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운전기사의 분통터지고 억울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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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01일 07: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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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8일 오전. 기자는 서울지법 32호 재판정 안에 들어가자마자 박권재씨(45)를 찾았다. 혹시 박권재씨가 정식재판을 청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옆자리를 두리번 거리며 한참을 찾았다. 재판정 정면에서는 젊은 판사가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벌금형을 받은 피고인들의 진술을 듣고 있었고, 피고인 왼쪽에서는 역시 젊은 검사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넣은 채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기자가 자리잡은 자리 앞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에서 첫 번째 자리에서 박권재씨를 찾았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박권재씨의 어깨를 툭 치고 눈으로 잠깐 밖으로 나오자고 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 한미FTA 집회 구경하다 일자리서 쫓겨나고 벌금형 받은 박권재씨. 그는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 중이다.
     

    “항소할 겁니다. 너무 억울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박권재씨는 1년 전에는 개인 자가용 기사였다. 동부이촌동이 집인 고용주를 위해 낮에는 자가용기사 일을 했다. 그러나 수입이 한계가 있어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6개월된 아이의 가장역할을 해왔다.

    가난하지만 평범했던 박씨가 재판정에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유는 지난해 우연히 거리에서 집회를 구경하다 경찰에 연행됐기 때문이다.

    지난 해 12월 6일 서울 도심에서는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주최의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는 대학로에서 시작해 동대문을 거쳐 명동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명동에서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일부 시위대는 명동 롯데호텔 방향으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연좌에 들어갔다.

    경찰은 야간 집회에 참석한 시위대를 연행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대리운전 오더를 기다리던 박권재씨가 함께 휩쓸려 연행된 것이다.

    “보니까 학생은 몇 명 안되는데 경찰은 수가 엄청 많더라구요. 학생 몇 명을 경찰이 에워싸고 때리는 듯 보였어요. 그래서 경찰에게 이러면 안 된다 말리다가 연행된 거지요”

    담당 경찰도 난감해했지만

    기자 역시 이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경찰과 집회 참석자들 사이에 있다 함께 연행됐다. 기자와 박씨는 같은 경찰 버스에 연행됐으며 수서경찰서에서 함께 조사를 받았다. 그 후 9개월이 지나 박권재씨와 같이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고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이날 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정에 출석했다.

    연행된 박씨는 경찰 버스안에서 계속 억울함을 호소하며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지나가던 사람을 이렇게 경찰이 막 잡아둬도 됩니까? 난 시위도 안했고 구경하다 잡혀왔다구요” 처음에 박씨는 금방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자정이 가까워지고 조사를 받던 연행자들의 유치장 입감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자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는 내일 일을 나가야 합니다. 자가용 운전기사라 휴가를 낼 수도 없어요. 내일 안 가면 잘리는데 경찰이 책임질 겁니까?”

    박씨는 유치장 입구에서 울먹이며 못 들어간다고 소리쳤다. 기자를 포함해 같이 연행됐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박씨는 풀어주는 것이 맞겠다고 얘기해줬다. 조사하던 경찰도 난감해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지시 없이는 풀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결국 박씨는 유치장에서 이틀밤을 꼬박 자고 48시간을 꽉 채우고 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박씨는 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가족의 면회도 거부했다. 젖먹이 아기를 업고 일산에서부터 수서경찰서까지 찾아왔던 부인을 그냥 되돌려 보냈다.

    자가용 기사 자리도 쫓겨나

    가족에게 유치장에 갖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중에 아내가 무척 섭섭했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어찌나 서러웠던지 다시 면회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이미 아내는 경찰서를 나섰다고 하더라구요”

    박씨가 운전기사 일을 했던 고용주에게는 갑작스런 맹장으로 수술을 해서 출근을 못했다고 둘러댔다. 밤에 몰래 대리운전기사 일을 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죄가 있던 없던 경찰서에 잡혀 3일이나 있었다고 하면 누가 자신을 계속 써주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맹장수술을 했다던 박씨가 너무나 멀쩡했던지 고용주는 믿지 않았고 결국 그 다음달 월급을 주는 날 그만두라는 얘기를 들었다. 두 아이를 키워야 하고 가정을 지켜야 했던 박씨에게는 청천병력같은 해고 통보였다.

    그 후 박씨는 법인택시를 몰고 있지만 수입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밤에 따로 하던 대리운전 기사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잊어버리려고 했어요. 액땜했다 싶어서요. 그런데 벌금이 200만 원이나 나왔어요. 200만 원을 낼 돈도 없고 너무 억울합니다. 경찰이, 검찰이, 법원이 이래도 되나요?”

    벌금 낼 돈도 없고, 너무 억울하다

    박씨는 법원의 약식명령서를 받자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위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박씨는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이 시작됐다. 판사는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이유가 벌금액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인지 물었다.

    법원의 약식명령서 공소사실에는 박씨가 지난 2006년 7월부터 수만 명 규모의 집회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일부도시에서 도청 청사 진입을 시도하며 불을 지르거나 관공서에 돌을 투척했으며 연행된 12월 6일도 대학로에서부터 명동입구까지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는 내용이었다.

    “공소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판사님”
    박씨는 자신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과정을 소상하게 얘기했다. 자신의 잘못이라면 길을 가다가 경찰이 대학생들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함부로 참견한 것 뿐이라고 호소했다.

    판사도 박씨의 얘기를 비교적 귀담아 들으려 했다. 박씨가 연행된 과정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검사는 달랐다. 오전부터 계속된 재판에 지쳤는지 검사는 연신 하품을 하며 졸았다. 검사는 판사가 구형해 달라는 요구에 졸다가 깜짝 놀라 서류를 대충 훑어 보더니 “박권재 피고인 벌금 200만 원입니다”고 너무도 쉽게 구형했다. 박씨는 허탈해 했다. 판사는 박씨에 대해 한번 더 재판을 하겠다며 10월 9일 오전 10시에 재판을 속개한다고 일러줬다.

    밤새 운전하고 재판, 재판 끝나고 밤새 운전

    재판정을 나온 박씨는 전날 밤새 운전하다가 한 시간 자고 나왔다며 이날 밤도 밤새도록 운전해야 한다는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우린 졸면 큰일나잖아요. 재판 받느라 하루를 꼬박 보냈는데 또 재판을 받으라고 하니까 부담되죠” 박씨는 한미FTA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데모는 대학생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다고 했다.

    박씨는 200만 원의 벌금을 낼 엄두를 못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해서 무죄가 될 때까지 끝까지 한번 가보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이렇게 재판에 나오게 되면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벌금이 제발 조금 나오면 그만 끝내야 할까봐요. 재판 때문에 굶을 수는 없잖아요” 박씨의 재판은 오는 10월 9일 오전 11시에 다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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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은 10월 9일 재판 내용도 보도해 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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