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달린 냉장고 “그래서 행복해요?”
    2007년 09월 27일 0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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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시대다. 삼성, 금성의 새 하얀색 냉장고는 가고 지펠, 하우젠의 총천연색 문짝 두 개짜리 냉장고가 냉장고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삼성, 금성 냉장고는 생필품이었지만 문짝 두 개짜리 냉장고는 삶의 질 그 자체다. 문짝 두 개짜리 냉장고는 “여자라서 행복하게” 만든다.

인터넷 냉장고 광고까지 봤다. 실물을 보진 못했다. 점입가경 설상가상이다. 세계와 단절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사회적 퇴행을 겪어야 하는 여자를 위한 아이템이다. 주방 냉장고 문짝에 달린 인터넷 엘시디 창은 주방에서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이 문을 열어 여자는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세계와 소통한다. 여자라서 행복할까?

여자는 어릴 때부터 개체를 뛰어 넘는 보편을 사유하지 않도록 훈육받는다. 여성에게 세계는 그 가족일 뿐이어야 한다. 어려선 아비를, 자라선 남편을, 늙어선 자식을 따른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여성이 삼종지도의 덕을 지키며 가정이라는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을 상징하는 공간이 부엌이다.

   
  ▲ 여성모델이 등장하는 냉장고 광고.
 

인터넷 냉장고는 부엌에 가상의 네트워크를 연결함으로서 여성의 현실적 고립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허구를 통해서나마 바깥 세상과 접속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줌으로써 물리적으로 문을 박차고 나갈 의지를 거세하는 욕망의 유사 충족물쯤이라고나 할까?

여자라서 행복한가? 부엌에서?

‘문짝 두 개짜리 인터넷 냉장고’는 사회적 욕망이 조직적으로 거세된 존재인 여성을 한 번 더 거세하는 아버지의 칼이다.

삼성의 지펠 냉장고. “여자라서 행복해요.” 가부장이 딸에게 명령하는 결핍. “넌 이 냉장고를 욕망하라. 그리고 소유하고 행복하라.”

애초에 욕망은 자유분방한 것이나,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욕망까지 명령받는다. 조작된 결핍. ‘문짝 두 개짜리 인터넷 냉장고’를 욕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자본의 명령을 받는 순간 결핍이 생겨난다. 그리고 거기까지. 결핍의 충족이라는 환상과 함께 여성은 부엌에서 유사 행복을 느끼면서 감금에 순응해야 한다.

‘문짝 두 개짜리 인터넷 냉장고’ CF 이미지는 자본의 이윤과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안락을 위해 여성을 부엌에 가두는 지옥의 문처럼 느껴진다. 분명한 건 ‘문짝 두 개짜리 인터넷 냉장고’로 충족되는 결핍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망상이 바로 자본과 사회가 우리 머리 속에 시공해 놓은 진짜 ‘지옥의 문’일 게다.

옛날에 다른 주제로 썼던 글에서 여성에 대한 부분만 발췌하고 손을 좀 봤다. 추석을 맞아 문득 이 글이 떠올랐다. 민족의 대명절인 연휴 기간 동안 한국 여성들은 부엌과 거실, 안방 사이에 있는 ‘지옥의 문’에 갇혀 냉장고와 조리장치와 밥상, 싱크대를 벗하며 지낸다. 여성에겐 명절도 ‘지옥의 문’이다. 종갓집 며느리에겐 제사도 ‘지옥의 문’이다.

자본주의는 약자를 가두는 지옥

얼마 전에 경상도 양동마을에 있는 수백 년 된 고택을 찾았었다. 대청마루 위에 각종 상들이 이층으로 쌓여 있었다. 그 상들은 제사 때 쓰이는 물건이라고 한다. 시원하게 한담을 나누는 대청마루 위에 며느리의 ‘지옥’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상들은 이번 추석 때 모두 대청마루로 내려왔을 것이다.

한국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이유 1순위가 자식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서다. 본인의 자아실현이 아니다. 강남 전업주부도 자식 사교육 코치 노릇을 하느라 본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 여성은 도처에서 매여 지낸다. 그러면서 부엌을 수호해야 한다. 또 명절을 사수해야 한다. TV에서는 문짝 두 개짜리 냉장고를 보여주며 이것만 있으면 “여자라서 행복하다”고 화사하게 말한다.

그런데 딱히 여자만 불행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엔 불행한 사람들 천지다. 말하자면 여성을 비롯해 비정규직 노동자라든가 각종 약자 집단을 따로 따로 ‘지옥의 문’에 가둬 배제하는 사이에 나라 전체가 ‘지옥’으로 화하고 있는 것 같다. 나눔과 연대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명절에 쌓인 부엌 설거지 연대부터 실행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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