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영길에 대한 ‘고별투표’를 막아야 한다
        2007년 10월 22일 1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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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없는 정치판, 이명박이 아닌 정권교체가 대안

    정말 재미없는 대선판이다. 지난 추석밥상에는 대선 주자는커녕 정치 자체가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추석이라는 대목에 정치가 술 안주조차도 되지 못한 것이다. 전례 없이 고요한 대선 정국이지만 물밑 민심의 흐름은 엿볼 수 있다.

    압도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의 ‘하자(瑕疵)’는 정권교체에 대한 ‘신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50% 이상의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명박이 아니라 정권교체라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이 흐름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범한나라당의 대선주자급 인사들이다. 박근혜는 물론 이회창, 이수성 등이 언제든지 출격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87년 대통령 선거에서처럼, 그리고 96년 대선에서처럼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세력들이 적절분열함으로써 여권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수 있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당선가능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그와 같은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한국정치이지만 여전히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여권인 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가 정동영으로 결정되었다. 사분오열된 여권의 표가 다시 모이면서 지지율을 상승시켰지만 여전히 이명박 후보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문국현과 민주노동당, 사회당 등 모든 표가 온전히 산술적으로 모아진다 하더라도 힘이 부친다. 통합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전세를 역전시킬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상대는 ‘하자’가 많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과거의 독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상대로 단일한 전선을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명박 반대가 시대정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권자를 반분해왔던 인위적 ‘통합’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여권의 통합 논리는 목적과 수단의 전치

    따라서 범여권이 맹목적 통합논리로 통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현명한 유권자들은 목적 전치 속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여행을 떠남으로써 행복을 찾을 것이다.

    이명박은 대안인가? 썩 내키지는 않아도 다른 대안이 없는 한 다수의 국민들이 그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명박이 우리의 미래인가? 이명박은 주요한 선택지일수는 있어도 미래는 아니다.

    이명박이 그리고 있는 주택, 경제발전, 교육, 환경, 조세 그 어느 것도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적자생존, 유전무죄 무전유죄, 입시지옥, 부익부 빈익빈, 환경재앙, 재벌상속, 아파트값 상승 등 이명박이 그리고 있는 미래가 우리 국민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불길함은 유권자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은 바로 지금 정권교체의 대안이자 선택지이지 내일은 대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이와 같은 한계는 많은 정치세력들이 바로 지금 대선이 아니라 바로 내일의 총선과 미래를 준비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문국현이다. 현재의 정치구도가 지속되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때 다수의 유권자들이 느낄 ‘불길함’을 보듬어줄 유력한 세력은 문국현과 창조한국당 세력이다.

    그 외에도 박근혜, 이회창, 이수성 등이 당장에 이명박의 낙마를 기대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총선이라는 미래를 노리고 있다. 범여권의 수많은 대선후보의 등장이 미래보다는 현실을 겨냥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 등장한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겨냥하고 있다. 현실에서 크게 와 닿지 않는 문국현이지만 미래, 즉 이명박 시대에서의 문국현이라면 다시 한 번 재고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권후보에 대한 ‘고별투표’와 민노당에 대한 ‘청산투표’

    2004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즉, 지금 세상을 바꾸려는 표가 아니라 미래의 세상을 바꾸려는 표였다. 2002년 대선에서도 이와 동일했으나 2004년 총선과 차이가 있다면 현재를 보다 선호했다는 것이다. 즉, 현재에 대한 투자는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나타났으며 미래에 대한 투자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즉, 빚 청산이 아니라 빚을 쌓아두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저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전략은 이에 기초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은 민주노동당의 과거와 암울한 현실에 기초한 동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권영길 의원이 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스스로 주장했듯이 당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 그리고 ‘과거의 빚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에 다수의 지지층이 동의해 2003년 대선보다 높은 7% 내외의 득표율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지자들이 미래를 위해 어렵게 마련해준 종자돈을 홀라당 까먹는, 즉 어렵게 뿌린 씨앗을 열매가 채 열리기도 전에 땔감으로 써 버리는 호구지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요구하는 표는 더 이상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당장에 당이 먹고살기 위한 표, 당장에 자신을 선출직 공직자, 당직자로 만들 수 있는 표를 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권영길 후보에 대한 ‘고별투표’이자 민주노동당에 진 빚을 청산하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가 민주화에 대한 빚을 청산하는 계기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판 ‘청산투표’일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는 현실에 찌든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다른 세력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무능하지만 부지런한 구시대적 운동 낭인들

    민주노동당을 뒷받침했던 ‘사회운동’의 쇠락과 인민들의 이해관계와는 하등 상관없는 정파중심의 재생산구조는 진보정당에 대한 ‘청산투표’의 가장 중요한 주범이다. 무능하지만 부지런한 구시대적 운동낭인들이 정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당으로 지속적으로 충원(구제)되었고, 정파의 유력 정치인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이와 같은 메카니즘이 붕괴될 경우 정파의 유력 정치인들은 운동낭인에서 정치낭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으며, 구시대적 운동세력들은 유력한 물질적 근거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한국 정치를 좀먹었던 소위 ‘3김 정치’처럼 유력 정파의 수장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당내정치를 통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정파와 당의 혼돈, 정파 운동과 당 운동의 혼동 속에서 당의 수액으로 자신의 생존과 지위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 명단은 노회찬, 심상정을 제외하고는 당내용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국민들이 ‘진보’라고 할 때 떠오를 수 있는 인사들의 이름을 단 한 명도 올리지 못한 것은 무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무성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선 때부터 예약됐던 인사들이 다시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선거대책본부의 전부라는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게임을 하다보면 오로지 자기가 앉을 자리만 보이기 마련이다. 일단 게임이 진행되면 자리를 점지한 후 땡 하는 소리와 동시에 돌진해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누가 자리를 차지했고 누가 탈락했는가 하는 것은 자신이 일단 자리를 차지한 후의 일이다.

    민주노동당의 자리싸움은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차기 총선에서의 비례대표 자리도 이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당내용 인사들이 독차지할 것이다. 최소한 국민들이 알만한 진보인사 한 명 또는 상징적 인물 단 한 사람이라도 비례대표 명단에 넣어주는 성의와 예의를 바라기에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의석수는 너무 적고, 민주노동당의 민주주의는 지독하게 형식적이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지도부가 당 위기 누적시켜

    당 지도부는 정치인이다. 물론 운동가이자 정치인일수도 있지만 순수한 운동가는 아니다. 따라서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거나, ‘명분’이 올바르면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과는 달리 당 지도부는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적 책임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떠한 정치적 결과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묻는 것이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지도자의 교체로 나타나는 정치적 책임은 지도자가 책임을 지거나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조직의 책임을 경감 또는 면해준다. 정치적 책임의 방법이나 수위는 구성원, 대중, 여론의 요구와 기대의 수준에 따라 상이하고 우선 지도자 개인이나 조직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진다.

    하지만 책임의 정도가 요구와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지도자에 대한 탄핵이나 소환과 같이 지도자의 지위를 강제적으로 박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지철회, 탈퇴와 후원의 중단 등과 같이 조직에 대해서도 제재 또는 불이익을 줌으로써 책임을 묻는다.

    즉 정치적 결과에 대해 지도자가 자유로운 만큼 조직은 책임으로부터 직접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 회계문제, 선거결과, 당비납부 당원비율 하락, 근로기준법위반 등에 대해 어떠한 지도부에게 명확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당 대의원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그렇게 결정했고 예상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방기하는 동한 지지율 하락과 당 후보에 대한 낮은 지지율, 저조한 후원금 모금실적과 당비 납부 당원비율의 하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노동당은 민중들로부터 직접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게 필요한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

    이번 대선에서 민중들이 당을 선택할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등 암울한 현실과 미래가 민주노동당을 선택해야만 하는 필요충분조건인가? 그렇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민중들에게 자신들이 영원한 응석받이 될 것을 강요할 권리도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밖에 없는 진보정당에 대한 민중들의 지나친 애정은 당에게 ‘버릇 나쁜’을 만들어줬다. 예를 들면 특별 당비를 독촉하면서 회계 투명성에 대한 당원들의 요구쯤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책임질 결정은 아예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 노동자 정당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상근자 노조에 대한 태도에 시민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동자 정당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과 노조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외계인적 태도를 보이고, 더 나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민중들에게 손을 벌리는, 당과 무책임한 지도부, 그리고 광신도 집단과 비슷한 정파 구성원들을 양산했다.

    이와 같은 상태로 대선을 ‘일단’ 치르고 나면 무책임한 지도부들과 정파들은 비례대표 의원이 되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둥글게 둥글게 게임에 몰두하고, 그 책임은 다시 민주노동당에게 전가된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자민련으로 전락하는 대가로 그들만의 정파 수장들은 국회의원 ‘나리’가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은 당이 민중들을 협박하는 것도, 민중들에게 읍소하는 것도 아닌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쇄신을 통해 다시 한 번 대안세력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 시작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으로 정파독점, 정파할당에 의해 채워진 자리를 비우는 것과 당 선거 지도부가 선거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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