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라이트에 쫓기고 경찰 보호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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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07일 1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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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민주노동당

    1년간의 휴직을 끝내고 다시 당에 돌아왔다. “어, 다시 돌아왔네?” 가 주된 반응이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라는 말이 생략된. 다시 돌아 왔다. 8개월 된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를 이끌고. 들어온 첫 해엔 변변히 일도 못해봤고, 두 번째 해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프랑스에서 보냈다. 세 번째 해에야말로 제대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으론 늦게 엄마가 된 흥분을 몸소 실천하고픈 마음 또한 간절하여, 아이와 살 부비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었다. 기꺼이 몸 바쳐 충성하고 싶은 두 가지 사이에서 모든 일하는 엄마들의 딜레마를 겪으며 내 몸은 지옥의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파리에 들려온 우울한 당 소식들

    스스로 한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느슨하게 출근하면서도 정시에 퇴근해 아이와 몸 바쳐 놀았다. 못다한 일은 아이가 자고난 밤과 새벽에 해야 했다.

    파리에서 간간히 들어왔던 당에 대한 소식은 대체로 우울할 뿐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하였고, 그의 지역구였던 울산 북구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자신하던 당은 패배하였다. 이미 두 번이나 구청장을 민주노동당에서 낸, 당의 가장 만만한 텃밭에서의 패배는 당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당대표를 비롯한 최고의원들이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총괄 사퇴를 하였고, 2기 지도부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소위 NL이라 불리는 자주파는 그간 확장된 세력을 선거에 집중시켜, 사무총장, 정책위원장을 포함한 주요 당직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2005년 12월, 다시 돌아온 당에 의외로 사람들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으나 무겁게 가라앉은 패배감과 싸늘한 자조, 소통을 어긋나게 만드는 불신에 휘감겨 있었다.

    일심회 사건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시기는 소위 간첩단 일심회 사건이 터졌을 때였다. 처음엔 모두가 조작이나 당에 대한 탄압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북핵 사태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으로 지도부의 방북이 계획되어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간첩 행위로 규정할 수 있건 없건, 당의 현직 간부가 북한 조선노동당에게 일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검찰 발표로 드러나자 당 내부는 심각하게 양분되기 시작했다.

    최모 전사무부총장에게 씌워진 혐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 350여명의 신상을 북한에 유출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 사안이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되는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심상정 의원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이는 간첩행위 이전에 “심각한 인권 침해이고, 진보운동의 일탈 혐의”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민주노동당으로선 조선노동당이라는 타당에 당직자의 신상을 알린 일종의 프락치 행위를 한 내부자가 있었던 셈이니, 더욱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최대 피해자는 민주노동당 그 자체

    그러나, 당론은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모든 탓을 돌리며, 최모씨를 옹호하는 입장과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안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판의 입장에 섰던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은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안 탄압이니,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하는 원론적인 얘기만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태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를 벌일 것을 결의했으나, 끝내 당내 진상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주파 중심인 최고위원회에서 진정으로 조사의 진행을 바라는 사람은 적었던 탓이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분명 민주노동당었다. 이후 민주노동당 깃발만 보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수는 더 많아졌고, 혐오를 드러내는 표현은 더 노골화 되어갔다. 대선을 앞두고 매우 부담스런 짐을 지게 된 셈이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민주노동당을 향해 빨갱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그 물증을 가져다 준 격으로, 그들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간첩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사 앞에는 연일 뉴라이트 회원들이 장사진을 치고, 삭발을 하고, 농성을 하며 북한으로 꺼져버리라고 고함을 쳐댔다.

       
     ▲ 소위 ‘일심회’ 사건이 터지자 극우세력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광분’했고, 민주노동당은 사건의 성격규정과 해법을 둘러싸고 양분됐다. 우울한 나날이었다. 사진은 관련 공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원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보수 단체 회원.(사진=뉴시스)
     

    참으로 유치하게도 그들은 “민주노동당은 악마”라는 사뭇 유아적이고 조금은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플래카드를 당사 주변에 걸어놓기도 했다.

    그들이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그 희한하기 그지없어 화도 나지 않는 그 플래카드는 당사주변에서 너덜 거렸다. 

    출근길에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느라 연일 당사 1층 로비에 들어차 있었다.

    우린 전경들이 우리를 지켜주는 이 진기한 세상을 만끽하며, 오늘도 뉴라이트는 계속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출근하곤 했다.

    뉴라이트 회원들의 항의 시위는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일에 속하지는 않았다.

    뉴라이트의 공격과 전경의 보호

    조폭 비슷한 외모의 아저씨들이 내지르는 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언사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과격한 구호, 삭발, 혈서 등은 그 대상만 반대일 뿐, 모두 80년대 학생운동 세력이 해오던 그것이었다.

    일련의 행위들이 전해주는 소름끼치는 폭력성을 보면서 비로소 시대정신은 저런 과격함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더니, 우리가 할 때는 사회를 위한 것이고 그들이 할 때는 추태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가는 길에 가해지는 과격한 행위, 더 이상 이런 모순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간첩단 사건 직후 감행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북한 방문에서 실제로 이들은 조선노동당이 아닌 조선사민당 위원장을 만나고 왔고, 다른 정당들에 이들이 갖추어온 정당한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별다른 성과없이 귀국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과 조선노동당은 끈끈한 연대를 구성할 아무런 근거도, 실체도 없는 두 개의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당이다.

    일심회 사건으로 당은 심각하게 들끓었다. 당 홈페이지의 당원게시판에 가장 활발하게 분당론이 개진되었던 것도 이 때였다. 새는 좌우로 날고, 역사는 정반합 변증법을 통해 진화하지만, 같은 당 내에 공존하는 이 두 방향의 생각은 진화 이전에 당을 갈갈이 찢어놓을 듯했다.

    당직자들은 당시 난데없이 친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잘 있냐는 전화를 받았고, 성질 급한 부모님들은 다짜고짜 그만 다니라고 종용해 오기도 하셨다. 택시기사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도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세워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면 싸늘하게 대화가 식어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민주노동당 조끼를 입고 뉴라이트 회원들 앞을 지나가다가 몰매를 맞을 뻔한 사람도 있었다. 뒤에서 "저 놈 잡아라" 하고 달려오는 뉴라이트 회원들을 피해 잽싸게 국회 쪽으로 달음박질 쳐서 봉변을 면했다.

    그 무렵 나도, 집에 들어올 때면, 누군가 (혹 국정원 직원 같은 이가) 내 뒤를 밟는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실제로 몇몇 당직자들의 집에는 국정원에서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의혹의 눈초리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면, “우리야 말로 피해자라구…” 외치고 싶었다.

    정파의 늪

    사실 난 당에 들어오고 나서야, 아직도 NL이니 PD니 하는 정파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어른들이 되게 할 일 없네. 대학교 때 하던 그 유치찬란한 싸움을 아직도 하구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철이 안 들었다는 건 아직 싸울 용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건 좌파의 필수적인 숙명이었다. 철드는 순간, 시퍼런 투쟁의식은 녹슬기 시작한다.

    그들은 다행이도 아직 철이 안 들었고, 운동도 놓지 않았지만, 정파도 버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당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의 근본 원인이 정파 갈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정당에는 정파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도 시기를 불문하고 피 튀기는 당파 싸움은 숙명이었으니, 정치조직에 정파가 있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파는 정당의 동생’이다. 오히려 정당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각각의 정파가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건강한 조직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때, 정파의 존재 의미를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종교단체처럼 비판과 분석, 합리적인 토론이나 공개적인 논의를 거부하며 금기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정파가 있고 그들에겐 당보다 정파의 이해가 우선한다면, 이는 당의 암적인 존재밖에 될 수 없다.

    합리적 토론과 공개적 논의를 거부하는 정파

    여의도 시절, 4층(사무처가 있는 곳-편집자)에 내려가면 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처럼 생겼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나는 오래지 않아 북한 사람들을 닮은 그들의 분위기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 동안 당에서 느꼈던, 저 오만할 만큼의 자유로운 지성과 비권위와 비형식이 약간의 냉소와 함께 맴도는 젊고 가난한 엘리트집단의 분위기는 자주파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은 5층 정책위원회만의 것이었음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실 난 자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사고의 중심에 민족통일이 있다는 것 이외에 자세한 그들의 생리는 알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온 이상, 민주노동당이 주창하는 대원칙에 합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가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니, 정파적인 편가르기를 피하고 함께 정책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화정책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할 때, 자주파 쪽 사람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광경을 연거푸 연출했다. 그러다가 ‘남북’ 문화교류 같은 단어가 나오면 그제서야 눈을 반짝 뜨고 반가워하고. 논의가 끝날 무렵,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민망스러워 "한 말씀 하시죠" 하면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언제나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3년이 지나도 전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이게 개인적인 현상인지 어떤지 알 길이 없어 주변에 물었더니, ‘이쪽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라는 것이 답이었다.

    더 재미있는 건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주체사상이란 단어를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주파는 현재 당내 최대 정파임에도 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 사항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서로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버릴 것은 버리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진정으로 순진하게) 생각하였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만, 정작 사고의 핵이 되는 그 사상은 논쟁과 토론을 거부하는 금기의 벽장 속에 가둬 두고 있었고,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점점 어리석고 비타협적인 집단으로 몰고 갔다. 금기와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이 교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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