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 깃발 아래 지렁이를 살해하는 자들
    By
        2007년 10월 20일 01:0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환경운동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괴롭고 또 괴로운 일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일이다. 그에 비하면 대통령을 뽑는 일은 차라리 한가한(?) 일이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여태껏 나는 결코 망설인 적이 없다.

    대통령에 나선 이들의 면면을 살피고, 선택하고 옹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반대하는 자들을 지지하는 이들과는 토론하고 논박하는 것으로, 심지어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결정과 선택에 대한 실천이 어느 정도 실현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그 정도로 어림없다. 환경운동은 그야말로 나 자신을 아예 통째로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무언가가 아쉬운지 혹은 미련이 남아있는지 늘 반항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이번에는 “환경운동을 하는 글쟁이”(p.112) 최성각에게 붙들릴 차례가 된 것이다.

       
     
     

    『달려라 냇물아』에 실린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지렁이를 살해하는 할머니(<지렁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존경심>)의 이야기. 저자가 전철을 타려고 가는 길에 벌어졌던 에피소드.

    꽃집에서 흙을 사가는 중이었던 할머니는 흙속에서 나오는 지렁이를 계속 던져버린다. 저자가 참견에 나선다. 지렁이야말로 흙을 흙답게 만드는 좋은 동물이라고. 그러자 할머니는 그런 참견이 싫었던지 이번에는 아예 지렁이를 꽃삽으로 동강내 죽여버렸다는 게 에피소드의 요지다.

    저자는 자신의 느닷없는 참견으로 애꿎은 지렁이가 죽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나이 드신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p.141)을 통탄한다.

    도대체 할머니는 왜 그러셨던 걸까? 아침부터 나이 어린 이에게 한소리 들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까? 얼마간 성깔 있는 할머니였나 보다. 물론 할머니로서는 아마도 아파트였을 당신의 집에 꽃을 심고 가꿀 정도로 마음의 여유는 있었지만 차마 지렁이까지 집에 들일 정도로 환경친화적이지는 못한듯 싶다.

    어쨌든 이제 최성각이 말한다. 환경운동은 나와 우리를 그리고 자연과 지구 전체를 살리는 길이라고.(아래의 문답은 본문 내용을 조금 가다듬어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꾸민 것입니다.)

    -원래 소설가로 대중들에게 알려지셨는데 환경운동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저는 어쩌다 환경운동을 하게 된 사람입니다. ‘어쩌다’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제 천직이라기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생명파괴와 자연파괴에 수반된 인간 사회의 부정, 불의에 대한 분노로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운동을 저는 ‘상식의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p.304)

    -그렇다면 ‘상식’과 ‘운동’은 어떻게 같고 다른가요?
    “좀 더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 좀 더 투명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경향과 다른 유형의 노력과 긴장,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환경, 생명운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시대가 요구하는 얼토당토않은 직업이나 치솟는 정의감이 변형된 습관의 운동이 되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서 한 치도 떨어져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을 들판이나 강둑에서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약하고 여리고 연한 빛의 코스모스를 노래하지도 않고 사는 삶은 사실, 매우 비극적인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p.80)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곧 인간들은 정녕 어떤 존재들인가요?

    “인간은 진화의 정점도 아니고, 이 행성의 주인은 더욱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가장 큰 재앙이 바로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다른 삶’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p.76)

    -과연 ‘다른 삶’을 찾기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누가 저 혼자 이 밀물처럼 거대한 욕망대행진의 물결에서 홀연히 일탈하려고 하겠어요. ‘산사(山寺)’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저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허락되어 있는 외길이라는 생각을 하면, 설사 뼈를 깎는 어려움이 수반되더라도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모두 함께 살 길이 정말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p.287~288)

    "진지한 생태학자들이 종종 말하는 대로 말하면, 속력을 늦추어도 이미 늦습니다. 유턴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 아주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은 오늘날, 영락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p.290)

    지렁이를 살해하는 할머니 에피소드에 견주어 말하면, 나는 지렁이 살해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렁이를 살려야 한다는 환경운동의 지지자에 가깝다. 그러니 나는 최성각의 참견과 지적에 거칠게 반항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청한다는 게 옳다.

    그러나 나는 흙을 사면서 지렁이까지 사지는 않는다. 나에게 있어 대통령 선거와 환경운동의 차이는 바로 이 점이다. 대통령은 내가 옹호하고 선택하지만 지렁이는 다만 옹호할 뿐 선택하지 않는다. 지렁이를 선택하고 살리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지렁이를 죽게끔 방치하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정의라는 깃발 아래 나는 그렇게 지렁이 살해자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매일매일 지렁이를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안녕하신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