문제 동문서답

    친북파 문제는 말 그대로 동문서답이었다. 패널이 ‘북한 체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몇 차례나 지적했음에도 통일을 되뇌인 권 후보의 답변은 시청자를 짜증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뒤늦게 NL, PD를 설명했지만, 흡족스런 대답은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권 후보의 당황스러움이 엿보였고, 어떤 방향의 대답이든 후보 스스로의 확신이 먼저 있어야 할 듯하다.

    민주노동당 정책에 대한 권 후보의 설명은 들쭉날쭉했다. “세금은 누가 냈나?”라고 권영준 교수에게 역공을 가한 세금 문제, 복지에 관련된 내수 진작론, 한미동맹 문제, 한미FTA 문제는 잘 설명했고, 고용 문제나 성장 문제는 잘 설명하지 못했다.

       
     
     

    잘 설명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권 후보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의 차이다. 세금과 복지 문제는 이전 선거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고, 한미동맹과 한미FTA는 본인이 국회에서 다뤘던 문제다. 반면 고용론이나 성장론은 이전 선거 공약과도 다르고, 권 후보가 평소 알고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몇 백만이다, 몇 조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거듭했는데, 그 정책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권 후보가 새 정책을 이해하는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주지 않으면 <100분 토론>에서처럼 본인도 알지 못해, 외운 숫자만 읊는 상황이 계속 재연될 수밖에 없다.

    정책에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동아시아 포괄적 경제협정’에 대한 질문에 권 후보는 무난히 모면했다. 앞으로도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한 나라와도 어려운데 여러 나라와 어떻게 맺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될테니, 그 정책의 설득 논리를 더 정교화해야 할 것 같다.

    주어 술어를 빼먹는 말투, 언제, 누가를 상습적으로 틀리게 말하는 권 후보의 말버릇을 이제 와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이런 권 후보의 말버릇이 유권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8일 토론에서 권 후보의 말버릇은 악습처럼 느껴졌는데, 예전처럼 푸근하고 천천히 말하지 않고, 흥분해서 빨리 말했기 때문이다.

    예전 권영길이 훨씬 좋다

    8일 <100분 토론>의 권영길은 ‘권영길답지’ 못했다. 젊은 패널들과 말장난 수준으로 공방을 주고 받는 권영길은 유시민 같았다. “호남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김대중 연호하듯이 권영길을 연호하더이다”라고 자랑하는 권영길은 이인제 같았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권영길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예전의 권영길은 보는 이 낯 뜨겁게 하지 않았다.

    성대모사 한 번 해보라는 주문에 겸연쩍게 웃는 권영길이 원래의 권영길이다. 그 해맑은 미소는 환갑 넘은 중늙은이들이 득실거리는 정치인 세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권영길 만의 무기다.

    권영길더러 뭘 물었는데, 노회찬이나 심상정처럼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려 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MRI 비용이 얼마인지 당연히 모를 수 있고, “잘 모르겠네요, 알아보겠습니다”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권영길을 신뢰했던 것이다.

    좋지 않은 토론이었다. 질문에 잘 대답한 경우도 있고, 동문서답한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좋지 않다. 두 이유에서 좋지 않은데, 지금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무난한 토론을 하여 선방할 입장인가 하는 게 그 하나고, 100분 동안이나 TV를 보고 나서 뭘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게 또 하나다.

    아무리 TV토론에 자주 나가는 정치인이더라도 단 한 번의 TV토론은 천 번이나 만 번 악수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 따라서 지지율 3%의 권영길 후보가 그 100분을 장악하지 못하고 의무방어전 치르듯이 한 것이 이후 고착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책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8일 <100분 토론>을 통해 유권자에게 전달하려는 민주노동당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시청자에게 부각시키려는 권영길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은 참 많은 정책을 가졌지만, 딱히 내세우는 선거공약이 없는 정당 같았고, 권영길은 예전보다 훨씬 불안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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