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크스 극복? 170년 전으로 퇴행”
    [비판과 모색] 김상봉 교수『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②
        2012년 05월 04일 04: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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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① 어떤 철학적 몽상에 관하여)

    4. 자본주의 극복인가 시장 예찬인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의 경영권 장악으로 주식회사가 만남의 공동체가 되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극복 없이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권을 갖게 되면, 기업은 잉여가치 착취를 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곳이 되며, 개별 기업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그대로 두되 기업 경영만 전환시키면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을 보는 김상봉 선생의 시각은 매우 독특하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장소”이다. 자유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당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작용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시장은 “내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수동성이 교환되는 장소”(73쪽)이기 때문에 자유가 생겨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결핍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시장은 나와 타자의 만남의 공간이자 자유 실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상봉 선생의 입장에서 시장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시장이 존재한다면 경쟁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기업은 퇴출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기업 생존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잉여를 아무렇게나 처분하지 않고 기업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62쪽)

    더 나아가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화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노동력을 판매하고 화폐를 통한 교환은 자생적 질서의 일부인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오로지 경영권뿐이다.

    김상봉 선생은 스스로의 입장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있는 어떤 독특함으로 분류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공산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길’(87쪽)이라고 평가한다.

     시장이 자유의 영역?

    기업 경영권을 소유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김상봉 선생이 ‘독창적’일지 몰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형적인 시장 사회주의 체제로서 이미 많은 논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시장 사회주의란 중국과 같은 현실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시장이라는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론적 조류는 매우 다양하다. 신고전파 이론가였던 왈라스와 랑게는 시장이 일반 균형 달성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계획경제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했고, 분석마르크스주의 로머는 시장의 경쟁이 사회주의 체제에게 역동성과 혁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장 사회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김상봉 선생처럼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이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지 시장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이뤄지는 곳이라서 시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자 자생적 질서의 공간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마두 하이예크이다. 하이예크는 『자유의 길』에서 시장이야말로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 자유의 근원적 공간이라고 했다. 가장 반동적인 철학자나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떠들지 사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시장을 자유와 연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김상봉 선생은 시장 사회주의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시장체계에서는 고정자본을 많이 투자한 기업(기술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이 생산한 잉여를 영유한다.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잉여노동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기업에게 부를 넘겨주지 않으려면 기업은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노동자가 경영하든 누가 경영하든 시장경쟁은 기업으로 하여금 축적을 강제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했다.

    김상봉식 독창성 또는 몽상

    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되면 축적을 위한 축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파산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며, 시장의 변동은 경기 순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축적을 위한 축적은 이윤율의 저하를 야기하고, 경제의 불안정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망하면 경영의 주체였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로 전락한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작용한다. 거기다가 경제학의 기초만 알아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적 생산과 사회적 실현의 모순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는 경영만 노동자가할 뿐이지 자본주의와 거의 같게 움직인다.

    대부분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두고 그들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로머는 중앙계획기구가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여 독점이나 부의 편중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로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쟁점이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를 두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상봉 선생은 자신이 시장사회주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사회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시장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자각도 없다. 문헌 리뷰는 아예 없다. 기초적인 문헌 조사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몽상’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김상봉식 독창성의 핵심이다.

    5. 이행의 길인가 과거로의 퇴행인가? 

    사회변화는 변혁 주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변혁운동 진영은 새로운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도 고민해야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상봉 선생도 자신이 구상한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민주적 과정을 통해 사장을 선출하고, 노동자가 기업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업 속에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를린 필과 같은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를 선거로 선출하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듯이, 기업이라고 공화정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 두개의 법률 조항”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

    이 두 개가 법조항을 넣음으로써 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을 회사의 노예에서 회사의 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308쪽) 남은 일은 입법투쟁이다. 노동자 경영권을 법제화함으로써 노동자를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김상봉 선생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이행전략은 말 그대로 의회주의다. 노동자들의 예속을 반대하는 좌파들이 의회의 다수파를 장악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부여하는 법률 두 조항을 입법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자주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계급성 무시

    김상봉 선생에게 있어 국가 그 자체는 중립적인 존재이며, 공화정의 구현체이다. 그에게 있어 국가의 계급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민들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민주적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상을 법제화할 수 있다. 문제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다수 대중들이 좌파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입법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이행 전략이다. 사회체제가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면 모든 활동가들의 우울증도 단번에 날려 버리겠다. 체제변화가 이렇게 쉬운데 고민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의회를 통한 이행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의회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의회권력은 부르주아 권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의회를 장악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의회과정 자체가 부르주아의 소유권/경영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절에서 나는 부르주아의 소유권은 경영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결코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의회를 통해 기업 경영권을 공격하게 된다면, 부르주아들은 의회를 해산해서라도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파괴시켜 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성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이해는 조잡하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들이 대학총장을 선출하거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서 기업도 종업원들이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음악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106쪽) 교향악단 단원이 지휘자의 노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운영체제와 대학이나 교향악단의 운영이 동일한 원리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는 이것이 대단한 독창적인 발견처럼 쓰고 있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그러나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업과 대학, 사장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의 관계를 잘 몰라서 사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경제적 장치와 국가권력, 특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작동을 구별하여 분석했다.

    경제가 잉여노동이 착취되는 체제의 토대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체제의 재생산을 담당한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원리와 경제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경제는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를 통해 구성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참여와 자율성이라는 외피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가 시민사회 내에서는 강제보다 헤게모니가 주요하게 작동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헤게모니는 근본적으로 강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윤리적 동의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는 참여와 자율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경제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그것이 사적으로 소유된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 장치이지 경제적 장치가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이 두 곳에서 대표가 자율적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들의 계급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기업 조직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운영을 수용하지 않는다. 대학교와 기업을 동일한 지반 위에 놓고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다른 성격의 것임을 무시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경제의 작동원리와 문화의 작동원리를 다르게 분석한 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만의 주장은 아니다. 뒤르켐이나 탈코트 파슨즈와 같은 주류 사회학자도 사회를 구별하여 기능을 분석했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중도좌파 사회학자도 사회체제를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는 이익의 논리가, 행정은 권력의 논리가,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사회작동 원리 차이 무시

    부르주아 사회체제를 이렇게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는 비록 하나의 구성체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유한 작용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상식 수준에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작동원리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케스트라와 기업을 동일한 수준에서 논한다면 과학이 될 수가 없다.

    김상봉 선생의 ‘참으로 순박한 이행전략’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 로버트 오웬이나 생시몽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에게 사회주의 장점을 잘 보여주면, 누구나 사회주의가 더 우수한 체제인 것을 인식하고 그 과정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관계 내에서 계급투쟁을 무시했으며, 근원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는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언젠가 홉스봄은 ‘맑스, 엥겔스와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라는 논문에서 이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를 구별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적어도 두 부분에서 그 이전의 사회주의와 다른 질적 진보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경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대해 무지하다. 그의 정치적 이행전략은 유토피아주의자들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 스스로 새로운 사회변화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프로그램들은 마르크스주의에 한참 미달하는 조잡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는 시장경제의 고유한 모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동일한 수준에서 분석하고, 이행을 “단 두 개의 법률 조항”으로 대체한다. 그 스스로는 마르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논쟁의 수준을 170년 전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는 느낌이다.

    6. 메타과학으로서의 철학?

    어떤 주장이 독창성을 지니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쟁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논의들을 완전히 섭렵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문헌 리뷰이다.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쟁점은 무엇이고, 현대적인 논의가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김상봉 선생은 이 책에서, 책의 부제도 알려주고 있듯이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를 뒤집는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논하면서도 칸트를 언급하고(124쪽), 생물학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칸트를 논하며(267쪽), 소유의 의미를 심오하게 분석한 것도 헤겔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철학으로 환원하고, 철학적 논리 속에서 비판과 대안을 구성한다. 과학에 대한 그의 편견은 놀랍다. 그는 생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물학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려 할 뿐, 생명현상 또는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과연 어떤 생물학 저작을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몇몇 유명한 진화생물학의 저작들만 보아도 생명현상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탁월한 대중적 과학 저작들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이들 대부분의 저작들은 생명체를 통일된 원리로 파악한다.

    심지어 사회생물학은 생명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적 문제마저 생물학의 논리로 설명한다. 윌슨의 『통섭』은 이런 부류들 중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대변한다. 나는 물론 윌슨류의 메타생물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이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억측을 넘어 지적 편견일 뿐이다.

    억측을 넘은 지적 편견

    그는 철학을 메타 과학의 지위에 올려놓고 다른 과학을 재단한다. 철학이 경제학보다도 경제에 대해 더 잘 설명하며, 생물학보다도 생물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알튀세르가 『과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서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과학을 통제하고 과학 위해 군림하는 철학! 경제도, 정치도, 생물학도 철학으로 환원하여 재단하는 이런 지적 폭력을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서로주체성이 실현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철학의 타자인 과학을 만나지 않고 있다. 그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어도 이런 이상한 저작을 발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에 매몰된 존재, 홀로 주체성으로 고립된 존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만남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철학자가 철학의 자궁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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