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체 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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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20일 0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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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최근 이런 저런 이유로 권영길 의원실과 캠프 결합을 그만두고 사민주의에 공감하는 이들의 폭넓은 세력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네트워크'(약칭 ‘사민넷’. 추진위원장 유팔무)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열렸던 사민넷 워크숍 모습.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최근 ‘경남 사민주의연대’(준)이 성공적으로 출범하였다. 이외에도 현재 사민넷은 서울, 경기/인천, 부산, 강원 등에서 사민넷 지역조직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얼마 전 사석에서 현재 민주노동당의 주요 정파인 ‘전진’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철(존칭 생략)을 만났다. 김종철은 “사민주의자들이 세력화를 하는 것은 좋은데, 내용이 뭔지를 드러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한 김종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사민주의’와 전진의 ‘사회주의’가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많이 하곤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김종철 집행위원장과 이후에 <레디앙> 등의 지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자고 합의했다. 이 글의 탄생 배경이다. 

    굳이 ‘전진’에게 공개 논쟁을 제안하는 이유 

    이번 논쟁은 기본적으로 ‘전진’의 김종철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전진’ 활동가들의 논쟁 참여도 기대한다. 

    필자가 특별히 ‘전진’을 특정하는 것은 전진이 당내에서 ‘제1야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정파인데, 전진의 사회주의적 마인드로 인한 ‘이념적 편향성’이 오늘날 당이 어려움에 처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여당에 대한 권력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야당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민주노동당의 위기가 ‘사민주의적 마인드’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내 당권파와 제1야당 세력의 ‘이념적 편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논쟁은 한 번의 글로 끝나지 않고 반론-재반론, 새로운 논점의 제기, 당내 문제와의 연동 등의 형태로 포괄적으로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1890년대 독일에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소위 ‘수정주의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2007년 대한민국에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논쟁이 이뤄지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풍부한’ 논쟁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소련식 모델을 추구했던 80년대 PD 노선

    통상적으로 구분하듯이 80년대 운동권은 크게 NL-PD로 구분되었다. NL은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북한을 기본 모델로 지향했다. 그리고 한반도 변혁이라는 관점에서 북의 ‘민주기지론’을 수용하며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과 연계하는 항미연북(抗美連北)노선을 취했다. 이 방침에는 현재도 변함이 없다. 그들에게 간첩단 사건과 심지어 핵 실험조차도 여전히 ‘변혁운동’의 일환이다.

    반면, PD의 경우는 좀 달랐다. 이들은 맑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소련식 모델을 기본적으로 지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NL과 달리 89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 91년 소련의 붕괴는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군사독재의 종식은 더욱 커다란 사상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 당시를 겪었던 많은 PD계열 활동가들은 소련 모델의 붕괴 이후 원인분석과 평가, 그리고 대안적 전망을 갖지 못한 채 ‘생활 속으로’, 혹은 ‘현장 속으로’ 매몰된 경우가 많다. 소련 모델의 붕괴에 대한 원인 분석, 평가, 대안모색은 하나같이 굵직한 주제들이기에 활동가 개인이 정리하기에는 벅찬 것들이었다. 이렇게 ‘판단유보’ 상태에서 자꾸 세월은 쌓여가고 있는 셈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체제적’ 귀결 – 사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사민주의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묻어두었던 지점의 재확인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맑시즘의 등장 이후에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운동은 그 표현에 아무리 현란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건, 결국 ‘체제’를 기준으로 볼 때 두 가지 이외에는 없었다. 한 가지는 유럽을 중심으로 했던 ‘사민주의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중국/북한 등 반(半)봉건국가 혹은 저개발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했던 ‘공산주의 체제’이다.

    그리고 이중에서 흔히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소련식 모델을 기본으로 했던 ‘공산주의 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전진 활동가들은 소련식 모델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 – 다섯 가지 ‘역사적 변별점’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의 역사적 변별점은 다음과 같다. 아래 서술될 주요 논점들은 동시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전진의 김종철에게 필자가 ‘공개질문’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첫째, PT독재에 대한 인정 유무이다. 혹자는 PT독재의 원래취지는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다분히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접근이다. PT독재론은 자본가 계급을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에 기초하며 그 핵심은 ‘다당제의 인정 여부’다.

    둘째, 권력 획득 방식으로서의 폭력혁명론이다. 폭력혁명론에 대한 입장 역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화해 불가능한 계급적 대립’으로 보며, 자본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에서 유래한다. 알다시피 80년대 NL이건 PD이건 모두 ‘폭력혁명’을 (먼 미래가 아닌) ‘당면한’ 권력획득의 기본 방법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 중앙집중계획경제에 대한 입장이다. 소련의 경우 ‘고스플란’이라 불리는 조직에서 모든 재화의 가격과 물량까지도 전부 중앙집중계획경제 차원에서 실시되었다.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에서 관료제의 문제와 민주주의의 부재 문제는 단순한 관료들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경제체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중앙집중계획경제는 권력과 자원 그리고 정보의 집중을 전제하는 제도이다.

    넷째, 시장/상품에 대한 불인정이다. 공산주의 체제는 시장과 상품을 폐지의 대상으로 사고했다. 시장과 상품은 그자체로 불온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다섯째, 전면적 국유화의 여부이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체제 옹호자들에게 국유화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 것으로 사고되었다.

    다섯 가지 쟁점에 대한 사민주의자의 기본 입장

    통상적으로 사민주의라고 하면 곧바로 붙는 말이 ‘개량주의’라는 낙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민주의는 ‘커밍아웃’의 대상이다. 상대방에게 ‘개량’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참으로 쉽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은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또한 ‘유치한’ 것이기도 하다.

    김종철에게 공개 질문을 한 입장이니 분명하게 하기 위해 위의 다섯 가지 쟁점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밝힌다.

    첫째, PT독재를 반대하며 다당제를 옹호한다.

    둘째, 폭력혁명론을 반대하며 ‘의회’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100년 전 베른슈타인 주장의 핵심이기도 하다.

    셋째, 중앙집중계획경제를 분명하게 반대한다. 국가사회주의적 ‘독재체제’의 물적 토대이며 생산력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 시장과 상품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이 아니다. 시장은 특정한 조건에서 폐해가 있지만 또 다른 특정한 조건에서 시장은 오히려 바람직한 경우도 많다.

    다섯째, 국유화는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신중하게 실시되어야 한다. 경쟁과 혁신이 중요한 산업분야일수록 국유화는 신중해야 하며 보육, 의료, 교육, 주택, 노후복지 등의 ‘필수재화’의 경우 검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없는 ‘유령 사회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라는 단어의 대중적 이미지가 안 좋아서 ‘민주적’이란 수식어를 붙여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다. 그 수식어를 변혁적으로 바꾸건, 혁명적으로 바꾸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위 다섯 가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실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급진적 정서만 존재하는 ‘유령 사회주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사민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를 갈랐던 5가지 변별점 이외에 ‘새로운’ 변별점을 제시하는 것도 생산적인 방법이다.

    위 다섯 가지 논점에 대한 김종철의 훌륭한 답변을 기대한다. 물론 답변과 함께 ‘새로운 논점’을 제기하는 것도 적극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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