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요구 부응하는 '경제적 민중주의'를
        2007년 10월 22일 04: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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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대안이라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안적 정책의 콘텐츠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가능케 하고 제도권에 강제, 위협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이다. 대중이 급진화된다면 대중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많은 정책들은 현실적 대안이 된다.

    대안의 두 가지 측면

    강준만이 십수 년 전에 주장했던 ‘서울대 폐지’는 대안이 될 수도 있고 대안이 안 될 수도 있다. 만일 ‘서울대 망국론’을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공유한다면 서울대 폐지는 교육 문제 해결의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직화된 사회운동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대중들이 새로운 분노와 새로운 급진적 요구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1961년 이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고 대중들은 생각했지만 많은 학생, 노동자, 기독교인, 언론인들이 20여 년도 넘게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중들도 개발독재적 근대화의 파괴적 결과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강준만이 지적하듯이 “동원정치의 가장 강력한 주체라 할 노동운동 …… 국민적, 아니 민중의 신뢰를 받고 있는가?”라고 물을 지점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방도는 없다. 우리가 기댈 언덕은 그것 이외에는 없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이 중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매서울 정도로 아픈 성찰’을 수행하면서 새로운 헌신과 투쟁을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필자는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 위기론’에 동의하면서도 최장집처럼 ‘사회운동을 추동력으로 하는 진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최장집이 이야기하는 바대로 참여정부의 실패는 비정규직 등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제도정치 내로 수렴하고 그것에 대한 해법을 제도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실현하지 못한 데에 중요한 한 요인이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제도정치의 다수파를 구성하는 보수적 정당과 중도자유주의 정당의 구도하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해법을 합의하기에는 전반적인 계급적, 사회적 지형(地形)의 한계가 존재한다. 더욱 급진화된 대중주체, 제도정치가 비정규직 해법을 내놓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힘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근본적인 구조적 해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찰적 자기 전환에 실패한 중도자유주의적 정치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상황 속에서 전환의 절박성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눈’ 혹은 ‘국민경제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눈’으로 지구화를 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급속히 경도되었다.

    신자유주의적 파고를 성찰하면서 반독재 민주정부 주체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개혁주의’에서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의 전환, 혹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사회적 자유주의’로의 전환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당의 하나인 통합신당 내부에서도 신당의 지향을 둘러싸고 두 가지 방향이 각축하고 있다. 하나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경도된 중도자유주의적 정책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급진화된 ‘사회적 자유주의’적 정책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원희룡 의원이 서울대 폐지론을 이야기하고 박근혜가 무료 보육을 이야기하고 이명박이 신혼부부의 주거보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에서 참여정부는 주체적인 측면에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전향적인 정책을 구사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했고 지금도 ‘신보수적’ 방향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중도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지지기반이 몰락한 것의 핵심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급진화 전략과 경계횡단 전략의 모순

    필자는 대중의 급진화를 이야기하고 그 맥락에서 대중의 새로운 분노와 급진화된 인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강준만이 예리하게 지적한 필자의 모순 지점이자 딜레마 지점에 도달한다.

    필자에게 있어서 중장기적인 기본 관점은 대중의 급진화 혹은 사회의 급진화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목표를 위한 다양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편에서는 헤게모니 전략과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이야기한다. 전자는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계를 횡단’하는 보다 적극적인 포용 전략, 포섭 전략, 연대 전략을 의미하고, 후자는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보다 급진적으로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과 전략을 구사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필자는 ‘경제적 민중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경제적 민중주의는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통해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 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다 ― 급진적 정책을 강도 높게 펴거나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준만의 참여정부 분석과 필자의 시각이 충돌한다. 강준만은 “분노・위협의 동원정치는 노 정권 내부에서 과잉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라고 말하는데, 노 정권의 민중주의는 강준만의 표현을 빌리면 ‘엉터리 포퓰리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미 FTA에서 보는 것처럼 친시장적인 개방 정책을 아무런 사회경제적 고려 없이 ‘전투적으로’ 밀어붙였던 것이 참여정부였다. 필자는 사회경제적 급진적 의제들을 ―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 ‘전투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출현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진보적 민중주의에 비해 헤게모니 전략은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의 맥락에서 볼 때 헤게모니는 한 정치적・사회적 세력이 자신들의 제도적・조직적 동원력이나 현실적 투쟁력을 넘어서서 여타 사회 집단이나 세력이나 대중들에게 갖는 영향력이나 선도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독재 세력과 싸운 반독재 세력이 스스로 집권 세력이 되었을 때 혹은 제도권 세력이 되었을 때 독재 세력에 비해서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서 폭넓은 영향력과 선도성을 가졌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해볼 수 있다.

    대중의 급진화 혹은 사회의 급진화를 주장하는 것과 진보적 민중주의는 같은 방향의 실천일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게모니 전략은 정반대의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급진화 테제와 긴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웃사이더-경계횡단자로서의 강준만

    필자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 에너지』나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 말죽거리에서 타워팰리스까지』를 쓸 때의 강준만과 안티조선운동의 전사(戰士) 강준만의 긴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후자에는 타방(他方)과 적대하는 강준만이 존재한다고 하면, 전자에는 타방의 경계에까지 자신의 지적 영향력과 분석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강준만이 존재한다.

    이제 학문적 세계에서 큰 거목처럼 존재하는 강준만이 ‘아웃사이더’적 전사로만 갇혀 있어서도 안 된다. 실제 강준만은 정당하게 그러한 경계를 넘는 ‘경계횡단자’로서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교착 지점, 혹은 병목 지점을 돌파하기 위해선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과제를 누군가가 수행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필자는 급진화 전략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필자는 강준만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급진화 전략과 헤게모니 전략이 갖는 긴장을 인정한다. 헤게모니 전략과 경계횡단 전략은 포용적이고 타협적이고 개방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는 ‘머리 박고 싸우는 전투적’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대중의 급진화를 요구하는 전략이나 그 하위 전략으로서의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은 보수와의 차별성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대중에게 한 단계 높은 급진적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도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운동의 역사를 보게 되면 한편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명확화하는 전략(일종의 ‘급진화 전략’)과 반대로 통일전선 등 다른 집단과 결합하고 연대하는 전략(일종의 ‘대중화 전략’) 사이에서 동요하여 왔다.

    헤게모니 전략의 세 가지 차원

    필자의 여타의 논의 속에서는 헤게모니 전략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상이하게 사용되고 있다. 먼저 대중의 급진화 전략 및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과 헤게모니 전략의 관계에서 전자를 현재의 급진적인 비제도권적 운동에 적용하고 후자를 제도권에 진입한 과거의 반독재운동 세력에게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헤게모니적 자세, 혹은 더욱 단순화하면 더욱 원숙한 태도와 전략, 혹은 경계를 횡단하여 더 많은 중간지대의 사람들을 포섭해내는 태도와 전략은 제도권에 진입했거나 합법화 이후 제도적 공간 내에서 일정하게 현장기반을 확보한 모든 사회운동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교조처럼 이미 개별 학교 현장에서 ‘전투적 소수자 집단’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다수자적 위치’가 되었거나 최소한 ‘비토권’을 갖는 집단이 된 경우 한편에서는 더 높은 과제를 위한 ‘전투적’ 태도와 전략을 채택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더욱 원숙한 일상적 사업태도와 전략을 요구받게 된다.

    지역 및 풀뿌리 수준에서의 경계횡단

    둘째 이러한 경계횡단과 헤게모니 전략은 무엇보다도 지역 및 풀뿌리 수준의 운동에 적용될 수 있다.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데 있어 최대의 병목 지점은 중앙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의 대중적 기반은 취약하며, 지역 및 풀뿌리 수준에서의 대중들은 여전히 많은 생활세계 영역에서 보수적 헤게모니하에 존재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그 예로 빈번하게 인용하는 것인데, 대전의 대표적인 진보적 여성단체 회원이 150명에서 지금 1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새마을부녀회는 그 기반을 상실하지 않고 2만여 명의 회원을 여전히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 및 풀뿌리 수준에서의 진보적 운동은 자신의 급진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높은 수준의 요구를 제기하고 추동하는 방식보다는, 낮은 수준에서 보수적 대중의 삶과 함께하면서 그 속에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가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강준만과 조희연이 합의하는 신영복의 경계횡단

    셋째, 그러나 이러한 헤게모니 전략은 단순히 제도권 진입 세력이나 지역 수준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세력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럴 때 대중의 급진화 전략 및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과 헤게모니 전략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할 것이 된다.

    강준만과 필자는 모두 신영복의 경우를 주목했다. 신영복의 글과 서예는 이미 반독재 인사들 혹은 운동공동체 등 진보의 협애한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어 폭넓은 울림과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문제는 강준만이 지적하는 대로, 이러한 헤게모니 전략은 포용과 타협을 요구하고 상대방의 장점도 인정하는 공존적, 다원적 인식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고 이는 필자가 이야기하는 대중의 급진화 전략과 긴장을 가질 수 있다. 이 긴장에 대해서 필자가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전략적 실천 속에서 결합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의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위한 병목 지점을 돌파하기 위해선 분명 대중의 급진화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헌신, 실천이 더욱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즉 대중의 급진화 전략이 현 교착 국면에서 더욱 중심적인 지위를 가지며 헤게모니 전략이 보완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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