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살 다음으로 62살이 제일 어려요"
        2007년 11월 07일 1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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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상조마을(조앙골), 가산마을, 오미마을, 죽산마을, 상북지마을, 석천리 마을을 지나 낭산면에 다다랐다. 지나는 동안 깃대를 묶어 놓을 수 있는 다리 난간이 나오는 곳마다 연둣빛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한미FTA 국회비준 결사반대’ 깃발이. 무엇을 반대하지 않고 그저 편안히 살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까?

    낮 3시 17분, 논에서는 추수가 한창이다. 대부분 60대 이상인 사람들이 논에 나와 있다. 비를 맞아 쓰러져 콤바인이 거둘 수 없는 것은 직접 낫으로 벤다고 한다. 쓰러진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아 논에서는 콤바인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볏짚이 썰어져 다시 논바닥 위에 떨어진다. 놔두면 그대로 거름이 된다. 콤바인 안에는 나락만 고스란히 모아져 나중에 논길에 세워진 곡물차에 그대로 부으면 된다. 추수하는 논 옆에는 비닐집이 쳐져 있고 그 안에 딸기가 자란다.

    “광식아!”

    저쪽에 있는 콤바인을 향해 한 사람이 외친다. 콤바인을 모는 이는 젊다. 콤바인이 이쪽으로 오자 주민들이 권영길 후보에게 “한번 타 보세요”라며 권한다. 권영길 후보는 광식 씨와 함께 콤바인에 올랐다. 이전에 순천에서도 한번 잡아본 일이라서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 함께 간 사람들이 논둑을 걸어 저만치 가 있는 동안 광식은 한 바퀴가 아니라 세 바퀴나 돈다.

       
     
     

    새참으로 술 한 잔 하셨는지 막걸리 냄새가 나는 올해 예순넷 자신 하영구 어르신은 속이 많이 상하나 보다.

    “이거 아무 소득이 없시유. 환장하요 참말로. 정부에서 직불제, 직불제 준다고 하지만은 응 그걸로 만족하들 못 합니다. 쌀값이 너무 싸요. 쌀값이 10년 전 가격으로 돌아갔어요. 나중에 계산해 보면 남는 게 없어요. 콤바인 값 나가지. 콤바인 값이 얼마 나가는지 알아요?

    나락 비는 거 200평 논에 콤바인 쓰는데 3만5천원. 나가 금방 물어봤는데 3만 5천원이랴. 모내기 전에 로타리 치는 게 3만원. 저 아래 논이 우리 논인데 저것이 두 마지기여. 두 마지기면 400평 아닙니까. 400평인데 저거 두 마지기면 벌써 7만원. 거기에 처음에 로타리 쳐야지, 전부 포함해 갖고 하여튼 간에 올해 내가 3만원 씩 로타리 다 계산을 마쳤습니다.

    근데 콤바인 저거 하려면 방금 물어보니까 기름값 오르고 그래서 5천원 올랐습디다. 근디 콤바인 값 제하고 로타리 값 제하고 이것저것 제하면 한 마지기에 200평 당 쌀 한, 쉽게 예를 들어서 한 마지기에 말하자면 한 마지기에…….”

    콤바인 소리 탓도 있고, 말씀하시다 힘이 빠지시는지 ‘한 마지기에’ 다음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셨다. 한 마지기에 최소 얼마는 나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을 게다. 농사가 기계화되어 허리 꺾고 하나하나 손이 다 가야 하는 일은 줄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덜 힘들어진 만치나 힘든 일은 여전히 있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농사짓기도 어려운 때가 되었다.

    “지금은 틀려요. 지금은 차원이 틀려요. 기름값 오르고 콤바인 값도 오르고. 어려워요. 나는 여기 본토박이에요. 원주민이죠. 우리 마을은 대부분 그래요. 농촌 살기가 어렵고 그러니까 그것을 권영길 후보께서 힘을 써달라는 것뿐이죠.”

    마을을 돌면서 느끼는 건 도시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늙었다는 것이다. 햇볕에 그을리고 몸으로 하는 일이라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대개 10년은 넘게 늙어 보인다. 속으로 짐작한 나이와 직접 들은 나이가 확 차이가 나 깜짝 놀란다.

    하지만 겉으로 놀란 걸 내색할 수는 없다. 말로도 얼굴 표정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도시는 농촌을 갉아먹으며 젊어지는가. 우리는 돈 주고 쌀만 사 먹는 게 아니라 땀 흘린 이들의 지나간 젊음과 생기도 함께 빼앗아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혹시 우리는 어느 한쪽을 희생 시켜 그것을 담보로 사는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마을 어르신들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나이 이야기를 나눈다.

    “광식이 총무 빼고는 이 마을에서 예순 둘이신 분이 나이가 제일 적어.”
    “내가 제일 막내여.”
    “이 형님이 예순 넷. 이장님이 70이 넘으셨고. 연세 그대로 얘기해.”

    30대 총무 빼고 제일 어리다는 예순 둘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난 이제 한창 때여.”
    “70, 80 다 되신 분은요?”
    “80되는 분이 한 열 명은 넘을 거여.”

    “그 분들이 다 농사를 지으시는 거지요?”
    “80대는 지금은 농사 못 짓지. 70대는 농사짓고.”
    “이장님은 농사지으니까.”

    예순 넷 자신 분이 다가와 말한다.
    “우리 후보님은 나보다도 더 젊은 것 같애. 올해 어떻게 되십니까?”
    “제일 막내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순 넷인데.”
    “그럼 내가 형이네요.”
    “아니, 텔레비에 나오는 것보다 엄청나게 젊어 보이시네.”
    한 차례 크게들 웃는다.

       
     
     

    “올해 나락은 다 베셨어요? 추수 다 했습니까?”
    “이제 거의 다 막바지…….”
    “해 보니까 어떻던가요?”
    “아 금년에 말도 못혀. 일교차가 심했기 때문에. 아니 뭐 나락과 쌀이 나오는 것이 말도 못 해요.”

    “정부에서는 보상 안 해주는가요?”
    권영길 후보가 묻는 말에 앞서 대답한 분이 웃어버린다. 농민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
    “하하하, 내가 맘대로 못허지.”
    “직불제 있잖여.”

    “생산량이 얼마나 줄었나요? 전라남도 쪽은 20%에서 30% 정도 줄었다고 하는데.”
    “작년에 우리 논 한 마지기에서 쌀 80키로 4개씩 나왔는데, 잘 허면 좀 넘기도 허고. 그런데 지금은 3개 아니면 3개 반.”
    “25% 정도 감소되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전남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네요 여기는.”
    “여기는요, 농사짓기는 진짜로 풍수가 좋고. 물도 좋고. 여기는 쌀이 쏟아지는 데에요.”
    “그나마 전라북도는 자연재해가 비껴가요. 그래서 전라복도라고 그래요. 전라남도나 다른 지역은 피해를 많이 봐도 여 전라북도는 많이 피해가는 편이에요.”
    민주노동당 도의원의 설명이다.

    “아, 전라복도.”
    “전라북도에서도 우리 익산 지역이 적당하지요.”
    “저 서해 쪽으로 가면 피해가 좀 있지요.”

    “원래 농사 지어가지고 먹고 살기도 어렵고 점점 어려워지는데 거기다가 한미FTA가 오면은 다 죽게 생겼거든요. 그래서 한미FTA 막아내야 한다는 거지요. 정부 간에는 협상이 다 이뤄져 사인도 해 체결되고 국회 비준만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아까 오다 보니까 저 다리에 ‘한미FTA 국회비준 결사반대’라는 깃발이 있더라고요.

    국회비준을 앞두고 11월 11일에 농민도 모이고 노점상도 모이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다 모여서 ‘이거 안 되겠다 한미FTA 비준 안 된다’, 한미FTA 오면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일하고 월급은 반밖에 못 받는 사람들 비정규직 천지가 되는데 한미FTA 오면 전부가 그렇게 되니까 노동자들도 그거 안 된다 해서 모여 백만 민중대회를 해서 세상을 한번 바꿔보자고, 서울에 모이자고 외치고 다닙니다. 전남에 가니까 70, 80대 노인들이 ‘맞다, 이번엔 바꾸자, 이번에 서울로 가겠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럼 한미FTA를 반대하겠다는 걸 공약에 낼 생각은 없습니까?”

    곁에 있던 도의원이 말한다.

    “이번에 공약으로 냈지요.”
    “아, 그래요. 하하하.”
    “첫번째 공약이에요.”
    “첫번째 공약. 제가 모르고 있었네요.”
    “농민들이 신명나게 살 수 있게 좀 만들어주세요.”

    나이드신 분들이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콤바인을 멈추고 온 농민회 총무 광식 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식 씨는 모자를 벗고 보니 앳돼 보이는데 벌써 서른다섯 살이다. 농사를 지은 게 11년째다. 스물네 살부터 지은 농사. 잠깐 도시에 나가 다른 일을 해 보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농사가 좋아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있었어요, 농사에. 어르신들 보면 안쓰럽죠. 연세 드셔서 일해 갖고 한 푼이라도 벌어서 도시에 있는 아들들 챙겨주려고 하는 거 보면 참 안타깝죠. 자기는 못 먹어도 자식은 먹여야 하니까요. 부모들은 다 같은 심정이니까요. 노인 양반한테 하는 소리가 이제 그만 하시라고, 그래도 도시에 나간 자식들이 아버지보다는 더 먹고 잘 쓰고 잘 사니께.”

    어떻게든 자식들은 힘들게 농사짓지 말게 하려고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도시로 공부하라고 내보낸 게 우리 부모세대이다. 광식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잘 못 됐시유. 그렇잖아요. 노인 양반들은 더 이상 시골에 관심이 없지유. 돌아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미래는 없지요. 안타깝지요. 미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노인 분들도 다 가시고 나면 농사는 누가 짓지요?”
    “정부에서 진다잖아요. 정부에서 다 알아서 한다잖아유.”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촌이 무너지고 나서 우리는 수입쌀을 배달해 먹으면서 내내 행복할 수 있을까. 식량주권을 잃고 다국적 기업에 좌우되는 삶을 살 때 그때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멈추었을 때 우리는 어찌 될까. 가을걷이가 끝난 논, 그 빛깔은 앞서 푸르렀던 때나 금빛이었을 때 못지않게 가슴을 파고든다.

    지는 해는 만지면 말랑말랑할 듯 하고 고단함도 머리아픔도 잠시 잊게 해준다. 답답할 때 눈 돌려 바라볼 들판과 그 들판이 시시때때로 만들어 내는 다 다른 빛깔들을 우리는 이제 잃어야 하는 것일까. 끝내 잊어버려야 하는 걸까. 뒷날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 헤매어야 하는 것일까.

    10월 26일 르뽀작가 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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