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파시즘 또는 체제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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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4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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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과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온라인 공간은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비록 정부가 제한적 본인 확인제를 실시하고 정보통신법을 개정하여 온라인상에서도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는 추세이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온라인 공간은 오프라인 공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들이 인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청소년 소설 『우리들의 스캔들』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하여 멀쩡하던 애들도 인터넷상에서는 별 짓 다 한다며 이미 명시된 바 있지만, 익명성이 보장된 곳에서 개인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얌전해 보이던 사람도 실제로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나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수 있는 곳이 온라인 공간이다.

그러한 ‘익명성’이라는 특징은 온라인 공간만의 특성인 동시에, 일면 자신의 개인 신상이 갖는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익명성의 폐해 역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 하나도 빠짐없이 이른바 ‘악플’이라고 하는 악의적인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무슨 기사이든지 일단 욕하고 시비 걸고 보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때로는 그 폐해가 위험수위를 넘기기도 한다. 황우석 사건 때에는 문화방송 PD수첩 프로듀서들의 신상 정보를 가족들의 것과 함께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며 죽이겠다는 협박을 늘어놓은 사람들도 있었고, 디워 사건 때에는 진중권의 블로그가 욕설과 협박으로 도배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누리꾼들은 파시스트 군중과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품 속 2학년 5반 아이들의 카페인 ‘0205 비밀의 방’은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는 장소이다. 실제로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대화명 뒤로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쏟아 놓는다. 익명성은 묘한 매력을 갖는 동시에 가공할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할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교생 실습생의 미니홈피를 뒤져 그녀의 사생활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 일은 학생들의 비밀 써클, 교사들의 폭력과 맞물리며 나비효과처럼 예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킨다.

익명성의 폭력성은 비단 온라인 공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정신이 나간 듯한 폭력성을 보이는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주고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 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숨기지 말고 빠짐없이 기록하라고 강압한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써내지 않으려고 했던 아이들은 담임의 협박에 공포를 느끼고 별 수 없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풍문들을 기록하여 담임에게 제출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비록 담임의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기는 하더라도,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비밀로 유지하기로 했던 모종의 약속을 깨뜨리고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심지어 교생 실습생에 대한 이야기까지 적어내는 것이다.

단지 담임의 폭력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익명성이다. 만약 담임이 반 아이들을 한 사람씩 지목하며 일으켜 세워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말해보라고 했다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자신들의 비밀을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익명성이 갖는 폭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파시즘 체제에서 대중은 개인의 특성을 상실하고 익명성을 띈 군중이 되어 파시스트 지배 계급의 폭력에 동조하는 또 다른 폭력성을 보인다.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네티즌들이 파쇼적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것 역시 이러한 익명성의 폭력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의 파시즘, 그리고 그에 결탁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누리꾼들은 구사대와 경찰의 폭력에 신음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하여 노골적인 반감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이 파시스트 군중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익명성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체제에 균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복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익명성을 어떠한 방향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비밀 써클에 대한 교사들의 탄압이 시작되고 그에 발맞추어 담임을 위시한 교사들의 폭력이 거세지자 학생들은 그 폭력에 저항할 무기를 찾는다. 그 무기는 바로 21세기의 대중에게 공통된 생활양식이 된 휴대전화와 인터넷이었다.

그들은 담임의 구타 장면을 휴대전화의 카메라로 촬영하여 인터넷에 공개한다. 담임의 구타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고 결국 담임은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학생들이 익명성을 활용하여 체제에 균열을 낸 것이다.

물론 균열은 어디까지나 균열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체제를 전복하지는 못했고, 애초에 그러한 시도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담임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교사가 언제든지 다시 그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또한 그들 역시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 계속 파시스트 군중이 되어 폭력적인 양상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이렇게 마무리된다. 얼핏 보면 문제가 해결된 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이 갖는 미덕이다. 소설 속의 아이들은 혁명적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반동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입체적 성격을 보이는 대중들일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대중은 익명성을 통하여 파시스트 군중이 될 수도 있고, 체제에 균열을 내는 다중이 될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익명성을 어떠한 방향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익명성을 이용하여 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프로도’가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서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점이 부각되어 있는데, 특별한 개인에 의해 저항이 주도된다는 설정은 진부하며 짐짓 위험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프로도’를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학생 가운데 한 명으로 설정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저항을 주도할 힘은 특별한 개인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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