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세상,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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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3일 01: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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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매혈기(賣血記)』? 평론가가 피를 판 이야기? 아마 글을 써서 먹고 사는 평론가이니만큼 글을 팔아 먹고사는 애환을, 우리에게 제법 알려진 중국 소설가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에 빗대 말한 것이리라. 과연 『평론가 매혈기』에는 『허삼관 매혈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변형된 ‘허삼관 매혈기’다. 허삼관은 실제로 피를 뽑았지만 우리는 지식을 팔거나 육체를 판다. 정신적, 육체적 매혈 행위로 매일매일 밥을 먹고 산다. 나도 그렇다. 20대에 집어넣은 지식의 부스러기와 거스름돈으로 아직까지 밥을 벌어 먹는다.”(p.34~35)

   
 
 

아마 거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솔직한 고백이지만, 어딘지 씁쓸하다. ‘매혈-노동’ 너머의 희망을 말할 때에도 그렇다.

“영화를 보고 그 느낌과 감동을 글로 써서 먹고사는 평론가에게는 결국 영화가 남을 것이다. 좋아하고 지지했던 영화들이 담아낸 삶의 자취가 몸에 배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볶은 돼지간과 홍주보다는 몇 권의 책과 영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p.38)

소설가 김훈 역시 밥벌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김훈은 산문 「밥벌이의 지겨움」(『밥벌이의 지겨움』, 생각의 나무)의 첫 문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말한다.

밥벌이가 지겨운 것은 무엇보다 밥을 먹는 게 그렇다는 것이다. 밥은 한 번이나 열 번, 백 번 같은 식으로 횟수나 양을 채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p.35) 밥의 속성이 이러니 밥을 얻는 행위인 밥벌이 역시 다를 바 없다.

“밥벌이에는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p.37)

어디 이뿐일까?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는 ‘굶기의 예술’을 말한다. 아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자. 매혈을 말하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하고, 굶기의 예술을 말하는 이들은 정작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이들이 말하는 ‘매혈/지겨움/굶기’는 혹시 예술가/지식인들 특유의 오만한 자만이 숨겨져 있는 정신적 제스처는 아닐까? 설령 그럴지라도, 이 자리에서는, 그들의 오만한 제스처가 독자인 우리들이 그들에게 안겨준 은총이라고, 배부르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김훈과 김영진의 노동에서 같고 또 다른 것은 무얼까? 김훈은 거두절미하고 밥벌이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으로 몰고 간다. 곧 먹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더 이상 옳을 수 없는 사실-조건에서 출발한다. 반면 김영진은 평론가로서의 자아를 사유하고자 한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와 똑같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지금 좋아하는 영화가 미래에도 좋아할 영화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영화가 좋고 나쁘다고 말할 때 흥분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영화 사이에 어떻게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나는 자기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이류 평론가의 진심으로, 마루야마 겐지처럼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글을 쓸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p.56)

짧게 말한다면, 김영진이 존재를 말한다면 김훈은 운명을 말한다. 김영진은 희망을 원한다면 김훈은 파국을 희망한다. 김영진이 인문학에 가깝다면 김훈은 생물학에 가깝다. 김영진이 이제 막 계급장을 바꿔단 상병이라면 김훈은 말년 병장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김훈이 김영진의 미래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밥그릇은 자신이 챙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영진과 김훈 중 누가 더 밥벌이를 잘할까?”라고 호사가적인 궁금증만을 말하고 넘어가자.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겠지만, 단순하게 독서시장의 현상만을 놓고 말한다면 김훈의 완승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말로 하면 김훈의 비극적 생물학과 노련함에 우리는 많은 밥을 퍼주고 있다는 말이다. 밥벌이가 지겹다는데 밥을 퍼준다?! 밥의 세상, 참 묘하다.

김영진의 책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불만일 사람들을 고려해, 『평론가 매혈기』에 대해 짧은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인다. 우선, 영화평론가로서 김영진의 글은 읽을 만하다. 그 증거를 대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예는 어떨까? 문체를 말하는 사람이 문체를 무시해서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영진은 헤밍웨이의 문체를 아주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또 옹호한다. 영화의 용어나 개념을 훈장이나 암호처럼 받들어 떠드는 영화평론가들은 많지만, 글의 문체를 말하고 분석하고 옹호하는 영화평론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영진은 바로 그 찾아보기 어려운 평론가 중 한 사람이다.

다음, 『평론가 매혈기』를 읽으며, 김영진이 부러워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기억력에 관한 부분이다. 김영진의 기억력은 참으로 놀랍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영화감독 박찬욱을 처음 만났던 장면, 20여 년이 지난 그 장면을 그는 아주 생생하게 재현한다.

“어제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을 봤는데 말이야, 반 부르주아 카메라 스타일이 뭔지 알겠더라구. 수평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데…….”(p.97)

자신의 발언도 아니고, 20년도 넘은 타인의 발언을 이처럼 정확히 복기할 수 있다니! 내가 아는 한 좋은 평론가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평론가는 자신이 느꼈던 아름다움이나 감동을 대중들을 대상으로 텍스트로 재현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 ‘재현 텍스트’의 출발은 기억력이다.

평론가연하는 나로서는 기억력이라는 재능이 없다. 하여 나는 늘 나 자신을 타박할 뿐 아니라, “신이시여 왜 저의 질그릇은 여기까지만 만드셨나이까!”라고 애꿎은 하늘을 원망한다. 나의 밥벌이는 늘 죽을 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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