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마 군부독재는 외세 탓이 아니다"
        2007년 10월 10일 0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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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IN> 제3호 ‘편집국장의 편지’는 버마 시위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고니족은 나이지리아 남동부 니제르 강 델타 지역에서 평화롭게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1962년 이 지역에서 국제 석유자본인 로열 더치 셸 그룹이 석유를 발견하면서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석유 이권 쟁탈전이 벌어지고 오고니족 전 인구의 10%가 아사하고 말았다.

    …약소국이나 소수민족에게 풍부한 지하자원은 은혜라기보다는 저주이다. 아랍 민중이 지옥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석유 때문이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친절한 이라크인은 석유만 나지 않았던들 티그리스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았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도 자원 부자이다. 삼모작이 가능하며 석유도 묻혀 있고, 천연가스 매장량이 엄청나다. 이 나라의 탄쉐 군부 정권은 1988년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를 연금한 뒤 18년째 철권을 휘둘러왔다.

    …탄쉐에게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내면서 장기 독재를 해올 수 있었던 힘을 준 것은 천연가스에 눈이 먼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업들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이다. 가스공사가 참여했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묵인했다는 뜻이다.” – 문정우 편집국장, 「미얀마 군인이 곧 우리 자신인 것을」, <시사IN>, 10. 9

       
      ▲버마 민주화 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뉴욕 시위대.(사진=뉴시스)
     

    이 글은, 버마 군부독재의 국제경제적 근거를 폭로하고, 다국적 자본이나 노무현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가난한 자원 부국을 바라보는 태도라거나 자원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다.

    우선 이 글에는 문화우월주의로 오해받을만한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가던 오고니족’이라거나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았을 이라크인’ 같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낙후된 듯 이야기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가던’ 수렵 채취인들은 소수였고, 불과 100년 전쯤 서유럽과 동아시아가 그러했듯 대부분의 인구는 농경에 종사하였다. 오고니족은 3.1운동보다 앞선 19세기 말부터 독립투쟁을 벌여왔다.

    이라크인들이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았던’ 적도 있겠지만, 그들은 조선 민족이 마늘 먹는 곰이었을 때부터 도로와 상하수도를 갖춘 도시국가에서 살았다. 그들에게는 인류 최초의 법전이 있었고, 강가에서 노래 부르기보다는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였다.

    침략자 미국의 3억 인구가 전쟁광이 아닌 것처럼, 이라크에든 어디든 ‘천성이 낙천적이고 친절한’ 어떤 족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 문명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제3세계 인민을 불쌍하고 무지한 미개인처럼 그리는 것 역시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하대하는 서구 중심적 세계관이다.

    ‘약소국이나 소수민족에게 풍부한 지하자원은 은혜라기보다는 저주’라는 명제는 심금을 울리지만, 사실은 아니다. 요즘 한국에도 자주 소개되는 베네수엘라 정치혁명이 상당 부분 석유에 힘입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문정우 편집국장이 들고 있는 나이지리아, 이라크, 버마 인민에게는 자원이 아직 ‘저주’이지만, 리비아, 남아공, 브라질에서는 점차 ‘은혜’가 돼가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자원 자체가 아니라 그 자원이 어떻게 쓰이는가가 문제임을 말해준다.

    19세기 영국은 세계 석탄의 절반을 생산했고, 20세기 초의 미국은 세계 석유 생산량의 75%를 차지했다. 이런 나라들과 제3세계 자원 부국 사이의 차이는 자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자원의 소비와 국내 경제구조가 조응하는가, 정치적 분배 구조가 어떠한가에 의해 생겨난다.

    <시사IN>이 흉내내고 있는 양심적 서구 운동가들의 인식, 온대 나라들과 열대 나라들이 자원을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에 의해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렸다는 식의 이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지정학적 결정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버마의 끔찍한 참상 뒤에 중국이나 다국적 자본이 숨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힘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그들은 버마 군부독재의 외부 조력자일 뿐이다. 한때 타일랜드와 라오스를 식민 경영했던 맹주 버마가 오늘날 그들보다 못한 처지인 것은 그들보다 외세의 침략을 더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같이 ‘사회주의’를 내걸고 나선 베트남보다 민주주의가 더 낙후한 것이 외세의 침략을 덜 받았기 때문도 아니다.

    못 사는 게 자원 탓이 아닌 것처럼, 버마나 북한 같은 나라 인민의 권리가 짓밟히고 있는 것은 중국 탓도 아니고 미국 탓도 아니다. 그 나라의 위정자들이 잘못된 정책을 펼쳐 나라를 망치고, 인민은 그에 항거하거나 대체할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 잘못한 걸 남 탓으로 돌리는 건 실패한 지배자들의 버릇이다. 그런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어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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