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병목 지점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2007년 10월 30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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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엘리트층의 외연이 확대되고 비합법적 조직들도 제도권에 진입하였다. 비합법적 조직이었던 전교조 역시 99년 합법화된 이래 제도적 공간 내에서 일정한 현장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교육 부문에서의 진보적 성과를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조합원들은 학교 현장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교육부문에서도 민주화의 일정한 병목지점이 발견되며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전략을 모색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학교 밖에서 독재와 싸우면서 형성된 전교조의 참교육 정신은 반교육적 행태들을 압박하면서 나름대로의 조직과 문화를 구축해왔다. 학교 행정에서 전교조 교사들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을 수 없을 만큼의 지분을 확보하였고, 그들의 단결된 행동은 교육 당국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교조의 현재적 힘이 수용될 수 있는 최대 한계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전교조는 ‘지도적 집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반민족 반민주 비인간화 교육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복하지 못했고, 자신의 ‘유기적 지식인’을 동시적으로 형성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있다.

전교조는 대중을 조직하는 집단이어야 하는 바, 교사 대중을 비롯하여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는 합법화 이전의 전선에서 그대로 멈춰져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물러나 있다.

신임은 가입하지 않고 해직교사들은 부장되고

신임교사들은 전교조 가입에 소극적이며 해직교사 출신들은 각급 학교에서 부장직을 차지하며 행정 일선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선에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분회장 선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회비만 낼 뿐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다. 일부 교사들은 시시때때로 탈퇴를 고민하며 이반 현상이 점차 확산되거나 잠재되어 있다. 전교조 교사가 담임되면 좋아하던 학생과 학부모들의 믿음도 사라져가고 있다.

대중조직이란 것이 단순히 양적인 대중의 확장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대중주의’를 성립하기 위해서라면 전교조는 참교육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하며 주도적인 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조합원과 비조합원 간의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단 몇 시간만 관심을 기울여 관찰하면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조합원을 파악하기 힘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분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교착지점을 돌파하기 위해 전교조는 참교육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원숙한 전략들을 요청받고 있다. 조희연 교수의 “급진화 전략과 헤게모니 전략의 적절한 배합”에서 시사점을 제공받아, 주체와 주제의 재정립 과정에 적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주체의 상실은 운동 동력 자원의 소실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다. 현실적으로 조합원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점이 진보진영이 직면한 첫 번째 당면 과제이다. 한편으로는 전교조 사업에 일상적으로 반기를 드는 반동적인 조합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교조 집행부를 비롯한 ‘전투적’ 참교육 교사들이 있어 양 극단에 서 있다.

문제는 일반 조합원들의 향방이다. 극단의 반동적인 조합원을 제외하더라도 일반 조합원들이 집행부(집행부가 온건파라 하더라도)를 비롯한 ‘전투적’ 참교육 교사들과 심한 괴리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괴리감은 교사 간의 경계구분과 관련되어 있다. 학교 밖에서 오랜 기간 전투적으로 투쟁해온 해직교사 출신의 조합원들은 ‘반독재 민주화’ 틀에 따른 뚜렷한 전선 인식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나 현장에서 그러한 경계 구분은 상당 부분 모호해지고 있다.

또한 확실하고 강경한 피아구분을 해왔던 관례들은 일반 조합원들을 주눅들게 하여 결국 보수적 교육자들의 품에 안기게 방치함으로써 취약한 전교조의 기반이 더욱 위축되고 있다.

실제로 집행부의 지침이 하달되면 그에 따라 수동적으로 응하기는 하지만 적극성과 자발성은 크게 결여되어 있다. 연가투쟁의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고, 조퇴투쟁이 외면되며, 이제 서명운동조차 지겨워한다. 전에는 서명운동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자신이 없는 일반 교사들에게 나름대로 동참의 길을 열어주어 최소한의 동조를 유도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무슨 서명인지도 모르면서 대충 해준다.

서명도 모금도 귀찮아

각종 성금 모금은 의지를 갖고 내는 것이 아니라 분회비에서 기계적으로 각출하며 공조하는 분위기는 무르익지 못하고 있다. 일상적 대화는 집값 얘기, 자식 키우는 얘기, 문제 학생 얘기가 주류이며 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수준의 대화는 사라진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상명하달식 지침으로 조합원 대중들이 참교육을 실현할 주체가 되기를 희망한다면 전교조는 ‘지도적인 집단’이 되기 힘들 것이다.

주체의 상실 다음으로 중요한 과제는 전교조의 투쟁이 새로운 사회를 지도해 나갈 ‘우리의 주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99년 합법화 이래 각급 학교에서는 분회가 속속 창립되면서 조직을 구축하는 시기를 거쳤고, 그 이후로 몇 가지 주목받는 투쟁들이 있었다. 학생들의 정보 인권 인식을 신장시킨 네이스(NEIS) 반대 투쟁이 있었지만 이 투쟁은 정부의 행정 지침에 ‘대응’하는 수준의 투쟁이었다.

참교육을 위해 우리가 달성한 우리의 주제나 우리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투쟁은 국가의 정책에 대응하는 수준의 투쟁이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주제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제기한 이슈로 우리의 주제로 삼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리의 조직을 단속하고, 우리의 조직 외연을 넓혀 블록을 형성한 기억이 없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적 집단들이 전교조를 안티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준다. 물론 우리가 “하지 말자”가 아닌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많다. 교장선출제를 주장하고 법정 교원수 확보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성과급 반대투쟁 등 대응투쟁에 의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물론 우리의 주제로 제기한 투쟁 중에서 사립학교법 개정 투쟁이 있었지만, 사실 개정된 사립학교법이 기존의 법보다 변화된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승리한 투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정된 법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다. 다시 정치권에서 사립학교법을 후퇴시켜서도 아니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공립학교 교사들은 무관심했고 그 결과 투쟁의 성과들이 조직을 확장하고 재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다. 사립학교의 문제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것을 더 우려해야 한다.

한편 전교조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투쟁은 성과급 투쟁이다. 2001년 성과급 반납 투쟁 이래 이 투쟁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투쟁 역시 대응의 한계를 갖는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성과급 문제가 교직 사회의 균열을 일으키고 교사통제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 문제의식이 그토록 심각한 것이었다면 대중적으로 문제의식이 절정에 달했던 2001년에 완전히 마감했어야 했다.

합법화 이후 최초로 최대의 인원을 동원했던 여의도 밤샘 집회를 난 잊지 못한다. 그때 총파업을 선택해서라도 뿌리를 뽑았어야 했다. 성과급 투쟁이 그 해 마무리되었으면 그 승리의 축적을 기초로 전교조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지지부진한 성과급 투쟁

그러나 이후로 진척된 것 하나 없이 2007년까지 이어 오고 있다. 조합원들은 하나 둘씩 성과급에 수긍하고 있다. 교직원 회의에서 마이크 잡고 성과급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다가는 일반 교사들로부터 회의 시간만 길어진다고 불만을 듣고 면박을 받기 쉽다. 오히려 언제 성과급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 하기만 한다.

   
  ▲ 차등성과급제 폐지 등을 촉구하는 전교조 집회 모습.
 

전교조가 합법화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슈가 되고 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성과급 문제는 이제 현장 교사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성과급 문제는 우리의 주제가 되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총과 연대하여 성과급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과정은 단지 집행부의 전술상의 오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가 향후 노조를 가장 이기적인 집단으로 귀결시키는 정점에 놓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교조는 노동조합이라는 틀 안에 갇히게 되었다. 교사 대중을 종속적 계급 관계로 고착화시키는 틀을 부수려고 하다가 점차 학교와 노동조합이라는 틀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이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오기가 힘에 부친다.

바깥 세상의 중요 주제 중 하나가 교육불평등 문제이다. 교육불평등 해소를 우리의 주제로 삼고자 했으면 여러 교육불평등지수가 감지되고 있을 때 특목고 해체를 위해 끝까지 투쟁해야 옳았다.

그러나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특목고를 확대하려는 공약을 제시하는 지금의 순간까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이후 우리의 투쟁은 결국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에 대한 대응 투쟁에 그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조직은 또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최근에 현장에서 누구나 느끼듯이 학생들의 학습태도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런데 그들 학생의 대부분이 저소득층이다. 저소득층의 학부모들은 교육과 전망에 대한 기대감이 현저하게 낮아져 체념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학부모들은 학생이 지각과 결석을 해도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학생들은 또 학교에서 공부를 안 할 뿐만 아니라 예의없게 행동한다. 그런 학생들을 지켜보며 대부분의 교사들은 약자를 배려하는 교육에 눈을 뜰 수 없다.

이런 현실을 참교육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받아 안지 못하고 있다. 교사들은 주공아파트 단지가 아닌 고급 아파트 단지 인근의 학교를 선호하게 되었고, 학교 내에서도 그런 학생들을 선호한다.

사회 정의를 위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진취적으로 전진하기에는 일반 교사들의 교육불평등 문제에 대한 분노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교육불평등에 대한 교사, 학부모들의 분노는 증가되지 못하고 ‘침체’되고 있다.

여러 가지 구조적 제도적 현실들은 우리가 교육 불평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설 주체를 정립하는 데 불리하게 작동되고 있다. 사회는 계층간 수직적 스펙트럼이 가늘고 길게 늘어지면서 불평등을 해소할 동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교율불평등에 등돌린 교사들

사실 20대 80의 사회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저소득층 80%는 동일한 묶음이 아니라 결결이 잘게 나뉘어진 편린들이다. 교육열은 다른 한편으로 입시과정에서의 불평등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을 기초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특목고가 만연되어 있어 일반계고 학생 학부모들이 상당 부분 특목고로 편입되어 가고 일반계고 현실에서는 가난한 대중들이 체념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사 대중들은 자신의 자녀 교육을 위해 더 좋은 교육입지 조건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급진적인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특히 교사 대중의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농어촌 학교 살리기’라는 주제로 전국교사대회를 최초로 지방에서 개최하고, 공부방 지원을 확대하며 지하철에 광고를 게재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일반학교에 있는 교사 대중들이 교육불평등 문제를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해결하려 하지 못한다면 모든 노력들은 명분쌓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 두발자유화를 촉구하고 있는 학생들.
 

교사 대중의 일상은 교육불평등 문제로부터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다. 반면에 교사 대중에겐 매일 매일 학생들과 부딪치게 되는 갈등이 훨씬 심각한 현실적 주제이다.

교사와 학생들 간의 갈등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학생이 교사에게 쌍시옷의 욕을 하고 학부모들이 물리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특별히 심각해진 것은 10여 년 전부터로 이 기간은 전교조가 합법화된 시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전교조는 침묵했고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다. 일반 교사들이 실질적으로 모욕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며 힘겨워 했던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이제 이러한 일상은 심각한 교권침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교조는 학생들의 인권침해를 더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이렇게 전교조 내에서는 교권과 학생 인권이 단층되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전교조는 직접적으로 교사와 학생간의 대립되는 연계를 반대하며 교권을 다른 측면에서 제기한다.

전교조에게서 교권은 관리자들과의 대립각 속에 있다. 여기에 반독재 민주화 틀과 계급적 틀이 공존하고 있다. 교권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침해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리자에 대한 계급적 투쟁의 전선 위에 있다. 관리자들로부터 교권을 확보하여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해방시키는 것으로 교권과 학생인권이 연계되어 있을 뿐이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학생들의 도전 행위 자체가 교권을 침해하는 직접적인 연계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일종의 제로섬적 관계로 이 문제를 설정하고 있다. 한 학교에서 학생인권을 거론하며 두발제한에 반대하자 한 학생부장은 “학생에게 인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교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학생의 두발제한이 교사의 권리라는 것이다.

학생인권이냐 교권이냐

   
 
 

학생인권과 교권은 사실 이런 식으로 대립되고 있다. 교직원 회의에서 관리자는 교권이 추락하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동안 학생들에 대해 철저하게 지도하지 못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적절하게 지적했지만 그 예는 부적절한 것이었다. 두발제한 규정이 있는데 학생의 두발 문제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철저하게 지도하지 않는 교사들이 있는데, 이런 불철저한 지도가 굳어져서 오늘날 학생들이 교사에게 대들면서 쌍시옷 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교마다 학생 및 학부모들의 횡포들에 직면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조합원과 비조합원, 관리자와 평교사들은 한 순간에 패밀리로 만들어 버리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전교조가 공식적으로 일반 교사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다며 일부 조합원들은 탈퇴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학생 인권 침해를 덮어 두고 교사의 권위만을 불러내올 수는 없다. 과거의 강권적인 지도로 회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회귀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보수주의적 교권과는 다른 새로운 진보적 교권을 세워야 한다.

교권 논의를 교육당국 및 관리자와 대립각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확장시켜야 한다. 그 확장이 비록 보수주의자들의 교권과 만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진보적 교권이란 것은 먼저 교권이 학생인권과 대립각이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교사의 학생 교육활동에 대해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보호받는 것에 기초하면서 지금의 학교현장의 반인권사태를 돌파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의 인권 침해 사례로 가장 주목받는 학생들의 두발 제한을 전면적으로 자유화하고, 진정한 교육을 위한 목적(수업방해행위, 공공질서위반행위 등)이라면 철저한 벌점을 부과하여 징계할 수 있는 방법이 상층단위체서 합의하여 제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관리자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박 특히 학부모들의 횡포를 막는 역할을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수적 교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도 어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학생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리자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교사의 자율적 교육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헤게모니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략이, 교권침해에 대해 불만이 있는 일반 대다수 교사들을 포용하며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교를 더욱 민주적인 양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참교육 정신을 파기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자와의 대립각을 무디게 하자는 전략도 아니다.

전투적으로 참교육을 주장하면서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기존의 참교육 정신을 지나치게 내세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참교육의 뇌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다.

전교조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사들과 학생들 간의 대립각을 교사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어떻게 해소 정리하고 해결할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포용과 포섭이야말로 교사 대중을 한 단계 더 높은 급진화된 의식을 가지도록 할 수 있는 헤게모니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빅딜’ 전략

교사 대중의 학생관을 제 아무리 진보적 관점으로 변화시키려 해도 그것이 더 많은 지침과 학습으로 가능하지는 않다. 지금의 체제에 대한 ‘빅딜’ 형식의 방법을 통해 교사들의 나빠져 가는 학생관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학생의 인권 보호는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보수주의자들도 진보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반동의 반전은 항상 잠재되어 있으나 이는 새로운 학교 사회의 유지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급진화 단계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킴으로써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이 담임제의 폐지다. 학생에 대한 관리자와 통제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불필요한 업무를 양산하는 담임제를 폐지하는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교실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

담임제는 학생들의 인성지도와는 거리가 멀고 결국 교육의 본질과도 동떨어져 있다. 담임제를 폐지함으로써 교사는 교육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교육행정체계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며 자율적인 지도 역량을 안정적으로 발휘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교육을 위한 목적의 통제만 남겨 놓고 자율과 민주가 자리잡는 공간으로 학교 사회를 변화시킬 전략이 될 것이다. 이렇게 확보된 공간 속에서 진보적인 교육내용이 담보될 때, 비로소 학생들의 체질이 민주시민으로 변할 수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과 별개로 학교 현실이 척박한 경우에는 학생들에게 ‘이중의 뇌’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며, 학생들이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실질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전교조는 참교육의 이름 아래 정신과 조직이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 외연은 여전히 우리의 편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합법화 이전 보다 훨씬 큰 규모의 조직이 되었지만 조직의 신뢰는 그에 비례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화 이후 우리 스스로를 혁신하는 전략은 다시금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역사 속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닌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 힘을 창출하는 지도적인 집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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