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당에 노조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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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9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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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의원을 결의해서 한표를 행사하는 등의 기본적인 일도 못하는 것에 항상 죄책감을 느끼고 있긴 했었지만, <레디앙>을 통해 이번 임시당대회에서 벌어진 촌극을 접하게 되고 나서는 얼마간 밤에 잠이 안올정도의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과연 우리의 진보정당이 ‘새로운 좌파정당’ 이라고 자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음아픈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고민의 답은 명백하다. ‘암울 그 자체’

    임시당대회의 안건 중에는 단협의 후속조치로 교섭권과 체결권을 대표에게 인정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박봉에, 아니 만성적인 임금체불에 시달리는 배고픈, 그야말로 영웅적인(참으로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다양한 부문에서의 당 상근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조… 무슨 여러가지 생각이 필요할까. 그저 상식으로 접근해도 두말할 필요도 없는 당의 최우선, 기본적 과제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사랑하는 좌파정당에서는 나의 상식은 상식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상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관을 멋대로 객관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나의 상식 운운 자체가 이미 ‘개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당대회에서는 누구누구가 위의 안건을 부결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횡행하고, 또 누구누구가 수정안을 제출할 것이라는 등의 살풍경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던 모양이다. 다시 한번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은 사민주의와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것을 추구하는 제3세대의 좌파정당이 맞기는 한것인가.

    운동하는 사람의 헌신과 봉사를 운운하는 사람들과는 그닥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운동이라는 것은 사회의 변혁이라는 궁극 목표를 두고 나아가는 과정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삶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써의 자신의 ‘해방’ 같은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다분히 종교적 ‘열정’에 의한 믿음과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아닐까. 지켜내면서 온갖 고통을 견디고 아름답게 산화하는 순교야말로 최고 형태의 운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운동의 목표가 그 어느 날이 도래하여, 메시아가 강림해서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고나서도 또다시 발생할 수많은 문제를 고쳐가며 인간해방의 길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쉽게 순교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머나먼 길을 가는 여행자와 같이 수많은 준비를 해야하고, 자신을 돌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완주할 수 있을만큼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책임있는 혁명가의 자세는 아닐는지.

    오히려 ‘좌파’로서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은, 소위 ‘극좌파’임을 자임하는 어떤 정치세력의 기관지 발행인이라는 분이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상근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파업권도 인정할 것인가’….

    트로츠키는 한때 노동자국가에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했던 일이 있다. 노동자국가와 노동조합이 개념에 있어서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동자국가의 운영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면 노동자국가가 노동자의 의사와는 배치되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논리적 귀결이 도출되게 된다. 혁명 초기의 소비에트연방에서 이러한 결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가는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후 트로츠키는 자신의 그러한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이 과거에 내세웠던 잘못된 견해를 정정했고, 잘못을 인정했다. 재미있게도 나는 수년 전 이러한 내용을 IS의 이론가인 토니 클리프의 책을 통해 접했었다.

    트로츠키가 견해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거대한 관료집단이라는 괴물에 의해 움직이던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과연 그 국가를 노동자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독재를 프롤레타리아독재라고 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

    ‘노동자 국가’라는 허상을 뒤집어쓰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국가가 노동자의 독재로 움직이는 국가일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민주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한 트로츠키주의자 분파는 노동당 안에서 상근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리고는 무려 ‘파업권도 인정할 것인가’를 물어오신다!

    노동당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노동자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장엄한 결론에서 도출되는 원인인 것일까? 인간의 소외가 사라지는 절대정신. 절대정신이 구현되는 실체로서의 국가. 헤겔우파와 트로츠키주의자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와서 정신적으로 감동적인 교감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매번 노동조합이 파업을 한다는 뉴스가 나올때마다 ‘저것들 집단이기주의야’라고 몰아대는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은 답해왔다. ‘노조는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다’ ‘공무원노조는 공무원 관료집단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임금을 받고 고용된 자라면 누구든 노동자가 될 수 있다’ …

    민주노동당은 다른 이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야한다. 아니 민주노동당은 정말로 ‘노동당’ 이기는 한 것인가부터 자문해야한다. 당 내에 노동조합이 존재해서 얻을 수 있는 당내 의사결정구조에 있어서의 민주적 요소 강화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이 과연 ‘노동당’에 어울리는 사람들인지 물어보아야만 한다.

    내부에서 당 기구의 결정과 활동을 감시, 비판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자발적인 조직의 구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야말로 2007년판의 스탈린주의자에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짚어내야만 한다. 민주노동당이 이러한 문제들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의 미래는 그 자체로 이미 암울하다.

    집권가능 운운하는 여부를 떠나서, 어차피 자신의 기치인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기억하자. 민주주의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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