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한 지원자와 독특한 면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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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04일 10: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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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레디앙>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않고 살아가기’를 연재를 한 바 있습니다. <레디앙>은 연재됐던 내용을 포함 필자의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이 글은 출간될 책 가운데 ‘나의 민주노동당 잠입기’ 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와 입장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것이지만,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시각, 내부자이면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라본 당의 속내가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 민주노동당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좋은 거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레디앙>은 앞으로 6회에 걸쳐 그 내용을 전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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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난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이다. 출산으로 휴직했던 1년을 포함하여 3년 넘게 여기서 일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야망을 가졌거나, 왠지 순수하지 못한 기회주의자일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정당인’에 대한 일반적 선입견에 ‘민주노동당’이라는 날선 이름을 합해 놓은 내 명함은 받는 사람들에게 잠시 표정관리를 놓치게 할 만큼 자극적이다.

스카프와 집시풍의 긴 치마 그리고 내 명함

더구나 당에 온 이후로, 특히 희완과 함께 살게 된 후론 그의 지지에 힘입어 더 자주, 나풀거리는 스카프며, 집시풍의 긴치마, 베트남에서 사온 알록달록한 옷들을 자유분방하게 걸치고 다니는 나의 겉모습과 주저 없이 사변적인 느낌들을 표출하는 캐릭터가, 얌전히 있어도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내 명함과 빚어내는 대비는 “황당” 혹은 “정리 안됨”의 효과를 종종 유발한다. 명함을 건네는 나는 이 의도하지 않은 코믹 상황을 견디느라 입가의 웃음을 배시시 베어 물게 된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현재 내가 지닌 직함은 일찍이 내가 지녔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비로소 나는 긴 모색 끝에 나의 지향과 노력이 만나고 있는 지점에 서 있고, 눈이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던 시절을 지나, 내리는 눈은 소복히 땅을 덮으며 두께를 더하고 있다.

더 이상 적어도 정체성의 균열이나 혼선 따위로 방황하지 않고, 앞에서 다가오는 거센 역풍을 온몸으로 딛고 서 있을 필요도 없으며, 내가 선 이 자리엔 늘 눈덩이를 굴리기에 넉넉한 함박눈이 내려온다.

절망의 골짜기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던 내 인생의 한 시기에, 불교신자인 한 친구는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란 말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쓰든 달든 지나고 나면 모든 경험은 약이 된다는 차원에서 그 말은 여전히 옳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모든 사회적, 개인적 경험은 결국 오늘의 선택을 하는데 십시일반으로 다리를 놓아준 셈임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한참 가다보니 “이 길이 아닌가 봐” 하며 방황을 거듭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방황해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 정해준 가치와 서열에 자신의 욕망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방황하는 인생이 훨씬 아름답지만, 비로소 내 길을 찾아 이율배반에 시달리지도 영혼을 배반하지도 않고 소복이 그 안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삶을 누리는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영혼을 배반하지 않는 삶의 기쁨

직장에서 내 눈앞에 꽂혀 있는 모든 자료들이 모조리 진정한 개인적 관심사이며, 아무리 재미없는 문체로 써 있어도, 밤새 그 자료들을 읽는 일이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여 인터넷을 켜면, 간밤에 타전된 갖가지 뉴스들에 대해 자리에 앉아 한두 마디씩 던지는 각 연구원들의 멘트들 중에 – 그중에는 꼭 한 대 갈겨주고 싶도록 한심한 생각을 유포하는 인간들이 꼭 끼어있는 여타의 사회집단에서와 달리 –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타 영역에서의 진보적 판단들로 나를 이끄는 키워드가 톡톡 튀어나오는 따위의 멋진 일들.

그리고 주말 저녁, 아이랑 깔깔대고 있을 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지방의원이 내게 전화하여, 문화정책에 관한 자문을 구해오면, 그것이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문화에 관심 갖는 민주노동당의 ‘동지’를 만난 기쁨에 허둥대며 즐거워하는 그런 일들이 지금 내가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 숲에서 벌어지는 전경이다.

프랑스에서 어학을 하던 시절, 퐁피두센터 내의 도서관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꺼내 읽은 나의 첫 전공서적, 『프랑스 문화정책』의 첫 장을 펼치며, 아직 어설픈 불어로도 선뜻 눈에 들어오던 그 책의 모든 목차들. 그 날렵하고 감각적인 어휘들로 적혀진 모든 챕터들을 순간 꼭꼭 씹어 먹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치면서 난 비로소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던 그 숲에 왔다는 걸 처음 감지할 수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충만하게 살포된 이 나라의 공기가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줄 아는 시민정신을 낳았고, 그 속에선 훨씬 더 쉽게 숨쉬고, 훨씬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책과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선택은 잠깐 동안의 발레단 외도를 제외하면,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셈이다.

작가주의 영화와 민주노동당

세상에는 상업 영화가 있고 작가주의 영화가 있다. 상업영화는 쉽게 말해서 이거 먹히겠다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작가주의 영화는 이 얘기를 세상에 꼭 하고 싶어서 만드는 영화다. 물론,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동시에 “먹히기도”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제작의 동기는 다른 곳에 가 있다.

   
  ▲ 2006년 5월,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필자와 딸 칼리.
 

민주노동당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먹히겠다” 싶은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으며 인기몰이를 하지 않는 유일한 정치집단이다. 지금 당장 사람들이 찬동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설정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만큼 설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영화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대박을 목표로 하지도 않고, 그렇게 포장할 물적 토대도 없으며 오로지 진정성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투박한 다큐 영화에서, 이제 좀 사정이 나아져서 얼굴이 알려진 배우 몇 명이 등장하는 저예산 영화다. 약간의 세련미, 표현의 미학까지 곁들여져 있다면 훨씬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있는.

당이 후자의 미덕까지 갖추지 못한 아쉬운 점이지만, 정당을 통해 문화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민주노동당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당이었다.

어쩌면 민주노동당 당원들뿐만 아니라 당직자들도 대부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당의 목표 중 하나를 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첫머리에 적고 있다.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너저분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들을 나열해 놓은 다른 당들의 그것과 비교해, 민주노동당의 문화강령은 누군가 내 꿈을 조금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꿈꾸는 문화정책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내 꿈을 어려운 말로 적어놓은 것 같은 문화 강령

내가 아는 직장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낸 후 시험과 면접 등을 보는 일이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에 들어오기 전까진 그랬다. 프랑스에 가기 전, 그런 방법으로 두개의 직장에서 각각 4년과 3년 동안을 일했었다.

처음 일했던 곳은 관광공사였다. 관광엔 아무런 뜻도 없었고, 대학 4학년이 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초등학교 때만큼이나 많고 뭘 덥석 집어 들기엔 조심스러워서, 고심 끝에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영리추구를 하는 대기업이 아니라는 것에 약간의 위안을 삼으며 전공 살려 들어간 곳이었다.

내 전공인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도 뽑았기 때문이었다. 영어, 러시아어 필기시험에 원어민과의 오럴테스트까지 받고 들어갔건만, 4년 동안 러시아어는커녕 영어를 쓸 일도 손꼽을 만큼이었다. 다행이도 문화축제 담당이었는데, 늘 두꺼운 장갑을 여러 겹 끼고 문화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4년 내내 나갈 궁리만 하다가 내가 일할 곳은 적어도 문화예술 방면이란 걸 뼈 속으로 알고, 드디어 방향을 틀었던 것이, 대학로에 있는 동숭아트센터였다. 개관 이래 최초의 공채였다는데, 면접 결과 기다리는데만 한달 반이 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가있던, 대표의 전속 무당에게, 지원자들의 사진을 보내 관상 면접까지 거치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관광공사 재직 경험이 마치 동사무소 방위를 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면, 동숭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은 대학원이라도 다녔던 것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연애와 많이 닮은 직장

처음 거길 다니게 되었을 땐, 구름 위를 떠가듯 기뻤다. 직장은 연애와 많이 닮아 있어서, 지긋지긋한 전 직장을 떠났을 땐, 그 해방감에 날아갈 듯하고, 꿈에도 그리던 새 직장으로 옮겼을 땐, 적어도 초기 3개월 정도는 “어쩜 이럴 수가…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그대로야”를 연발하게 된다.

드디어, 문화영역에서 두꺼운 장갑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젠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는데… 영리추구가 공간의 목적은 아니지만, 공간이 지속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유지비는 나와야 했고, 입맛에 딱 맞는 공연과 예술영화만을 다루면서는 그마저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끊임없이 타협을 강요하는 현실과 스스로가 부여한 문화공간의 사명 사이에서 우리는 그 해답없는 딜레마를 부둥켜안고 질문의 구덩이를 파며 세월을 보냈다.

거기 있는 동안 그 공간을 드나드는 향기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건, 지금도 축복처럼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향기로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지, 그들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한 자각은 나에게 좀 더 연필심을 갈도록 충동질했다. 3년 만에 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기다란 질문 목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프랑스에서의 석사논문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 잠시 내가 여전히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구인광고를 냈고, 북한산에 올라가 깔고 앉은 신문에 그들의 구인광고가 있었던 인연으로, 몇 가지 키워드만 슬쩍 맞춰본 채, 지원했던 국립발레단에서의 짧은 경험 이후, 난 결심 하나를 하게 된다.

허울만 번지르르 했던 애인이던 발레단에서 내 영혼이 쨍하고 전율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시는 이렇게 얼렁뚱땅 적당한 상대를 고르지 말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고, 나의 확신으로 상대를 설득시켜서 그것을 쟁취하자.

내 영혼이 주저 없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정책을 공부한 만큼, 마침내 호랑이 굴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각 당들의 사이트를 들어가 이들의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들여다보았다. 민주노동당의 그것은 다른 어떤 당의 것과도 달랐다. 흑과 백. 하늘과 땅이었다. 어려운 이론서적의 한 구절을 통째로 갖다놓은 듯한, 소화 안 된 공약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지향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당명이 풍기는, 편협하게 노동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듯한 인상과는 달리, 이 당은 매우 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유럽 사민주의적 이상을 가진 정치집단이었다. 더 이상 좀 더 선명한 현실적 가능성과 물질적 안위를 위해 내 영혼을 구겨넣지 말자고 결정하고 나니, 판단은 아주 쉬웠다.

난 민주노동당의 17대 총선 문화공약을 분석하고 이에 평가와 보완, 대안을 제시한, 리포트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전화를 걸어,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머지않아 공개채용 계획이 있고, 그 때가 되면 함께 심사하겠노라는 대답이었다.

정책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은 보좌관을 비롯한 분야별 정책연구원을 1~2명씩 뽑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직 공채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히기도 전 불쑥 지원을 해버린, 이 성질 급한 지원자에 대한 면접은 따로, 좀 독특한 방식으로 – 여의도 공원에 앉아 장장 3시간 동안 –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 달쯤 뒤, 희완과 합천 해인사에 들러 먼발치에서 답답하게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고 내려오던 길에, 울리던 핸드폰을 통해 합격통보가 날아들었다. 5대 1의 경쟁률이었다는데, 감사하게도 날 선택해준 것이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서 갔던 그 첫 시도가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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