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종된 원칙, 그래도 떠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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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05일 01: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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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위대한 두가지 부재 : 위계와 학벌

    나중에 듣자 하니, 공동으로 면접을 치른 사람들에겐 대학교 때 운동을 했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한다. 난 그 질문을 듣자마자 “아뇨. 연애만 했는데요.” 라고 서슴없이 대답했을 터이고, 당장, 족보를 따져 묻는 듯한 그 우문에 심사가 뒤틀려 나머지 질문들도 제대로 답했을지 의문이다.

    딴에는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라고 하는데, 학력고사 점수가 몇 점이었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운동을 직업적으로, 혹은 포교하듯이 행하던 무리들을 난 경계했고, 그들의 파시스트를 닮은 태도를 무시했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의장이었던 사람은 현 여당 국회의원 오영식이다.

    파시스트 닮은 운동권 수괴들 지금 뭐 하나

    “민족의 태양” 운운하며 사회자가 과장스럽게 그를 소개하면 그는 신나게 올라와 웅변대회 나온 아이처럼 흥분된 일장 연설을 했다. 운동을 출세삼아 했는지, 하나같이 수권정당이나 우파정당에 들어가 권력의 노른자를 떠먹고 있는 자들이 우리 세대의 운동권을 대표하는 자들의 현주소다.

    그런데 여기서 또 운동족보를 들먹이다니. 사실 ‘운동권’이라는 어휘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 과시적으로 대열에 서지 않으면 시대에 대한 고민도 실천도 하지 않는 자라는 건가? 운동권과 비운동권. 그런 단순한 이분법으로 사람을 가르는 집단이란 걸 나에게 진작 알려주었더라면, 지원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개척한 길로 따로 들어온 덕분에-불행인지 다행인지-일어났을 지도 모를 초입에서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첨엔, 당연히 모두가 의욕에 차 있었다. 우리들 뿐 아니라, 기자들도 그랬다. 기자들이 그랬다는 건 일반대중의 시선 또한 그랬단 얘기다. 지지율 12%로 17대 국회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킨 민주노동당은 국회입성 직후 25%까지 치솟은 지지율에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민주노동당 최초의 공채 연구원들과 보좌관들에 대한 취재열기도 대단했다. 나만해도, TV를 비롯 서너 군데의 신문과 잡지에서 연신 인터뷰를 가졌다. 심지어는 MBC에서 인물 다큐멘터리가 기획되기도 했었다.(진행되다 엎어졌지만)

    MBC 텔레비전과 가졌던 생방송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이 어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널 알아보는 걸 보니, 똑똑한 집단인가보다” 라고 하셨던 엄마의 답변을 그대로 전했다. 실로 엄마가 내게 던진 생애 최고의 찬사였다.

    진작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언니는 물론, 엄마도 나의 선택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나와 언니의 강력한 요청으로 비례대표는 민주노동당을 찍으시기도 했다.

    어색하던 ‘동지’ 호칭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여기선 서로를 OOO동지! 라고 부른다. 첨엔 그렇게 불리는 것만으로도 어색해서, 그렇게 불리고 나면 표정이 수습이 안돼, 어벙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OO씨라고 부르는 데에 대한 무언의 압력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의 단어인 ‘동지’는 민주노동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그 의미의 정당성 때문에 난 오래지 않아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되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우리들 사이에 각별한 동류의식을 불어넣음은 물론이다.

    멀쩡한 공당에 월급 받고 다니는 거지만, 마치 비밀요원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 그게 은근한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명칭은 연령의 고하나 직위의 상하를 희석시키는 수평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구성하게 만든다.

    특이한 성 때문에 어딜가나 존재하는 “목!” 이라는 호칭에서부터, 목수정 동지, 목수정씨, 목수정 연구원 여러 가지 표현이 공존하지만 중요한 건 그 모든 표현과 그 표현을 둘러싼 관계들은 수평적이라는 점이다.

    대리, 계장, 과장 등의 별로 듣기 좋지도 않은 직함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사람을 수직적인 관계에 놓으면서 피곤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관행이 사라진 그 자리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자리한다.

    출신 교 질문이 없는 곳

    또 하나 날 즐겁게 한 ‘부재’는 출신학교에 대한 질문의 부재이다. 정책연구원들은 각각 명확한 자기 분야가 있기 때문에 전직이 뭐였는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약사, 회계사, 노무사, 사회복지사 등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전직으로 가진 사람들이 반 정도 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정도를 취득하고 각자 전문분야의 연구원 혹은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간혹 박사들도 있지만 극소수다. 그런데 들어온지 3년이 넘었어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모르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이다. 아주 최근에서야 옆자리에 앉아있는 연구원이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걸 알았을 정도다. 그런데 알고도 그냥 “그렇구나”하고 서로 무덤덤했다. 다른 집단에서였다면 어느 쪽에서든 또 누구누구가 같은 학교며 한 번 같이 만나자는 둥 하는 쉰소리가 오고 갔을 것이다.

    출신학교부터 물어보면서 말을 트기 시작하던, 대부분의 우리사회의 인간관계들이 가지는 그 속 보이는 천박함에 비해, 여기에선 금기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걸 궁금해 하는 태도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긋지긋한 학벌사회에서 은근히 서로를 서열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 조직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대학서열을 폐지하려는 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실천이지만,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매우 위대한 실천이다.

       
      ▲ 17대 총선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에 보여준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3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다. 사진은 진보정당 원내 진출의 희망과 자신감이 가득 담긴 표정의 의원들.
     

    파삭 깨져버린 원칙, 석달만에 한산해진 기자실

    한 달간의 어수선한 연수가 끝나고 우린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보좌관과 정책연구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보좌관은 정책 담당과 정무 담당이 따로 있는데, 정무담당은 주로 의원과 호흡을 같이 해 오던, 당직자들이 맡았고, 정책보좌관은 공채를 통해 주로 채워졌다.

    40여명의 정책연구원들은 여의도 당사 5층에 자리 잡았다. 비좁은 책상, 빽빽한 좌석 배치. "여기 고시원이에요? 우리 텔레마케터에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그 불만을 듣는 기존 당직자들은 미동도 않는 기색이었다.

    우린 기차를 타고 단체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희망과 꿈에 가득찬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그래 한 번 가봐’ 하는 표정들이었다. 저건 뭘까 싶었다. 악의적이진 않지만, 저 심드렁하고 밋밋하며 피식 웃는 듯한 저 표정은.

    심드렁하고 밋밋한, 심상치 않은 표정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의문을 뒤로 한 채, 난 일속으로 한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책연구원의 일이란… 말 그대로 정책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일년에 한두 편 두꺼운 논문을 써내는 일이 우리의 주된 업무는 아니었다. 담당분야에 상임위를 둔 국회의원의 정책담당 보좌관과 해당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책적 사안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일한다.

    보좌관들은 의정활동의 흐름을 타며, 의사일정에 맞게 법안심사나 발의, 국정감사, 예결산 등에 주력한다면, 정책연구원들은 조금 더 장기적 호흡으로, 당이 제시해야 할 정책의제들을 만들어 내고, 길지 않은 논문들을 작성하여 논리를 만들어낸다.

    관련 분야의 시민단체들과 정기적으로 네트워크를 꾸리며 의견을 청취하고, 공동으로 토론회나 워크샵을 진행하기도 하며, 해당분야에 중요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당을 대변하는 입장을 정리하여, 정책논평을 작성하기도 한다.

    선거 때 공약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정책연구원의 고유 업무이며,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문이나 조례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 국회에 제출한 법안을 만드는 일도 정책연구원이 의원실과 함께 진행하는 일이다.

    언뜻 보기에 재미없을 것도 같은데, 문화정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순간에 재미와 의욕을 재깍 충전받을 수 있어서 내게는 진정으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

    민주노동당의 정책통으로 불렸던 이재영씨가 정책연구원들 앞에서 했던 말처럼,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개선시키고 변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잘만하면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입성 첫 해에, 나는 내가 꿈꾸었던 그 어떤 거대한 실천도 하지 못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성실하고 실력있는 정책보좌관과 한 팀이 되어서 계류 법안들을 차곡차곡 검토해가고, 함께 문화 영역에서 열리던 토론회에 참석하여 문화계 정책 현안들을 파악하던 어느 날, 그녀는 뜻하지 아니하게 사직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하기 시작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권위적 성향을 지닌 국회 쪽의 한 보좌관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똑똑한 정책보좌관을 민주노동당 답지 않게 짖누르고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정책보좌관의 사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 연구원들은 사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데 서너 달을 훌쩍 보냈다. 그 사이 해당 의원실의 다른 보좌관들도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떠나갔다.

    문제의 그 보좌관이 스스로 다음 해에 사직서를 내고 물러났을 때에야 싸움은 종료되었고 의원실은 그제서야 비로소 정상화되었다. 출산을 위해 휴직을 했던 나는 파리에서 그의 사직 소식을 들었다.

    당에 발을 딛자마자, 내가 알고 있던 정책정당의 찬란한 원칙이 파싹 깨지는 현장을 마주쳤다. 마치 내 뼈가 단단한 쇠사슬로 옥죄어져 바삭하고 으깨지듯 괴롭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즈음, 문득 시선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17대 국회 초기, 고3 교실처럼 빼곡히 차던 기자실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어 서너명이 보일까 말까 했다. 떠나간 기자들의 숫자는 떠나간 국민들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불과 서너달 만에 밀물처럼 다가왔던 기대와 관심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불과 서너달 만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자들

    그리고 다른 연구원들, 다른 의원실들도 모두가 우리처럼 심각한 갈등을 빚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차는 예상만큼 멀리 나가지 못했고,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문제들에서 작동해야 할 원칙들은 ‘정치적 해결’ 이라는 화딱지 나는 방식에 밀려나면서 당은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삐그덕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역에서 하차하는 성급한 승객들도 생겨났다. 멀리서 보기에 아름다웠던 경치가, 가까이서 보니, 시커멓게 탄 상처와, 뻥뻥 뚫린 구멍들, 때로는 돌무더기와 쓰레기더미도 있었던 거였다. 덩치는 갑자기 커졌는데, 문제를 거르는 자정 장치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아, 순식간에 당은 너무 많은 오염물질로 뻑뻑해 지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가 책상 크기를 가지고 투정을 부릴 때 보았던 그 모호한 심드렁함은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시나, 아직 멀었는데’ 하는 뜻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이들의 묵언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있던 원칙이 작동되지 않는 걸 보면서도 당을 떠날 생각은 금방 들지 않았다. 실망스런 지점에 봉착할 때, 우리가 비난하는 당은 정해진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칙이 있는데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떠날 필요는 없는 거다. 원칙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 원칙을 엿가락처럼 주무르는 사람들이 남고, 당은 그들의 것이 될 뿐이다. 영아사망의 전통을 깨고 기적처럼 의회에 발을 딛은 이 진보정당의 실험은 계속되어야 하고, 죽 쒀서 개주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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