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아직도 거기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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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10일 05: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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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연애와 직장이 닮아 있는 또 하나의 구석은, 한 가지에 반해 선택하게 되면 나머지 모두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눈멀 때, 우린 그 사람의 한 가지를 사랑하면서 나머지 모든 것에 기꺼이 윤색과 도취의 작위를 범한다.

    그리고 서서히 사랑의 환각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직면할 때, 환멸을 내 손으로 보듬어 살로 채워내는 것은 사랑을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내 최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을 통해 스스로 성숙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난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는 저 황홀한 문화강령과 감히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책 의제들의 그 발칙함을 보았을 뿐,다른 그 어떤 잡다한 현실에도 눈 두지 않고 기꺼이 이 세계에 발을 담궜다. 내가 생각하는 진귀한 가치를 오로지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없었다.

    그의 비듬을 털어주고, 주름진 눈가에 입맞추며

       
      ▲ 칼리와 아빠 희완.
     

    그것은 희완이 자신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시퍼렇게 젊고 타협을 불허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인 것에 압도당해, 그가 가진 다른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한 점 고민 없이 그와 함께 삶의 질주에 나서게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옆에서 말하지 않으면 씻는 것도 옷 갈아 입는 것도 늘 잊고,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러한 믿음을 옆 사람과 꼭 공유하고 싶어하는 진지함과 돌멩이 하나 놓치지 않고 세상사를 다 이해해야 하는 완벽주의로, 종종 사람을 지치게도 하는 그이지만, 기꺼이 그의 셔츠에 언제고 앉아 있는 비듬을 털어주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긴 식탁에서의 토론 사이, 핸드폰을 삽입시켜, 나만의 쉬어가는 방법을 마련해 가며, 그의 까칠한 손등과 주름진 눈가에 입맞춰가며 살고 있는 것처럼.

    이 소화도 이해도 안 되는 정파 갈등의 늪에 빠져 있는 정당. 노조를 슬금슬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금년 들어서는 임금 체불도 대수롭지 않게 하면서 미안해 하지조차 않는, 참 기가 찬 소위 진보정당. 당직자로 하여금 심심찮게 "일하는 사람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야"라는 푸념을 서슴없이 늘어놓게 만드는 나의 직장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난 기본적으로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가진 한 가지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였기 때문에, 이젠 내가 그를 살찌우고 나의 새로움으로 당을 신선하게 만드는 데 설탕 한 스푼만큼 기여할 수 있다면, 난 이 곳에서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당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직 거기 다녀?” 라고 묻는다. 바깥사람들이 묻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 안 사람들조차 종종, “왜 계속 다니는데?” 하고 허심탄회하게 물어온다. "아니, 그럼 당신은?" 하고 되물으면 “넌 좀 자유롭잖아”는 답변이 돌아온다.

    물론, 머리도 몸도 자유롭다. 대학시절부터 운동하면서 십여 년을 비슷한 사람들과 저 멀리 나부끼는 희미한 희망의 불빛 같은 것을 바라보며, 현실의 부대낌을 견디며 살아온 많은 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 긴 역사를 함께 해온 동지도 없고 따라서 배신할 대상도 없다.

    다 아는데… 난 신문 보고 안다

    때론 이 점이 당에서 일하는 데 핸디캡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빤히 들여다보는 정황을 혼자만 못 읽고 신문 보고 나서야 이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난감함을 굳이 극복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 정황이라는 것이 내 머릿 속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에, 좀 노력하면 알 수 있는 내막들에 대해서도 대충 귀 닫고 지낸 편이다.

    비록 운동하며 박힌 군살은 없지만, 삐딱한 모난 돌로 세상을 관통해온 세월은 있기에, 또 다른 시선과 접근을 당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어 보고, 동종교배가 열성인자를 낳는 건 불멸의 법칙이라 되뇌이며, 완전한 자유의지로 난 여전히 민주노동당에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첫번째의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는, 민주노동당은 내가 만든 문화분야의 공약을 받아줄 유일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가 교육처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국가가 일정한 수준까지는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공서비스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정신의 양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일궈내는 일은 그만큼 존재하는 일이 된다. 하나의 인간에게서 문화적 정체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비로소 그가 정신적인 개별적 자아를 구축한다는 의미와 같다.

       
      ▲ 토론회에 참석해 발표를 하는 필자.(사진=참세상)
     

    한 개인에게서 뿐 아니라 한 사회에게도 이 사실은 공통으로 적용되며 이 생각은 민주노동당 문화공약의 근간을 이룬다. 문화정책에 자본의 논리를 대입시켜, 마치 문화가 산업자원부의 문화섹션인양 취급하는 현 정부, 그보다 한술 더 떠서, 문화를 표방한 개발 정책에만 골몰하는 우파 정당의 문화정책과는 완전히 반대의 지향점을 지닌다, 민주노동당은.

    둘째, 적어도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생각들을 담는 유일한 큰 그릇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고 녹색정치선언을 통해 유기농법과 대체에너지, 환경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폭발 직전의 지구 위에 더 이상 성장이란 이름으로 토목공사가 남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를 제시한다.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도 민주노동당만이 하고 있고, 미국의 명분없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내모는 파병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도 민주노동당이다. 사회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경제주권, 문화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에 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결사적으로 막고자 하는 것도 오로지 민주노동당 뿐인 것이다.

    그런데, 주장과 일상의 간극에 민주노동당의 허점이 있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은 나무랄 데 없지만, 자기 자신 현재의 꼬락서니는 한심한 수준이다. ‘민중’의 삶을 불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와 자기 자신의 삶을 보살필 줄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사람들의 가슴에 파편을 꽂는다

    2007년 초에 만들어진 노조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까지, 당에서 임금은 예산집행 순위의 최하위에 있었다. 잔치를 벌일 넘쳐나는 풍성함이 없더라도, 투명하고 평등하며, 합리적이기만 해도 모두가 감사히 누릴 자세가 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에서, 대의를 향한 아름다운 원칙들은 당내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산산이 파편이 되어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그 파편을 꽂는다.

    여자인 내가 1년 간 육아를 위해 휴직할 때에는 잠잠했던 사람들이, 다른 남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하려고 하자, 끊임없이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그로 하여금 육아휴직을 실천하는 일을 거대한 운동을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그 남자동료의 1년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서 나오기도 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실험이 우리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은 명백하다. 실험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아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꾼다는 거짓말은 나부터 믿을 수 없다. 실천하지 않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더 멀리로 내달린다.

    늘상 비어있는 독방들을 그래도 기어이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지도부가 있는 상황. 지도부들도 당 내에서 각자 다른 자기 역할을 맡은 동지일 뿐임을 망각하고 이들이 다른 당직자들보다 열 배쯤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할 이유를 은근슬쩍 인정한다면, 어마어마한 관성의 무게와 자본주의의 선동에 사로잡힌 집단적 맹목의 상태를 극복해야 할, 대학평준화를, 비정규직 철폐를 어떻게 남들에게 설득해낼 수 있을까.

    “잘난 놈들은 더 누릴 권리가 있다. 억울하면 일류대학 가고, 정규직이 되라.” 이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선, 평등한 세상의 탄력을 체험하여 몸에 밴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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