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뒤집힌 나, 노조사무국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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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2일 08: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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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남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없고, 자유를 누려보지 않은 사람이 더 큰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집단이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주장을 세상은 얼마나 진실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

    우울증 앓는 사람들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 의사 당원들의 병원에 가서 소변검사부터 내시경까지 비교적 꼼꼼하게 받는 건강검진이다. 이 검사에는 정신건강에 대한 항목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우울증 증세에 대한 진단을 받는다. 육체건강에 대해서도 결과는 비슷하다.

    종합적인 진단이 붉은색, 노란색, 녹색으로 나타나는데, 아주 건강하다는 뜻인 녹색을 받은 사람은 주변 당직자중 나 혼자 뿐이었다.

    좌파정당으로서, 언제나 지는 싸움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세상 모든 사건들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고 격렬한 시선으로, 부패한 주류언론을 뚫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고달픔, 거기에 가장 치명적으로, 하루하루 들려오고, 눈앞에 펼쳐지면서, 쓰린 가슴을 추스르게 만드는 당 내부의 모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는 건 사실 엄청난 자기관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민주노동당이 갖는 이 자기모순은 나에게 또 하나의 떠나지 않을 이유를 부여한다. 민주노동당에게 “민중을 말하기 전에, 먼지 우리 꼬라지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삶과 주장을 일치시키자” 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타파하게 하는데 앞장 설 소위 당내 개혁을 모색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얼마 전, 난 민주노동당 당직자 노조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점입가경이고 희대의 아이러니다.

    내가 사무국장? 남한테 사기치는 것 같은 기분

       
      ▲ 노조사무국장 된 일이 남에게 사기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는 필자.(오른쪽. 사진=민주노동당 노조)
     

    아이를 가졌을 무렵, 한 친구가 “그처럼 판타지를 많이 품고 사는 네가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어”라는 문자를 보내온 적이 있다.

    몽상가에다 이상주의자 심미주의자, 개인주의자. 냉정하고 치밀하며 꼼꼼해야할 노조 사무국장이 지녀야 할 덕목과는 정 반대의 것들을 줄줄이 자발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나다.

    4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도 새로운 직함으로 나를 소개할 때, 음절 하나하나를 똑바로 조심스럽게 발음하면서 천천히 말한다. 웃음이 나오려고도 하고, 꼭 남한테 사기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사실 여전히 한번도 걸쳐보지 않은 어색한 옷이어서 어떻게 여미는지도 잘 모르겠고, 계속 옷걸이에만 걸어놓고, ‘저게 지금 내꺼란 말이지’ 하고 암시하는 중이다.

    사연은 이렇다. 금년 상반기 들어서, 임금은 계속해서 체불되고, 이미 집행한 사업들에 대한 사업비 지급이 서너 달 째 동결되면서도 설명없이 막연히 사람을 기다리게만 하는 당을 보며, 난 당이 처한 자기모순에 급격히 눈을 떴다.

    갑자기 부채가 18억으로 늘어났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예기치 않은 엉뚱한 사업들에는 목돈이 펑펑 들어가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늘어난 적자에 대한 명확한 원인 분석도, 투명한 내역도 공개 안하고 당직자들한테 세액공제 사업만이 대안이라고 윽박지르는 당 지도부는 한마디로 피식 비웃어주기에 딱 적합했다.

    가난하다면 정직하고 평등하기라도 해야지 우리가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당의 태도는 그 먼 나라에 미뤄둔 ‘대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있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내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당 지도부를 신나게 공격하며 실력 발휘를 해야 할 적기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노조 집행부를 들들 볶아대는 가장 극렬한 조합원의 한 사람이 나는 되어갔다. 정보통신과 지적재산권 담당 연구원인 노조위원장의 자리가 내 자리에서 두 발자국 앞에 있었던 정황도 한몫 했다. 지나다닐 때마다 벌침처럼 아프게 한마디씩 쏘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 위원장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사무국장 맡아줄래요” 하는 거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라는 말을 꺼낼 때, 나는 “이제 그만 좀 할래, 너무 아프거든” 하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어쩌면 실제로 그는 두 가지를 다 원했는지도 모른다. 활활 타오르는 나의 공격 의지를 양분삼아, 그의 말대로 강성노조로 전환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던 한편, 내가 집행부에 들어오고, 대응에 대한 고민을 함께 짊어지면 좀 덜 아프게 그를 찔러대지 않을까 하는.

    마침 전임 사무국장이 개인적 사정으로 휴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문제제기한 사람이 총대 매는 게 당의 철칙이거든” 하면서, 이 해괴한 결정을 부추겼다. 그렇게 나는 노조전임자를 뽑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라는 단서를 달고, 사무국장이 되었다.

       
      ▲ 임금체불 등에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노조 조합원들이 피켓팅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민주노동당 노조)
     

    마음 속 불씨 하나 의지해서 어둔 길에 나서다

    가보지 않은 어두컴컴한 길을 마음속에 있는 불씨 하나에 의지해서 더듬거리며 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직함이 내게 당장 눈앞에 펼쳐 주는 일들은 평생을 해도 적응 안 될, 저 저주스러운 공문 따위를 만드는 일이다. 뜻은 눈앞에 있지만 과정을 고달프고 길은 멀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에 대한 가득한 불만을 옆 사람 하고만 토로하며 씩씩대다가, 민주노동당에 발을 딛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대안들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된 일이 기뻤던 것처럼, 소위 진보정당이 명쾌하게 뛰어넘지 못한 자기모순의 덫에 대해 냉소와 자학을 일삼다가, 여기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똑바로 하시지” 하고 잽을 날릴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그 뿐이다. 멍석을 펴주니, 나 역시 잽을 날리기는 커녕, 제 정신도 못차리겠다.

    노조의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의 조직실장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오페라에 가는 사람처럼 화사하고 여성스런 옷차림을 하고 나서자, 희완이 “그 사람이 너의 옷차림이 제시해주는 통념을 극복하고 너를 다시 보는데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야.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명석하지 않거든”. 하며 온건한 어조로 나를 만류했다.

    난 오페라와 민주노동당 노조, 유함과 강함, 여성적 화려함과 남성적 공격성을 병렬하는 정반합의 논리로 스스로에게 합을 향해가는 주문을 외고 싶었고, 극단의 대비가 주는 상상력을 공중에 날리고 싶었으나, 이번엔 그의 조언을 따랐다. 생각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다

    모순의 틀을 깨기 위해서 계속해서 또 다른 틀을 만들어 보지만, 새로운 틀을 만드는 순간 조직이 갖는 고질적인 병폐는 하나 둘씩 우리의 발목을 잡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내부의 싸움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태초의 순결한 의지는 내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로 소진되어 버린다.

    그 속에서 개인의 번잡한 욕망 따위야 꽃피어날 틈도 없이 사회적 대의란 무거운 흙더미 속에 묻혀버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흙더미를 뚫고 피어나는 꽃도 있고 풀잎도 있다.

    난 그 꽃들에 물을 주고, 눈을 맞추며, 종종 노닥거릴 뿐이다. 결국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고, 나의 발길은 오로지 날 자극하는 신선한 향기를 내뿜는 곳을 향해서만 움직일 터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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