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나의 정치적 소신을 접으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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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25일 07: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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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선거를 얼마 안 앞둔 지금, 이른바 ‘비판적 지지론’이 지식인들 일각에서 또 다시 제기되고 있다. 때가 되면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 막상 대하고 나면 여간 기분이 ‘꿀꿀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표 방지 이유로 사표 만들라는 역설

    ‘비판적 지지론’은 무엇보다 바로 나 자신의 정치적 소신이,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적 양심세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결의와 행동이 ‘공공성’과 ‘민중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판결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 공부하는 사람 치고 아이큐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안이라면 언제나 생각을 많이, 깊이 하는 사람이다.

    ‘비판적 지지론’은 결국 나의 숙고어린 결단을 ‘공공성’과 ‘민중의 이익’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원리주의적 발상에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는가. 비록 ‘물리적 강권’을 동원하지 않지만, 때로는 그보다 더 무서운 ‘도덕’에 기대어, 나와 내 이웃들이 누려야 할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자 함이 ‘비판적 지지론’에서 엿보이지 않는가.

       
      ▲비판적지지론이나 후보단일화론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을 억압하는 주장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소신들이 최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신들을 받아 안아 조직한 제반 정당들의 가치들이 예외 없이 정당한 것들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한 요건들을 부인하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운위하는가. ‘비판적 지지론’은 나의 정치적 소신을 나 스스로 사표화 하라는 요구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사표 방지’를 명분으로 삼으니 당혹스럽다.

    지난 20년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라

    ‘비판적 지지론’은 그 동안 매번 민주주의의 실현 또는 진전을 위해서라 말하였지만, 정작 민주주의는 ‘비판적 지지론’에 의해 지체되었고 억지되었다. ‘비판적 지지론’의 주창자들은 ‘한국민주주의의 발육부진’이 초래된 연유를 늘 자신들과 자신들이 지지한 정치집단 외부의 탓으로만 돌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보수적 형식과 내용으로 구현된 ‘한국민주주의’의 과거, 또 이나마 심층에서 균열이 가고 있는 ‘한국민주주의’의 현재는 바로 그 ‘비판적 지지론’의 관련 당사자들이 제도권 중앙정치에서 이렇게 저렇게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지역주의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제도권 내외를 막론하고 민주주의의 실현 및 진전을 이루고자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암초였다. 1987년 ‘비판적 지지론’이 우리에게 안긴 ‘과실’들은 무엇이었던가. 지역주의의 강화를 빼놓을 수 없다. 너무나도 중요한 사회-정치적 의제들을 몽땅 빨아들여버리는 소용돌이, 즉 지역주의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후 ‘비판적 지지론’은 재차, 재차 저력을 발휘하여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만드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우리에게, 특히 돈 없고 ‘빽’ 없고 게다가 착하기까지 한, 이 선량한 서민들 다수에게 안겨준 ‘열매’들은 무엇이었나.

    비정규직, 실업, 카드빚, 자살, 테러, 생활고 가중, 가족 이산, 농촌의 몰락, 치솟은 집값, 골프장, 핵 폐기장, 개발주의의 광풍, 기본적 결사권의 봉쇄 …. 소위 ‘정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정하기는커녕 그것이 가지는 최저선의 의미조차 허구화될 지경이다.

    나는 나의 정치적 소신을 접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접을 수가 없다. 2007년 오늘, 나에게 다시 ‘비판적 지지’를 권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궤적을 되돌아보라. 우리는 흔히 앞만 보며 앞을 향해 걷고 뛴다. 잘 해야 어쩌다 좌우를 살필까. 그러나 종종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가끔은 성찰하는 삶을 꾸려가자. 작금의 비판적 지지론자들은 남들에게 뭐라 훈계하기 이전에, 지난 20여 년간의 자신들을 냉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투명 공정한 절차는 ‘비판적 지지’ 알리바이일 뿐

    겉모습에 미혹되면 “‘비판적 지지론’이 아닌데 …” 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예컨대 김기원 교수는 여론조사라는 절차를,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27’은 정책토론회 및 후보단일화기구 구성이라는 절차들을 통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보-개혁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이루자고 제안하니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정신 차리고 상황을 판단해보면 알게 된다. 단일화론의 요지는 ‘범여권’ 외부의 후보들에게 아예 선거에 나올 생각 말라고, 그 지지자들에게 ‘범여권’ 후보를 찍으라고 강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기원 교수(사진=한겨레)
     

    김기원 교수는 내놓고 말하기를 민주노동당 표가 사표란다. 그냥 사표도 아니고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사표란다. 그에 의하면 민주노동당 표는 한나라당 표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이런 식의 논리는 민주노동당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통칭 ‘범여권’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세력은 어떤 사람들이든 정당을 만들어서도 대통령 후보를 내서도 안 된다. 왜? ‘사표 = 한나라당 표’를 다량 만들어낼 것이므로. 이재영 기획위원이 ‘조폭’에 비유했던가. 그 표현은 김기원 교수에게 딱 어울린다.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27’은 일견 좀 달라 보인다. 앞의 경우처럼 공공연함을 뽐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사표 = 한나라당 표’ 방지란 발상을 갖지 않고서야 그러한 모임을 만들어 행동에 나섰다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27명이나 되는 구성원들은 ‘범여권’과 동일화해도 좋을 성향 및 이력의 보유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나리오는 훤히 드러난다. 꼭 솔직담백한 진술을 들어야만 사태가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범여권’ 외부의 주자, 예컨대 민주노동당 후보는 이미 ‘의제27’의 선호 밖에 밀려나 있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만약 단일화 교섭에 응한다면, 그는 ‘의제27’이 짜놓은 절차적 틀 내에서 ‘범여권’ 후보 누군가에게 지지를 보내는 입장으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확실하다. 그들에게 진리는 지금 당장의 ‘수’가 가지는 힘이므로.

    만약 그가 단일화 제안을 거부하면 ‘의제27’은 ‘반한나라당 전선’의 의미를 최대한 도덕화 함으로써 민주노동당 후보의 위상을 깍아 내리는 한편, 민주노동당 지지자들로 하여금 ‘범여권’ 단일화 후보에게 표를 던지도록 선동할 것이다. 사표를 만들지 말라고, 한나라당 정권의 수립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수의 논리’에서 묻어나는 전체주의적 향취

    ‘비판적 지지론’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당선 가능성을 제일 앞세운다. “될 사람을 밀어주자!” 이런 식이다. 나, 전공이 ‘한국정치’이다. 박사학위도 받았다. 내가 아는 한,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지금의 ‘범여권’과 동일계보 선상에 있는 정당 후보가 이번처럼 이길 가능성이 낮았던 예가 없다(‘공개적 독재’ 시기를 제외하면).

    최종적으로 누가 나서든, ‘범여권’ 계보 내의 후보로서 그는 해방 이후 한국정치사상 당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일 것이다. 똑 까놓고 말하자. 당선 가능성, 정말 낮다. 그러니 그쪽 분들, 매일같이 ‘BBK사건’ 같은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나. 정말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일까. 그분들에겐 그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왜, 심지어 당선 가능성조차 거의 없는 편에 표를 주어야 하겠나. 민주노동당으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범여권’ 후보에게 ○표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정치적 소신을 사표로 만드는 길이다.

    나는 나의 한 표를, 민주노동당 또는 사회당, 아니면 양측이 연대하여 뽑은 한 후보에게 줄 것이다. 나는 두 정당들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민주노동당 후보 권영길에 대해서는. 그러나 나는 ‘정치’를 ‘집권 프로젝트’로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도권 정당들의 ‘선거정치’로 환원하여 이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정치적 활성화가 성장-개발주의를 넘어선 중요한 ‘소수적 의제들’ 다수를 제기하고 쟁점, 토론화 하는 하나의 매개 내지 장으로서 작용하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마구마구, 널리널리, 활력 있게. 그것이 나의 바램이다.

    그 어느 때보다 ‘범여권’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은 현 시점, 아예 이번 선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모를까 아닌 마당에, 이 때야 말로 나의 한 표를 공연히 죽이지 말고 좀 더 긴 안목의 정치비전 속에 던져 넣을 기회이다.

    ‘비판적 지지론’이 앞세우는 ‘수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거기에는 ‘다수’가 곧 진리라는 단정, 그리하여 ‘소수들’은 때면 때마다 자신들 고유의 관심사들과 이해요구들을 유보하고 억지함이 마땅하다는 당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의 논리’가 가지는 독단은 그 화자들이 ‘다수’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가히 폭력적인 실체로까지 전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동반하는데, 지금 당장 체감하는 ‘수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자면 ‘한나라당-이명박’의 집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거스를 수 없고 거슬러서도 안 되는 진리의 표현이 된다.

    타당성을 떠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권이 아니라 설득이라 말하겠지. “당신, 말이 너무 거칠어!” 그러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를 설득하려거든 그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주어야 한다. 최근 목도하는 ‘진보-개혁진영의 후보단일화론’은 내게 그 최소한의 믿음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프=SBS
     

    ‘공정하고 아름다운’ 경쟁 속에서 단일후보를 뽑자고 한다. 그런데 대상자들 가운데 이인제가 있다. 정동영이 있다. 이인제야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인물이다. 정동영 역시 절차적 공정성을 넉넉히 짓밟아주는 과정들을 거쳐 현재의 입지에 이른 사람이 아닌가. 한 마디로 그들은 이미 ‘추한’ 사람들이다.

    ‘의제27’은 단일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말하였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졸속”으로 만들어졌고 “이번 경선의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 점을 통렬히 지적”한다고. 그러나 ‘정동영-민주신당’은 민주주의 진전의 시점에서 함께 해야 할 사람들로 선정되었다. 그 관용의 근거는 무엇인가. 다만 나는 나의 이해력이 짧음을 안쓰러워해야 하는 것인가.

    후보단일화론은 창조한국당과 민주노동당이 어느 면에서 후보를 단일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 가능성의 논의는 무엇을 근거로 함인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일례로 창조한국당은 현재 노무현 정부가 강행하는 한․미FTA를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반한나라당’이란 외양만으로 그 분열지점의 해소가 실현될까?

    ‘진보진영’과의 단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사회당은 왜 빼버리는가. 후보단일화론이 ‘진보’라는 정치적 지향을 그저 주변적 고려사항으로 생각할 뿐, ‘수의 논리’에 충실한 보수적 발상임을 알려준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진보-개혁진영의 단일후보’를 촉구하는 사람들은 ‘범여권’과 통함이 있는 이들이다. ‘진보진영’의 논자들은 없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말해야 하는데, 짐짓 제3자적 관점의 제스처를 취한다. 지금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단일화론은 ‘범여권’의 기획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주요 논자들이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아카데미와 언론이라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로 여겨진다.

    최장집 교수의 지론을 되새김질 해보라

    나는 최장집 교수를 각별히 존경하거나 높이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최장집 교수의 평소 지론을 상기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을 법하다.

    왜냐하면 단일화론의 외양을 띤 현 시기 ‘비판적 지지론’의 논자들 상당수가 최장집 교수로부터 사사 받거나 최장집 교수를 사숙한, 또한 최장집 교수를 존경하는 분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는 늘 다음과 같은 논지를 학생들과 독자들에게 역설해왔다. 즉 ‘이데올로기로서의 통합을 내세우고 도덕화하기보다, 실재하는 차이들과 균열들, 갈등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제도화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실현과 진전에 부합한다.’ 지금 비판적 지지론자들은 소박한 ‘정당정치’의 관점에서 보아도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보다 지체, 퇴행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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