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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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27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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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가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고 있고, 새로 도전한 어느 CEO 출신도 ‘진짜 경제, 가짜 경제’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항구적 고정화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우리 나라의 대선후보로서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위치 선정인 것 같다.

    우리는 분명히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에 유례가 없게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이루어 냈다. 물론 노동과 인권의 탄압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경제는 외형적으로 성장을 계속하였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와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이 당연시되면서 성장주의의 결과만 강조되고 그 폐해는 서서히 가면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경제성장 일변도의 흐름의 배후에 ‘일직선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능주의적 발전철학이 있음을 지적하는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작은 것 같다. 왜냐하면 진보 진영이 정치적으로는 반 군부독재의 전선에 앞장서왔지만 과연 ‘일직선적’인 기능주의적 발전 철학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도 발전 철학에 빠져 있어

    베네수엘라의 해석적 시스템 이론 전문학자인 알레한드로 오초아 아리아스에 의하면, “ 기능주의적 발전 패러다임은 세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발전은 일직선적이고 예측 가능한 과정이다. 둘째, 발전을 추동하는 행위자와 발전의 대상이 되는 다른 행위자를 서로 연결시키는 가치관의 부여가 그 조건을 이룬다. 셋째, 발전의 결과는 원인 – 결과의 관계로만 제한되고 규정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나친 민족주의의 열정과 자신감은 이런 일직선적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지배계급과 일반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사회적 제도, 장치들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고, 발전 과정에서 눈에 잘 안 보이는 농업 부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현 상황 등은 위의 지적이 우리에게도 적용됨 보여준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현재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사태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많아지는 사회를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표적인 ‘하면 된다’는 식의 경제성장을 기능주의적으로만 이해하는 실천인을 대통령으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 괴롭지 않은가.

    최근 일어난 신정아 사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앞서 있었던 황우석 사태와 디워 사태와 연관지어 우리 사회의 심상치 않은 파시즘적 사회 문화의 흐름을 지적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사태들에 덧붙여 정몽구 회장 판결 및 이명박 후보의 실언(?) 들까지 생각해본다면 단지 대선의 결과로 누가 당선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해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 같다.

    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문제

    말을 달리 하면 높은 수준의 경제적 자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자본’의 파산 상태를 지적하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푸트남에 의하면, ‘사회적 자본’은 ‘문화적 가치’와 ‘시민적 규범’에 기반한 ‘소통’과 ‘사회적 연대’의 개념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법적 규범’과 ‘문화적 지식’을 추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최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우리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인용한 오초아 아리아스에 의하면, 어느 사회가 ‘사회적 자본’을 보존하고 풍부하게 하느냐 아니냐는 그 사회가 그려온 역사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자본’은 해당 사회의 유지와 장래의 발전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주변 여건에의 ‘응답’과 ‘통합’의 능력을 통해 드러난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현대사 궤적을 보면 ‘행정 권력’과 ‘돈’이 위의 ‘사회적 자본’을 대신하여 사회 통합을 이끌어 왔는데 이제 그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세박자 경제’보다 ‘세박자 사회’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우리 사회의 과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사회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좌파 진영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심상정 의원의 열쇳말도 잘못된 단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중요시하니 ‘세박자 경제론’을 간판으로 달았는데 그게 아니라 ‘세박자 사회론’을 들고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첫 번 박자도 ‘서민 경제’라는 단어는 굉장히 진부한 단어였다고 본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경제’ 등과 같은 말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 ‘모든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여성,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 포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심상정 의원은 필자가 존경하는 정치인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드물게 보는 길게 호흡하는 시대적 통찰력, 날카로운 비판 능력, 순발력 있는 구체적 정책대안 도출, 순수한 열정 등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전략적으로 오히려 철학이 담긴 단어를 간판말로 삼았어야 했다고 본다.

    필자는 평범한 일반 대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전문가적 시각 못지않게 대중의 시각이 중요하다. 그 시각에 살을 입히고 사회적 유통을 시켜 가능성을 펼쳐나가는 것은 전문가와 정치인의 몫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처럼 이 시대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90년대 들어 중남미 민중, 대중, 지식인적 대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한 것은 ‘거리의 민주주의’였고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포럼에서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남미, 거리의 민주주의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의 사민주의자들을 포함한 지식인과 중산층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알면서도 현실적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회피하였고 대중은 그냥 순응하면서 견디고 산다. 그런데 그들(중남미 대중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 후 약 10년이 지나 탈도 많고 문제도 많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정치 실험을 만들어 내고 있고 거의 기적과도 같이 원주민이 대통령이 되는 볼리바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죄송한 표현이지만, 원주민들은 거의 거지 수준에 있다. 얼굴만 원주민이고 머리와 가슴은 서구인인 전 페루 대통령 톨레도와 달리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는 과감한 변혁 정책을 진정성있게 펼쳐 나가고 있다.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위대 모습.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도 좋아하는(?) 보르헤스를 낳은 아르헨티나는 원래 사회 문화, 정치 지향이 친 유럽적이었다. 다시 말해 친신자유주의적 구조를 가진 나라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남미 좌파의 중요한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정치 지형의 커다란 변화가 90년대 초 대중을 아우른 사회운동세력의 연대와 소통과 특히 꿈 같은 ‘발언’이 없었다면 가능했겠는가?

    이런 변화의 배후에는 반 성장주의의 생태적, 문화적 매력이 담겨있는 새로운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아니 오래된 철학이 있다. 서구의 근대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생산물을 만들어 놓고도 그 지적 소유권을 서구인들이 슬쩍 가져다 렛텔 붙이기를 하면 그냥 그대로 조용히 있던 중남미이다.

    그들의 그런 인류학적, 문화적 자산은 유토피아적이고 경계문화적이고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이었다. 이를 음미하고 노래하던 중남미 대중들이 이미 공감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자산 또는 ‘사회적 자본’이 이제 세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엔진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상상이 지배한다, Buena Vista Social Club

    독자들에게 덧붙여, 이런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받고 싶으신 분들은, 이미 잘 아시겟지만, 쿠바의 <Buena Vista Social Club> 음악 시디를 사서 들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지식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하길 좋아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시각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가상을 상상이란 단어로 바꿔 놓으면 상상이 현실을 압도한다는 이야기이다.

    상상적인 말을 뱉어놓기 시작하면 그 담론이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되고 서서히 진지의 배치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진보에 유리한 어떤 사회, 경제적 구조가 하늘에서부터 갑자기 현실화되지 않는다. 특히 신자유주의시대에는.

    왜냐하면 담론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지식인들이 만든 게 신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처, 레이건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하이에크, 프리드만 같은 경제학자 즉, 지식인이 1947년부터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디언> 지의 조지 몬비옷에 의하면 하이에크가 주도하여 1947년에 스위스의 어느 별장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철학을 논의하는 Mont Pelerin Society가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하이에크는 그들의 구상이 승리하는 데는 약 한 세대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고 한다. 지식인들과 아주 큰 부자들이 지지할 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체제 실험을 세계에서 최초로 실행에 옮긴 것은 1973년에 쿠테타로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었다. 이 정권의 경제 담당 고위관료들은 ‘시카고 보이스’란 말로 유명해졌다. 그러고 나서 80년대 들어 미국에서도 레이건 체제가 본격화되었고 중남미 전체의 실험으로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중남미에서 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유명하다.

    다시 말해 ‘담론’(이야기)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를 깨트리기 위해서도 역시 ‘말하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반대의 지형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신자유주의 담론을 지식인이 아닌 대중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거대한 얼음을 깨트리는 송곳 구실을 남미의 평범한 대중들이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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