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를 뜨겁게 달구는 작가의 연애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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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03일 01: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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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는 벌써 신길을 지나 구로공단 근처까지 내려왔다. 남자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여자는 모텔이 아니어도 좋으니 여관에라도 들어가자고 했다. 남자는 구로공단 주택가 골목에 차를 세운 뒤 “그럼 여기서 찾아보자”고 했다.

    골목 사이로 몇 개의 여인숙 간판이 보였다. 조그마한 입간판 위로 ‘벌’ ‘장미’ ‘수도’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인숙에라도 들어갈까?” 여자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인숙? 거긴 여관보다도 후지잖아.” (<성탄특선>, p.105~106)

    크리스마스에 머물 곳이 없는 연인들은 도시를 미로처럼 헤맨다. 자신의 욕망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혼자만의 방’을 가질 수 없는 처지이므로 당연히 ‘함께 머물 방’도 없는 셈이다.

    지금-이곳 젊은이들의 가난은 이렇게 집이 아니라 방에서 시작한다. 단편 <성탄특선>의 두 연인이 서울의 그 많은 모텔과 여관에서 퇴짜를 맞는 동안 나는 마치 내가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추웠고 피로했고 짜증이 일었다.

       
     
     

    방 한 칸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춥고 피로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세상에 대한 비관이 극에 달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 구로공단의 두 연인은 너무나도 쉽게 갑정이입하게 만든다.

    연인들은 결국 여관보다 엄청 후진 여인숙에 든다. 여인숙의 방은 찌든 태를 숨기지 않았다. 누렇게 얼룩진 이불, 낯선 이의 음모와 머리카락, 녹슨 세면대, 신문지로 구멍을 메워 놓은 나무 문……. 결국 그들은 그날 밤 그곳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으며 울상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귀환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이곳 가난한 청춘들에게 허락된 ‘성탄특선’의 진짜 내용물일 것이다. 굴뚝 없는 곳에 산타는 들지 않는다. 성탄절의 가난한 선물을 가장 정확한 어휘로 구사한 이는 여자와 방을 나눠 쓰는 오빠다. 그가 ‘까만 봉다리’를 발음하는 순간 ‘성탄특선’의 정체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근데 우리 머리 위에 있던 선물은 왜 항상 까만 봉다리 속에 들어 있나, 나는 그게 참 이상했었어.”(p.114)

    한겨울 까만 봉다리에 담길 법한 것은, 산타는 선물하지 않는 것들, 이를 테면 군고구마나 호떡 종류가 아닐까? 취향이나 여가에 어울리는 섬세한 것들은 까만 봉다리와 어울리지 않으며, 산타가 그런 것들을 두고 간다면 그건 직무유기이거나 영역 침해다. 산타는 할 수 없는 것, 산타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마땅히 문학의 몫이어야 할 터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소설집 『침이 고인다』는 지금-이곳 젊은 작가의 몫을 가뿐히 수행하고 있다. 이번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반지하방이나 신림동 고시원 혹은 4인용 독서실처럼 까만 봉다리를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방에서 산다.

    그러한 방에서는 자유도 어깨를 펴지 못하지만 고독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방 한 칸만큼의 청춘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주인공들은 <성탄특선>의 연인들처럼 어딘가를 떠돈다. 그래서 『침이 고인다』는 방에 관한 이야기들이면서 미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맨 앞부분에 수록된 단편 <도도한 생활>은 그런 방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까지 ‘도도함’의 최정상 자리를 차지했던 피아노 때문이다. 서울의 반지하방에서 자취를 하게 된 자매는 피아노를 버릴 수 없었다.

    자매의 선택이기보다는 엄마의 의지였다. 피아노를 버린다는 것은 이 가족이 처한 계급적 위치를 용납해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게 김애란이 가난을 그려내는 방법이다. 작가는 피아노를 버려야만 하는 사태에 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게 당연한 피아노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심정에 대해서 쓴다.

    간신히 장식장 정도로나 쓰이게 될 이 ‘도도한 물건’은 자매가 누운 방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방바닥에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뉠 만한 자리밖에 없었다. 피아노 위로는 헤어드라이어와 라디오, 다리미 등 잡동사니가 올려졌다. 방 안은 무슨 중고 가게 같았다. …중략… 문득 나의 하늘은 당신의 천장보다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p.28)

    이 방에 든 이래 처음으로 주인집 몰래 ‘도’ 건반을 눌렀을 때 “도는 방 안에 갇힌 나방처럼 오래오래”(p.34) 날아다녔다. 하지만 레는 그럴 수 없었다. “한 음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느낌을 즐기려 눈을 감았”(p.34)지만, 주인집 식구들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쿵쿵쿵쿵 문을 두드려 그녀가 피아노를 쳤는지 확인했다.

    자매가 피아노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도도한 삶’의 비애를 견디며 산다.

    <도도한 삶>이 가난한 방에 대한 작품이라면 표제작 <침이 고인다>의 경우는 고독한 방에 대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여자가 후배를 동거인으로 삼은 것은 예정에는 없던 일이다. 처음에 후배는 하룻밤만 묵을 수 있느냐고 했다. 그날 밤 후배는 인삼껌 한 통을 손에 쥐어주더니 영영 나타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구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p.61)

    ‘침이 고여요’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절대적인 상처를 가진 존재 즉 ‘타인’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물론 이 동거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해피엔딩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 ‘삶의 공유 혹은 소통’이란 동영상 파일을 전송하고 다운받는 식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상처와 고독을 동정하거나 지켜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을 파일로 전송받아 저장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어서, 고독해지고 싶다. 푹신푹신한 고독감 속에 파묻혀 휴일이면 온종일 인터넷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아무렇게나 입은 채, 아무 때나 일어나, 아무거나 먹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가끔 손님이 오면 축제처럼 펑펑 와인을 따고 말이다.(p.77)

    결국 여자는 후배를 내보낸다. ‘아무 때나’와 ‘가끔’에 주목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아무 때나’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으로서만 유의미하다. 함께 축제를 즐기려면 타인은 가끔 오는 손님이어야 한다. ‘가끔’ 그 이상이 되면 푹신푹신한 고독감은 불안감과 불편함으로 일그러진다. 여자는 인터넷에서 드라마 파일을 전송받는 동안 후배가 남기고 간 인삼껌 한 조각을 씹는다.

    “입 안 가득 달콤 쌉싸름한 인삼껌 맛이 침과 함께 괴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괸다.”(p.80)

    이게 바로 타인이 사라진/결핍된 고독한 방의 풍경이다. 지금 여자의 방에는 한두 시간이면 전송을 완료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고독과 소통이 교차한다. 우리 세대 젊음이 용납할 수 있을 만한 고독과 소통의 용량이 그만큼인 것이다.

    가난한 방과 고독한 방에 대한 김애란의 이야기는 서글프고 또 담담하다. 그게 20대의 방 이야기인 탓에 더욱 그러하다. 방이 없고 이야기가 척박한 그들의 삶 어느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김애란의 소설은, 젊은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지상의 삶에 단단히 뿌리내릴 때 얻을 수 있는 수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런 이유로 읽는 동안만큼은 설렌다. 두 번째 소설집을 내놓은 이 젊은 작가로 인해 문단이 다시 한번 핑크빛으로 상기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연애의 주도권은 김애란이 쥔 듯 보인다. 상대를 한껏 달아오르게 하는 그의 연애 기술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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