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자리와 천수관음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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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22일 01: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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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그친 후 세상은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간밤 바람 소리 솎으며 내 날개를 빗기던 이 누구? 큰 파도 닥칠까 봐 뜬눈으로 내 옆을 지킨 언덕 있었죠 날이 밝자 언덕은 우렁 각시처럼 사라졌죠. 아니죠, 쓰러졌죠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비 그친 후 세상은
    하루의 반성은 덧없고 속죄의 포즈 세련되지만
    찰기가 사라졌어요 그러니 안녕, 나는 반성하지 않고 갈 거예요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

    수 세기의 겨울이 쌓여 이룬 가을 봄 여름이에요 비 그친 후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한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
    이 빛으로 감옥을 짤래요 쓰러진 당신 위에 은빛 감옥을 덮을래요

    나는 울어줄 손이 없으니
    당신의 감옥으로 이감 가듯 온몸의 감옥을 접붙일래요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 전문

       
     
     

    세상에 비가 내렸고, 그 비는 세상을 쓰러트려버렸다. 비에 쓰러진 것들은 아픈 상처의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그런 풍경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는 풍경이다. 그 풍경 위를 잠자리 한 마리가 떠돈다. 그 잠자리의 비행은 2000년대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연대의 몸짓이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리라.

    사실 위의 시를 그냥 읽으면 그리 어려울 것 없이 잘 읽히고, 잘 느껴지는 감동적인 시이다. 그러나 시의 제목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과 겹쳐 읽으면 사정이 조금은 복잡해진다. 시의 제목을 보면, 이 시의 화자는 다름아닌 잠자리이다.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라는 구절이나 “은빛 감옥”을 ‘날개’로 해석한다면 잠자리가 분명하다.

    그런데 잠자리는 세상의 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혹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런데 그 잠자리가 세상을 슬퍼하고 아파한다? 천수관음(千手觀音)은 도대체 또 무엇인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을 지녀 중생들을 구제하고 무한한 자비를 베푼다는 보살과 잠자리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잠자리는 자신을 보호하던 그 무엇인가가 비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쓰러진 것을 아파한다. 그러나 잠자리는 자신의 아픔을 결코 단수(單數)로 말하지 않는다. “쓰러진 것들”이지 ‘쓰러진 것’이 아니다. 쓰러진 것은 세상의 쓰러진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잠자리의 상처-아픔은 잠자리 자신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제목의 ‘천수관음’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이며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잠자리의 눈이 지닌 생물학적인 특성에서 천수관음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된 것일까? 나의 이렇게 상상한다 :

    앞서 말했듯이 천수관음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을 지닌 보살이다. 천수관음은 세상의 아픔과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거대한 열망이 반영된 그 어떤 인격체인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같은 희원(希願)을 정작 시에서는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시에서는 잠자리의 아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행위 혹은 몸짓만을 등장시킨다. 손 내밀고, 몸으로 덮고, 접붙이는 구체적인 육체의 행위 혹은 몸짓이 바로 그것이다. 곧 시인은 시의 안에서는 아주 작지만 구체적인 행위-몸짓을 보여주고 시의 밖에서는 그 행위-몸짓을 아우르는 커다란 상상의 가능성을 그려 보이고 있는 셈이다.

    시 안에서 잠자리는 자신의 날개를 고통에 접붙이는 데 쓰며, 시 밖에서는 자신의 날개 곧 손을 천수관음에게 건네준다(“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잠자리와 천수관음, 시의 안과 밖을 애써 쪼개어 놓은 것일까?

       
      ▲김선우 시인.
     

    거기에서 나는 하나의 아름다운 연대의 장면을 느낀다. 잠자리가 고통에게 손을 주고 또 천수관음의 천 개의 손에 또 하나의 손을 보태는 것은, 천 개의 손과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천 더하기 하나를 통해서라도 구원의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하고자 하는 시적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곧 잠자리의 손 건네기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금 이곳에서의 구체적 몸짓인 동시에 만인의 행복을 얻기 위한 그 어떤 신화적 비전에 제 한 몸을 바치는 번제(燔祭)이거나 희생제의(犧牲祭儀)이기도 한 동시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운다는 민중적 비전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신화적 비전이, 시의 안과 밖을 나누며 서로 감싸안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렇게 민중과 민중은 만나고, 민중과 신화 역시 만나고 있다. 공동의 신화에 무감각한 이 시대에!

    그러고 보니 잠자리가 거느리고 있는 동사들, 가령 내밀다, 내려놓다, 짜다, 덮다, 접붙이다 등은 모두 손과 관련된 것들이다. 내게 손과 관련된 동사들은 뭐가 있을까? ‘쓰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평론집 제목처럼 ‘쓰다의 정치학’은? 그저, 잠자리에게 합장(合掌)하는 게 고작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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