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하는 아이들, 손자 떠맡은 노인들
        2007년 11월 07일 1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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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 쓴 아저씨를 기다린 일요일

    권영길 아저씨 안녕하세요. 힘내세요. 꼭 대통령 되세요.
    아저씨에게. 아저씨 하늘땅 공부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저씨 힘내세요. 안경 쓴 아저씨 힘내세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세요.
    세계에서 인정받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세요.
    우리 나라를 위해 힘 좀 써주세요.
    우리 나라 지켜주세요.
    우리 나라 보호해 주세요.
    협동하는 우리 나라 만들어 주세요.

    아직 ‘우리 나라’에 배반당해 보지 않은 아이들은 ‘우리 나라’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색종이 편지에 적었다. ‘내게 무엇을 주세요’가 아니라, ‘나를 위해 어떻게 해 달라’가 아니라 ‘우리 나라’를 위해. 하지만 어린이들이 ‘우리 나라’에 배반당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 사회 한쪽 어린이들은 ‘우리 나라’에 배반당한다. 그리고 자랄수록 배반당하는 일은 잦아진다.

       
      ▲사진=진보정치
     

    안경 쓴 아저씨, 권영길을 기다리다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하늘땅 공부방’은 아담한 단층집이다. 10월 28일 일요일 늦은 낮, 아이들은 아침부터 모여 주먹밥을 만들어 먹고 안경 쓴 아저씨를 위해 한 접시 따로 담아 남겨 놓았다. 저희들끼리 하얀 전지에 종이접기를 해서 붙이고, 글씨도 쓰고 편지도 꽂아놓았다.

    언젠가 몇 아이가 배웠던 율동도 함께 연습해 놓았다. 늦봄 학교에 다니는 14살 윤혁이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대통령 후보에게 할 인터뷰 질문을 뽑아 놓고 기다렸다. 긴장하던 윤혁이, 어찌 하다 보니 서면 인터뷰가 되어버렸다.

    1. 미래의 세상이 어떤 세상이면 좋겠나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웃음꽃을 계속 피우고 있는 세상
    2. 행복한 미래 세상을 위해서는 어떤 마음이, 어떤 생각이 바람직하나요?
    모두가 친구가 되고, 어려울 때 서로 기대고, 힘이 되어주는 마음씨

    3. 내 인생에 가장 감명(또는 영향)을 주었던 분(스승, 어른, 친구 등)은 누구신지요? 그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아버지. 그 이유는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남북에 갈라져 사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지 말고 평화로운 나라, 통일되는 나라를 만드는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셔서 내 인생에 길잡이가 되셨다.

    가난한 어른보다 더 가난한 아이들

    해맑은 어린이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어른들은 이른 아침부터 김제에서 출발해 부안으로 고창으로 내달려왔던 고단함을 한 순간에 털어냈다. 방 하나 꽉 찼던 손님들이 가고, 어린이들이 가고, 대표교사인 김혜선 씨네 아이들 셋과 앞으로 함께 이곳에서 일할 김설미 씨네 아이들 둘이 남았다.

    공부방은 2000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집도 방도 없었다. 어린이들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모여 공부하고 놀았다. 아직도 그 컨테이너 박스가 집 마당 앞쪽에 서 있다. 5살부터 12살까지 어린이 40명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나 학교 수업이 끝난 뒤 공부방에 와서 저녁 6시까지 생활한다.

    공부방을 만든 건 ‘여성농민과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아동에게 교육과 복지 활동을 제공하고 전인적인 발달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도시든 농촌이든 가난한 어른들이 있는 곳에는 가난한 어른보다 더 가난한 어린이들이 있다.

    고창군 성내면은 정읍시와 경계지역으로 많은 아이들이 정읍시로 빠져나간다. 교육 때문이다. 아이들이 놓인 상황은 그리 좋지가 않다. 부모가 이혼해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버려지듯이 맡겨진 아이들이 한 반에 ⅓이상, 많은 경우는 절반이라고 한다. 아이들 가슴에 쌓인 분노가 곧잘 겉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젠 도시가 그립지 않다

    서른두 살 김설미 씨는 큰애가 초등학교 5학년, 작은애가 일곱 살이다. 일찍 아이들을 키워서 그런지 처음 보기에는 스물 중반으로 보인다. 2000년 서울서 하던 일을 접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이곳으로 내려온 남편을 따라 처음 왔을 때는 도시가 그립기만 했다. 그래서 자주 서울을 오갔다. 아무래도 마음 붙일 곳을,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였겠지.

    하지만 이제 서울 가까이만 가면 답답해서 있지 못한다. 공기가 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눈이 확 트인 곳에 있다가 건물 빽빽한 서울로 가면 당장 눈이 답답해서이다. 그리고 이제는 농민회 회원으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함께 할 이웃이 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이제는 별 두려움 없이 ‘데모’도 열심히 한다.

    “농민회 활동하고 당 가입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저는 뉴스도 안 보았는데 지금은 뉴스도 보고 한미FTA에 관심도 없었는데 이제 서울 집회 가면 그런 얘기를 알기 때문에 화가 나요. 당 활동을 하고 나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소심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어려웠는데 모임하면서 얘기도 많이 하고 사람들하고도 잘 사귀고 융통성 있게 말도 하고 농담도 하게 되더라고요. 여기 언니(김혜선 씨)하고 같이 다니면서 많이 배워요. 언니가 잘 데리고 다녀요.”

    애들 교육도 어렵고, 농사꾼 살기도 어렵고

    서울 살 땐 몰랐는데 직접 내려와서 농사짓고 살아보니 농민이 힘들게 사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는 힘들어 자신은 간간히 도와왔던 공부방 일을 정식으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덜 소비하고 더 공기 좋고 더 여유로운 농촌에서 먹고살 정도만 농사짓고 살면 좋겠다는. 하지만 그 상상이 가능한 건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닥치는 문제가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몇 가지를 꼽는다.

    “우선 아이들 교육문제가 많이 힘들고요, 그리고 가면 갈수록 농사꾼들이 살기가 어려워요. 농사를 지어도 수매가 많이 줄어들고 가격도 내려가는 추세인 데다 보조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말로는 준다고 하는데…. 농사짓는 사람들 직불제 같은 것도 없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직불제 없어지면 진짜 큰일 나거든요.

    그렇게 하면 농사짓는 사람들도 한두 명씩 다 떠날 거 아니에요? 요즘은 서울 사람들도 사업이 안 돼서 내려오는 추센데. 아이들 문제는 우선은 부모님들이 농사일 하느라 밖에서 많이 생활하니까 아이들한테 신경 써주지 못하는 거죠. 밤에 오면 피곤하니까.

    여기는 시내가 멀어요. 애들 학원 하나 보내려고 해도 사실 힘들고요. 학원 차도 안 들어와요. 공부방에서도 아이들 공부를 봐주긴 하는데 보조를 많이 못 받는 게 몇 개 돼요. 다 해주질 않더라고요. 텔레비전 보면 애들 교육에 대해 이런 거 저런 거 나오잖아요. 우리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이 가서 못 해 주지요.

    서울 애들처럼 그렇게 못 가르쳐 주잖아요. 우리 큰애도 서울에서는 잘 하는 건 아니어도 중간 정도는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공부가 바닥이에요. 14명밖에 안 되는데.”

    다시 손자 손녀를 떠맡은 사람들

    이곳 초등학교는 교장선생님 빼고 선생님이 모두 6명이다. 한 학년에 한 반씩이고, 학생 수가 제일 많은 학년이 5학년으로 14명이다. 도시 학교에서는 저렴한 교육비로 학생들에게 특기적성 수업을 진행하는데 이곳은 그런 특기적성 교육이 없다.

       
      ▲사진=진보정치
     

    대신 방학이면 컴퓨터와 영어를 무료로 가르친다고 한다. 학교는 수업만 하고 끝이기 때문에 공부방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생활공간이다. 생활공간은 다르지만 텔레비전은 전국을 보여준다. 아니 서울을 보여주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잘 사는 부모들이 자식들 교육에 어떤 투자를 하는지, 각종 교육정책들이 어떻게 소수 선택된 지역과 계층한테만 집중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지는 않겠지만.

    김설미 씨가 아쉬워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단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닐 게다. 그이가 말하는 것은 ‘학원’에 못 보내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도 ‘돈’이 개입하고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지금, 그래서 그 미래는 차별일 현실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공부방에 다니면서 책 읽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는 김설미 씨의 작은애가 저쪽 상에서 종이를 오리고 꾸민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며.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기뻐해주는 엄마, 일하고 돌아와 팔베개 해주는 아빠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설미 씨는 마을에 있는 엄마, 아빠가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안타깝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제 농사 못 짓죠. 논 가진 사람은 없고 텃밭 정도나 지을까. 생활비는 보조금 조금씩 받을 거예요.”

    제일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시 아이들을 본다. 금쪽같은 자식들 배 곯리는 일이 그 무엇보다 무서워 새벽부터 밤까지 온몸으로 시간을 밀어온 세월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손자, 손녀를 떠맡은 사람들.

    “내가 2000년에 이곳으로 내려왔을 때도 그런 애들이 있었어요. 이혼하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아이를 맡겨놓고 돈 벌러 간다고 가는 거죠. 어디를 가나 이런 경우가 있어요. 서울 애들도 그렇고요. 서울에는 애들끼리만 사는 데도 봤어요. 근데 여기는 애들끼리 사는 애들은 다 커서 중고생들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지요.”

    기다린다, 기다린다. 아이들도 기다리고, 늙은 어른들도 기다린다. 온다는 날 기약이나 했을까. 기다리는 사람도 속 타고 오지 못하는 사람도 속이 타고.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가면 무엇이 있을까. 일자리가 안정되어 먹고사는 일이 힘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안 벌어졌을까.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시골에서 뒷감당을 한다.

    사람 마음에 그 무언가를 심는 사람

    공부방을 이제는 지역아동센터라고 부른다. 올해부터 바뀌었다. 하지만 하늘땅 공부방을 만든 김혜선 씨는 공부방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

    “법제화되면서 괜히 그럴싸한 말로 부르는 거죠. 법제화되니까 군에서 예산을 지원해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필요한 곳에서 하려고 해도 군 예산이 없다고 안 해줘요. 기존에 저희처럼 하는 데는 별 수 없이 지원을 해주지만. 도시에도 소외된 아이가 많은 곳에 세워져야 하겠지만 농촌은 진짜 더 많이 필요해요.

    학원이나 문화시설 이런 것도 전혀 없으니 그 역할을 공부방에서 하는 거죠. 고창만 해도 14개 읍면인데 지역아동센터가 세 군데밖에 없어요. 읍면에 한 개씩 원래는 14개를 다 만들어야 하는데 말예요. 그나마 두 군데도 읍에 있어요. 솔직히 읍에는 학원도 있고 방과후 교실도 있고 골고루 있어요. 면단위에도 있어야 하는데 읍에만 있지요.”

    법제화 해 놨지만 예산은 없단다. 게다가 만들려 해도 조건이 더 까다로워졌단다. 시설기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들한테도 선거권 주라”

    시설을 만드는 데는 지원을 해 주지 않는다. 시설은 개인이 만들고 그 뒤 일 년 간 활동을 지켜 본 뒤 지원이 결정된다고 한다. 지원하는 금액은 한 달에 200만 원. 하늘땅 공부방 아이들이 40명이다. 40명에 2백만 원이면 간신히 먹을 걸 챙겨줄 수 있는 정도다. 아니 그것도 빠듯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기본으로 먹을 거 해주고 난 뒤에도 해 줘야 할 것은 더 많다. 책도 필요하고 부교재도 필요하고 재료도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 말고도 마음에 상처 입은 아이들을 회복시킬 상담치료와 활동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개인이 해 내야 하는 걸까. 지난 겨울에는 보일러가 고장이 나 고생을 하기도 했다.

    “겨울에 보일러가 터졌는데 보일러 수리비로 목돈 70~80만 원이 필요했어요. 목돈이니 그 예산이 있을 리가 없죠. 일정하게 고정으로 드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놓지만 툭하고 터지는 돈은 무방비인거예요. 지금도 컴퓨터 한 대가 속을 썩여 외상으로 한 대 신청해 놓았어요.

    이제 그 돈을 마련하는 일이 남은 거죠. 지역에서 모금을 해야 돼요. 그게 제 역할이에요. 되게 웃긴 게 저희 면은 조금 특이해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모임들이 참 많아요. 제가 민주노동당 부위원장인 걸 아는데다가 공부방은 다 아이들이잖아요. 유권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도움에서도 밀리더라고요.

    억울해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우리 애들도 선거권 줘야한다는 거예요. 투표권 있으면 진짜 이렇게까지는 안 할 거라고요. 다른 데는 도움을 주면서 말예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데. 다니면서 얘기를 해도 통하지가 않아요. 어떨 땐 그런 게 정말 무서워요.”

    물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당내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에서 하는 일들을 모니터링도 하고 적극으로 움직여보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기 생계가 일단은 그러하니까 그런 활동이 안 돼요. 의회에서 뭘 하는지 의회 모니터링도 하자고 처음에는 그랬는데 일단 농사철이 되면 정신이 없어요. 당원들이 거의 다 농사짓는 분들이거든요.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몇 안 되고. 그래서 공부방 문제 같은 것들을 반영하고 해결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많이 못하고 있지요.”

    농사를 지으면서 여성농민회 회원이면서 공부방 선생님이면서 민주노동당 고창군위원회 부위원장이기도 한 김혜선 씨는 안 봐도 바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처음 시작했던 공부방을 지금까지 7년째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이는 그렇게 많은 일을 맡다보니 ‘어중이떠중이’로 한다고 하지만 7년을 이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애를 썼겠는가.

    농사짓고, 공부방 운영하고, 민주노동당 일하고

    “공부방 얘기 하면 밤새 해도 모자라죠.”
    남몰래 눈물 훔친 일도 숱했을 거다. 공부방 하면서 많이 울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많죠. 아이들 때문에 울기도 하고.”
    벌써 목소리가 떨리고 말에 물기가 어린다.

    “처음에 공부방 하면서 지원은 전혀 없이 농민회에서 컨테이너 사무실을 줘서 제가 그냥 한 거예요.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고파서 뭐 좀 먹고 싶어 하죠. 엄마들한테 돈 걷어서 먹을 걸 주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못 내는 거예요, 형편들이. 그래서 제가 애들 학교에 간 오전마다 책 외판을 했어요.

    그 돈으로 애들 책도 사 주고 간식도 사고 그렇게 했는데 주변에서는 그런 게 이제 이상한 여자로 보이는 거예요, 시집 와서 어머니랑 같이 살면서 시작을 했는데 ‘약간 이상한 여자다’ 그런 얘기까지 들어가면서 했죠. 애들 때문에는 눈물이어도 그게 보람이잖아요.”

    그동안 운 날이 어디 손으로 꼽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 흘린 눈물이 더 뜨겁고 더 무겁고 더 아프고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도 숱하게 운 날들에서도 더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할머니한테 보내져 온 애가 있었는데 저는 그 아이랑 있었던 일이 안 잊혀요. 걔 때문에 한참 울어서. 우리 아이들이 있잖아요, 공부방에. 우리 아이들이 ‘엄마, 엄마’ 이러니까 그게 되게 부러웠나 봐요. 엄마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게.

    성격이 싹싹한 아이라서 나는 걔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몰랐어요. 어느 날 저한테 오더니 이렇게 허리 있는 데를 안더니 ‘저도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날 내가 하루 종일 울었잖아요. 그 말 듣고. 그래가지고……, 아유 정말, 또 눈물 나오려고 하네.”

    "아유,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지나간 날이 지금 울게 한다. 김혜선 씨, 물기 섞인 목소리에 나도 울고 싶다.

    “아이고. 진짜 그래서 그런 일들 한 번씩 겪고 나면 너무 힘들어서 공부방 포기하고 싶다가도 못 하는 거예요. 그리고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눈이 와서 내가 늦게 온 날인데 애들이 안 가고 문 앞에서, 공부방 문 앞에서 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추운데…….

    미안한 마음에 집에 가지 왜 여기 있느냐고 그랬더니 ‘선생님이랑 약속했는데 어떻게 가냐’고…. 컨테이너 바닥이 너무 차가워 양탄자 깔고 이불을 깔고 그래도 너무 차가운 거예요 막. 근데도 안 가고 거기서 발 비벼 가면서 공부한다고….”

    선생님은 따뜻한 집으로 공부방을 옮긴 뒤에도 추웠던 그 날들을 잊지 못한다. 날은 추웠으나 마음은 뜨거웠을 그 날들을. 아이들도 잊지 않았을까. 추워도 선생님이 올 때까지 누구도 가지 말자고 기다리던 눈 온 날 컨테이너 앞을. 발바닥 비비던 컨테이너 바닥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는 잊어도 얼어붙었던 볼과 손과 발바닥은 문득 문득 그 날들을 떠올릴 것이다. 떠올려 가슴에 울릴 것이다.

    2000년 공부방 처음 시작했을 때 초등학교 높은 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중학생이 된다고, 고등학생이 된다고 보살핌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그때는 그때대로 집이 아니더라도 보금자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지금도 한 마을에 살아요. 요즘 애들이 그게 있어요. 자기가 잘 모르는, 아니 조그만 동네에 사니 누구 엄마인지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도 인사를 잘 안 해요. 근데 공부방 다녔던 애들은 확실히 달라요. 공부방에 안 왔던 애들은 저 봐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해요.

    사춘기 겪으면서 애들이 그건 도시나 농촌이나 다 똑같은 거 같아요,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들도 어떤 공간이 있으면 좋겠는데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 애들이 함께 죽 올라가서 커서까지 공부방 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제 한계예요.”

    운동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그게 왜 김혜선 씨의 한계란 말인가.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능력 있는 개인이 혼자 풀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지역에 있는 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아야 할 테고, 나라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닐까.

    김혜선 씨가 성내면에 오기 전이 궁금했다. 그이는 고창에서 태어나 자랐다.

    “학교 졸업하고 재수하러 올라갔다가 안양에서 우연히 청년회 활동을 했어요. 거기에서 언니가 글을 썼어요. 언니는 거기 문창반인가 뭐 하고 저는 풍물 모임 하면서 그쪽 언니들하고 같이 현장에도 들어간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오빠들이 집에서 농민운동을 했거든요. 진짜 막 살벌할 때 했어요. 그래서 딱 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너무 없더라고요. 막내라 엄마 옆에도 있고 싶어서 내려왔지요. 엄마는 내려오지 말라고, 거기서 어떻게든지 살라고 했지만. 고창 농민회 간사 활동은 잠깐 했어요.

    유치원에서 일하면서 청년회 활동을 계속 했죠. 농민회 안에 청년모임이 있었거든요. 풍물도 배우고 등산도 같이 하다가 남편을 만난 거지요. 남편은 학교 졸업하고 바로 투신한 경우죠. 남편도 여기가 고향이긴 한데 다섯 살 때 학교 때문에 서울로 갔다가 다 마치고 내려왔어요.”

    농민운동 하는 여성들이 남편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혜선 씨는 자기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한다. 어려서부터 죽 고향에서 컸기 때문에 인맥도 넓다. 농민운동을 했던 오빠들, 게다가 어머니도 여성농민회 회장을 오랫동안 지내셔서 결혼에도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혜선 씨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몇 월에 뭘 했고 따지다 보면 우리나라 농민운동 중 몇십 년 역사는 정리되지 않을까. 운동은 특별한 그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삶에 적극 개입해 들어가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땅 속에 심는 농사와 마음 속에 심는 농사

    짧지만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니, 김혜선 씨는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을 피하지 않고 풍덩 몸을 담가 살아온 사람이다. 안양에서 청년회를 만나고, 고창에서 농민회를 만나고, 결혼해서 공부방을 만들고, 민주노동당을 만나고. 앞치마를 두르고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먹이고, 면이라도 마을은 다 달라 집이 공부방에서 먼 아이들을 차에 태워 데려다 주고.

    고창은 땅콩이 맛좋기로 유명하다. 혜선 씨가 심고 거둔 땅콩은 내가 이제껏 먹어본 땅콩 중에 가장 알이 굵고 고소하다. 한 접시 내준 것을 먹다보니 손을 못 놓겠다.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이가 땅에 심은 것들, 공부방에 심은 것들, 마을에 심은 것들, 고창군에 심은 것들, 사회에 심은 것들 모두 이렇게 알이 굵고 고소하리라고. 무엇보다 그이는 사람 마음에 따뜻함 하나 꼭꼭 심는 사람이다. 누구든 첫눈에 그이를 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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