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짱돌 던지는 법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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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08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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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이 펴낸 『88만원 세대』가 널리 읽히면서 블로거들의 독후감이 양과 질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와 함께 일부 고교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토론을 진행했으며, 교수들이 이 책을 텍스트로 삼아 토론을 한 경우도 있었다.

    <레디앙>은 앞으로 ’88만원 세대’는 물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독후감이나 감상평 등 다양하고 생생한 목소리들을 가려서 실을 예정이다. <레디앙> 독자들께서도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먼저 이 책을 참고 도서로 강의를 진행한 성공회대 학생들의 글을 몇 편 골라 싣는다. 첫번째 글을 쓴 이는 이 대학 사회과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인 정현주씨다. <편집자 주>

    늦은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 검은 하늘엔 모텔을 사칭하는 여관과 호텔을 사칭하는 모텔의 네온사인이 번쩍대고 있었다.

    모텔과 20대 청춘

    “이 많은 모텔들은 망하지도 않는가 봐.”
    “인간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이상 아마 대한민국에서는 없어지기 힘들 것이다.”
    “불륜이니 로맨스니 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독립하지 못한 20대 청춘들이 모텔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연애를 하겠니.”라고 말하며 친구들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나라는 20살에 독립하지 않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던데 우리나라는 집값이며 생활비와 학비를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으니 독립은 커녕 나중에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래도 난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일하는 것이 더 좋아” “나두”라며 두 친구는 또 다른 대화를 이어갔다.

       
      ▲필자 모습.
     

    난 입을 닫았다. 어른이 되기를 유예해버린 우리는 이제 경제적 독립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과연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 수 있을까? 아마 버틸 수 있는 동안은 부모의 그늘에 있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기성세대들에게 ‘부모 등골 빼먹는 세대’로 낙인찍힌 채로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현실적으로 그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사회안전망이 전무한 한국사회에서 부모의 그늘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늘도 울타리도 없이 모든 바람을 맞고 버텨야 하는 20대들은 바리게이트를 칠 수 있을까?

    학교에서는 짱돌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더 열악한 노동환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짱돌을 던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던지는 법도 모를 뿐더러 그런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연대해서 저항해본 경험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시위는 나쁜 것이고,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에 태어난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제1의 명제이자 유일한 삶의 이유로 존재한다. 그리고 경쟁은 시작되었다.

    소위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사람은 친구 이전에 내가 물리쳐야할 경쟁자이다. 그렇게 1차 관문을 통과했다. 그럼 이제 쉴 수 있는가? 더 혹독한 경쟁이 남아있다. 취업의 문이다.

    『88만원세대』의 저자의 말에 따르면 단 5%만이 안정적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다면 짱돌은 들지 못하더라고 이건 아니라고 힘들다고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받아들이기엔 무서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5% 안에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정말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다가고 “안돼, 이러면 안돼,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 돼,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러한 자기주문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더 많이 노력하지 못해서라는 자책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무력감으로 변해간다.

    우리 엄마는 24살 때 두 아이의 엄마였는데

    24살. 이제 이 숫자로 명명될 시간도 두 달 남짓하다. 우리 엄마는 24살 때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에 비하면 난 아직 “애”다. 나이만 먹었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이제 곧 20대의 중반을 넘어서고 직업란에 ‘학생’이 아닌 ‘취업준비생’이라고 써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나의 20대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자꾸 바보로 만든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 본 나는 참 한심하다. 변변한 스펙(토익 점수, 자격증, 수상 등 자신의 이력과 경력 사항들-편집자) 없이 무슨 배짱으로 졸업반까지 왔을까.

    매스컴에서 5%에 입성한 이들의 모습은 “내가 못나서 그렇지”라며 패배감만 더 들게 할 뿐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했길래, 얼마나 게을러서,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살란 말이야. 설사 좀 덜 치열하게 살았던들 그것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 사회인가?

    기계처럼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10대를 보내고 20대를 맞이한 내게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의 연장선 같았다. 대학만 가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듯이 몰아세우던 이들은 또 다시 나를 어딘가로 내몰려고 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를 닫아 버렸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사는 게 재미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아마 그때 내가 조금한 더 ‘똑똑했으면’ 토익 책을 폈으리라. 편입을 하지 않고 계속 예전 학교를 다녔으면 지금쯤 취직은 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3년에 가까운 시간을 ‘운동’이라는 것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비교할 수 없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었더라고 분명 후회는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광끼’라는 청춘드라마가 있었다. 전문대 광고학과의 학생들의 꿈과 사랑을 다룬 드라마였다. 당시 원빈이라는 꽃미남이 출연하고 있기도 했지만, 학생의 사회생활 속의 좌절과 이를 극복하고 해결하는 등의 과정이 비교적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셋 여자셋’,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은 대학생이 중심 인물이었다. 물론 이 시트콤은 대학생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현실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해서 비판도 받았지만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방송에서 사라졌다. 이제 대학생은 시트콤의 소재가 될 여지가 없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약육강식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시트콤에서 대학생이 사라진 이유

    이후 청년 실업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이태백’과 같은 신조어들이 생겨나도 TV는 20대들의 삶을 진진하게 다루지 않았다. 백수는 드라마에서 무능력하고 웃음거리로만 존재한다. 요즘은 사극과 각종 불륜사건들이 판을 친다.

    그 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20대는 부모 잘 만나서 취직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우아한 직업에 안착한 5%만이 등장한다. 그 외엔 다 ‘사고뭉치’, ‘집안의 골칫거리’로 표현된다. 우리가 왜? 이러한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꼰대짓 그만하라고 하고 ’88만원 세대’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시니 황송할 따름이다.

       
      ▲ 송파구청에서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응모자가 몰려 경쟁률이 21:1을 기록해 추첨을 통해 선발했다.(사진=뉴시스)
     

    저자가 말하는 희망은 존재하는 희망이 아닌 품어야 할 희망이다. 그 희망을 품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는 것이겠지. 저자도 얘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20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20대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소리쳐야 한다. 울기라도 해야 한다. “악”소리 나는 현실에서 이 꽉 물고 입 다물고 토플 책을 보고 스펙을 만들어도 5%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울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연대를 경험하지 못했고 경쟁이 삶의 룰로 받아들이고 있는 20대가 과연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과외와 학원수업으로 대학을 갔고 대학에서도 취업과외를 받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낯선 세대이다. 게다가 욕망과 소비의 욕구는 저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괴리는 더 커진다. 명품에 대한 욕망은 주머니사정과는 상관이 없다. 정신은 더 황폐해져만 가고

    경험하지 못한 연대, 삶의 법칙이 된 경쟁

    삶의 가치가 흔들린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20대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이 죄의식 없이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에 유난히 열 살 이상의 나이차를 보이는 커플이 많다.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4~5살 정도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만나면 씀씀이 자체가 달라지고 소위 ‘노는 물’이 바뀐다고 한다. 선물의 액수는 거의 몇 배로 뛴단다.

    학생들만 사귄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거기서 감히 페미니즘이 어쩌구, 여권신장을 위해서는 남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얻어 먹고 비싼 선물 받으면 안 된다,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너도 받아보면 변할 꺼라고 오히려 나에게 충고한다.

    그러니 편한 생활을 위해서는 이미 사회에서 자리 잡은 이들과의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이 젊고 예쁜 여자들을 선호하니 그들에게도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럼 20대 남자들은? 돈 많은 누나들을 찾아가면 된다.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예전에 욕했던 그녀들의 전략 전술이 현실에서는 유용하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알수록 떨쳐버릴 수가 없다.

    20대 남자는? 돈 많은 누나를 찾으면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자”
    이 글귀는 내가 평생 살면서 지키고픈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끼게 된다. 꿈을 꾸고 사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다. 사회에 첫발을 꿈과 희망을 품은 것이 아니라 불안함과 무서움이 짓누르고 있다.

    난 공포영화를 싫어한다. 그 알 수 없는 공포, 불안감이 싫다. 그런데 세상이 공포영화화 되고 있다. 영화처럼 끝나고 환한 불이 켜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는 내가 밟고 올라가야한 존재이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사회에 절망한 이들이 희망을 품고 연대를 할 수 있을까? 혼자 외치는 ‘뻥’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말이다.

    한때 이 썩어 빠진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한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엔 나 하나 바뀌는 것도 힘든데 “무슨 세상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씨알이 되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싶었다. 쉽지 않다. 나의 욕망과 싸워야 하고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으며, 나 같은 사람에게 세상은 관심이 없다. 아니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고 한다. 그게 쉬운 일인가.

    “희망을 가져라” 이젠 지겹다. 내가 “못난 것”은 내가 희망을 가지지 않아서란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단다.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거지? 토익을?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예전에 개천에서 용이 낳지만 이젠 이무기도 나기 힘든 세상이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를 극복한 극소수의 이들을 조명하며 “봐라 니들이 못난 것은 니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자책하게 만든다.

    너무 아프면 소래 내서 울지도 못한다

    예전에 집회에 나갔을 때 선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이렇게 여기에 나와서 집회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나은 거라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은 집회에 나올 수조차 없다고 했다. 우리 같은 학생도 마찬가지라고 아르바이트 하며 힘들게 학교 다니는 애들은 우리처럼 공부하고 사회문제에 신경 쓸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내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당시 용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고 학비를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서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지 않는 이들이 한심하게만 보였었다.

    토익시험 준비하며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난 예전의 신념도 믿음도 꿈도 자꾸만 흐려져만 가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능력 향상에 힘을 쏟는 것도 아니다. 정말 바보가 되어버렸다.

    너무 아픈 사람은 소리 내서 울지 못한다.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리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아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소리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다. 어디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누구에게 무엇에게 짱돌을 던져야 할까.

    주입식 교육의 영향인지 나는 이 책속에서 무엇이 희망이고 어디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누구에게 짱돌을 던져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꿈을 이룰 수 없는 세상에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그 꿈을 포기해도 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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