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속극 안 봐도 되아요, 안 봐도"
        2007년 11월 07일 1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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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마지막 일요일 저녁 8시 30분. 저녁상을 물리고 일일연속극 대신 주말연속극 할 시간. 텔레비전 앞에서 잠시나마 웃고 안타까워하고 논평하고 그럴 시간에 마을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모두 경로당에 모였다.

    이 시간에 4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닐 성싶다. 깔끔하게 차려 입고 경로당에 모인 사람들은 열변을 토하는 강기갑 국회의원 말에 주저하지 않고 추임새를 넣는다.

    “농민들은 우리나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 아닙니까.”
    “예.”

    “그런데 국민의 어머니 같은 농민들을 요렇게 홀대를 하고 서자 취급을 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도 안 하는 이런 정치판을 그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안 되겄지예?”
    “예.”

    “혼쭐을 내 줘야 합니다.…… 대통령 되고 나서 농민들 팔자 좀 편하게, 웃음 좀 나오게 해 준 대통령 있습니까? 없지예?”
    “네.”

    “정치는 부모가 자식들 돌보듯이 하는 깁니더. 잘 사는 자식보다 몬 살고 힘없고 병들고 돈 없는 이 자식이 제일 애틋하고 그 자식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게 우리 부모님 마음 아닙니꺼.…이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들 더 잘 살게 하는 법 만들고 이래 할 게 아니고 몬 살고 배고프고 울고 아파 병들고 연세 많은 노약자들 이 사람들 챙겨주고 보살펴 주는 게 정치 아닙니꺼.

    건물 지을 때 기초를 튼튼히 하고 단단히 하는 것처럼 농촌을 몬 살리면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없다, 이게 우리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겁니다. 근데 한미FTA 때문에 완전히 농촌을 골로 보내 삘라 하고 안 있습니꺼. 국민들의 어머니 같은 우리 농민들, 잘 모르셔요, 얼마나 심각한지를.

    텔레비전이 뭔 소용 있고, 휴대폰이 뭔 소용 있고, 세탁기, 냉장고가 뭔 소용이 있어요.…… 먹는 거 없으면 우찌 살끼라. …… 저희 민주노동당은 우째든지 농촌, 농업을 살리는 그런 일에 나서기 위해서 우리 권영길 후보께서 전남을 죽 돌고 전북을 돌고 오늘 늦게 여 와서 어르신들한테 이야기를 드린다고 왔는데 제가 또 입을 열다보니까 내가 30초만 이야기 한다는 게 따발총이 되어 떠벌렸어요. 이해하시지요.”

    “잘하셨어요.”
    “농촌 살립시다.”
    “예.”

       
      ▲사진=진보정치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대표가 말을 이었다.

    “……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이나 이런 것은 알지요? 우르과이라운드(UR)다 더블유티오(WTO)다, 에프티에이(FTA)다, 아이엠에프(IMF)다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요? 그게 똑같은 마피아들인데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나쁘다는 건 알지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농민들이 못 살게 된다는 건 알지요 잉. 그럼 어떻게 해야 쓰까. 고장을 내부러야겠지요?”
    “고장 내고 갈아 부러야지요.”

    단 1초도 틈을 안 주고 한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한 걸음 더 나간 말씀을 하신다. 고장만 내다 뿐이냐, 갈아 버려야지라고. 그 말에 모두 활짝 웃는다.

    영어 앞 글자를 딴 저 이름들, 원래 이름도, 풀어서 우리 뜻으로 바꾸어도 영 낯선 이름들이지만 농민들을 절망으로 몰아 논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하고 제초제를 들이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기도 한 이름들이다.

    “각 당에서 농민 잘 살게 해 준다는 정책을 만들어가지고 농민들 잘 살게 한다는데 폴새 틀려부렀습니다. 인제는 좋은 말 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고장을 내부리는데 어떻게 고장을 내냐면 지도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짓거리를 해야 하는데 농민들, 시커먼 사람들이 서울에 떼 몰려서 와서 실실 떼 지어 돌아다니는 거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11월 11일, 그때 우리 떼 몰려 다니면서 고장을 내불자고 왔습니다. 나 징역 가도 괜찮은 게 여러분 많이 와서 이번에는 그냥 멋지게 한 판 해가지고 우리 농민 존심을 한번 살리는 그런 멋진 작품을 한번 만들어 봅시다.”

    권영길 후보가 마지막 이야기 하는 사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이야기들이 세 번째로 이어지는데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저녁들 다 드셨어요?”
    “예.”
    “오늘 저녁 빨리 끝내고 연속극 보러 가셔야겠지요?”
    “연속극은 안 봐도 되아요. 안 봐도 되아.”

    “원래는 보시는데 오늘은 안 봐도 돼요?”
    “예.”
    “연속극 뭐 보시는데요?”
    “이쁘고 미웁고 그냥 다 봐요.”

    ‘이쁘고 미웁고’. ‘이쁘고 미웁고’는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가족’이라는 드라마일 게다. 늘 아슬아슬하게 끝나 다음날 같은 시각 텔레비전 앞에 앉게 하는 게 드라마인데 할머니는 그딴 거쯤 안 봐도 된다고 하신다. 모두들 즐겨보는 드라마들에 농민들이 등장인물로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제대로 농민들이 겪는 고통이나 아픔을 보여주는 건 찾기 힘들다.

    문제는 모두 덮어놓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자는 게 텔레비전 드라마 아닌가. 여간 해서는 뉴스든 연속극이든 농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 텔레비전, 오늘 밤 할머니는 거부한다.

    “…… 오늘 여기 와서 여러 어르신들 찾아뵌 것도 이 세상이 개판이다 썩어 문드러져서 안 되겠다, 이 세상 확 바꿔버려야 농민들도 숨통이 트이고 살아갈 맛이 있겠다 그래서 데모하자고 이렇게 선동하러 왔습니다.”
    “예, 예.”
    “잘했습니까?”
    “예.”

    “한미FTA 오면 우리 농사 다 망한다. 농민 다 죽게 생겼다 그런 말씀 들어보셨을 텐데 한미FTA라는 게 농사만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다 망하게 할 겁니다. FTA 되면 지금 있는 건강보험 안 받는다는 거죠. 미국이 지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은 어쨌든 돈 있는 사람만 살립니다. 돈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죠? 죽는 수밖에 없죠?”
    “그러쥬.”

    “의료보험도 안 통하고 돈도 없고 큰 병 걸리면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죠. 미국이 큰 나라고 잘 산다고 그러는데 교육도 ‘니 아들 딸들 니가 책임지고 공부시켜라’ 다 그렇거든요. 어르신들도 자식들은 공부 시켜야지 해서 소 팔고 논 팔았잖아요.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우리나라도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잘 산다고. 거기 들어 있는 나라 중에서 나랏돈으로 공부를 공짜로 안 시키는 나라, 나랏돈으로 병들었을 때 의료보험으로 전부 공짜로 치료 안 해주는 나라, 노후 생활 보장 안 해주는 나라가 딱 두 나라가 있는데 우리 나라하고 미국입니다.

    그 미국이 한미FTA를 가지고 ‘너희 나랏돈으로 애들 공짜 공부시킨다고 그러는데 그런 거 하면 안돼’ 하는 것입니다. 병원, 전기, 가스, 수도도 돈벌이로 내모는 겁니다. …… 한미 FTA가 오면 농촌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도시 서민들 다 죽는 겁니다.

    그래서 노동자들도 이거 오면 안 되겠다 이거는 어떻게든지 막아내야겠다 해서 11월 11날 서울에 와서 노동자들도 올라가고 농민도 올라가고 노점상도 모여서 우리도 이놈의 세상 안 되겠다…….”
    “예, 예.”

    한 할머니께서 ‘그렇고 말고요, 맞습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하듯이 ‘예, 예’ 하신다. 모두 말하는 후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귀를 기울인다. 갑자기 나이 드신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어떤 젊은 사람들이 저처럼 진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가운데 사교육비가 최고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논 팔아 소 팔아 자식교육을 시켰던 부모들. 그래도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다. 나라가 발전하면 그만큼 개인들에게 짊어지게 했던 짐들을 이제 놓게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육마저 돈 있는 사람들의 경쟁터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등골 휘어가며 공부시켜 도시로 내 보낸 자식들은 다시 등골 빠져가며 자식들을 공부시킨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밝은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공부가 끝난 뒤 자식들이 맞닥뜨릴 사회는 차별 가득한 비정규직 세상이다.

    “갈 수 있으면 가야지.”
    “차 줘야지, 싹 가게. 나도 가서 엎어부러야지.”

    멀리서 온 손님들 서운하지 않게 인사말로 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하는 사람 무색하게 하지 않으려고 일어나지 않고 앉은 자리가 아니다. 세상엔 젊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갓난아이든, 한창 뛰어다니는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20대든, 청장년이든, 노인이든 한 사람 한 사람 무게 잴 수 없는 한 우주인 것은 똑같다.

    한때 ‘혁명’이라는 낱말에 가슴 떨려하며 밑줄을 그었던 이들이 그야말로 밑줄만 긋고 떠나버렸지만, 이 시골 구석에서 40여 명 노인들이 ‘엎어부러야지’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하니 일흔 넷 할아버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지금 일흔 네 살이요. 요번에 광고하기를 노령연금을 지급한다고 하더만. 반갑습디다. 아 농촌에서 돈벌이도 없고……. 부랴부랴 면사무소를 가서 어디로 가야 하냐고 하니 민원실로 가래. 가 봤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드만. 검토를 해 봐야 돈을 줄지 안 줄지 안다고 하더니 안 된다고 해. (옆에 있는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이 분도 갔는데 안 된다고 해. 74세인데. 그럼 돈 주나마나 말만. 말로만 방송으로만…….”

    할아버지께서 지금 당장 당신한테 절실한 문제일 테고, 궁금한 문제인 기초노령연금제도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노령인구에 대한 정책과 관련해 고민하고 준비한 것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한다.

    일흔 넷 할아버지의 질문과 답변을 경청하며 궁금한 걸 묻는 모습을 보면서 얼핏 정치란 무겁고 딱딱한 것이거나 어렵고 힘든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기하고 싶은 거를 얘기하는 것, 개인 대화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공식으로 함께 고민하는 것. 어떤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계획하고, 힘 모으는 것. 정치란 삶을 조직하는 것, 함께 사는 삶을 조직하는 것.

    마을, 사회, 나라라는 공동체를 꾸리는 것. 그러니까 정치는 배운 사람이나 정치가나 잘 난 사람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누구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끼리 이야기 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함께 우리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 건지. 이렇게 해선 안 된다, 이렇게 하자는 거 아닐까. 숱한 정치인들은 이 나이든 농민들의 삶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알 필요가 없다. 안다고 그이들이 어찌할 건 아니니까.

    경로당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쳐다보는 사람도 여럿이다. 문 앞에는 신발이 한참 많다. 흰 고무신도 여섯 켤레나 있다. 한 시간이 지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아저씨가 이야기 끝자락이라도 아쉽지 않게 안 놓치려고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귀 기울인다. 문밖에서 듣던 아저씨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민중 속으로’라는 말은 아직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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