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은 진보인가?
    2007년 09월 18일 03: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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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야 죽이기 아니면 죽기 식의 살벌한 승부인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허탈을 넘어 짜증이 나는 한나라당의 검증 공방이 장마보다 더 지루하게 지속됐던 여름이 지나고 있다.

보기 싫고 듣기 싫어도 모든 매체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던 날들이 지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매체의 헤드라인이 바뀌었다. 인터넷 포탈 검색도 이 두 가지가 1,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랜드 파업에 대한 경찰 투입과 아프간에서 한국인 납치 사건이다.

비정규직이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로 등장한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국민 다수와 주류 언론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이처럼 관심 있게 그리고 우호적으로 다룬 적이 없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의 상임위 점거도 뙤약볕 아래 민주노총의 철야농성과 집회도 그쪽 사람들이 늘 하는 일 이상이 아니었다. 2년 여를 끌고 있는 KTX 여승무원의 문제도 단식이라도 해야 찔끔 보도해주는 정도였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정규직인 시대에 대형유통점의 계산대에 있는 보통의 아줌마들은 너무나 친숙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500만의 비정규직이 본인 자신이거나 가족인 조건에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에서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2004년 김선일씨의 처철한 죽임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23명이나 되는 한국인 인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전 중인 이슬람 국가에서의 극성스러운 한국 기독교의 선교활동이나 이런 나라에 대한 출입국 통제를 하지 않는 우리 정부의 무사태평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왜 23명이나 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인질로 잡혀야 하는지를 생각해 주고 있다.

탈레반이라는 ‘테러 집단’이 사실은 미국에 의해 밀려난 집권 정부였고 한미동맹의 차원에서 미국의 요구에 의해 한국 군대가 멀고도 먼 이국 땅에 주둔하고 있다는 잊었던 기억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평등과 평화가 주목받다

이 두 가지 사건이 그것도 같은 시간에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87년으로부터 20년, 97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 오늘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가 평등과 평화임을 증거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 전문이 “민주노동당의 길은 평등, 평화, 해방의 길이다”라고 끝맺고 있듯이 평등과 평화에 관한한 민주노동당은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다. 그런데 평등과 평화만 가지고는 2% 아니 20%, 어쩌면 50%까지도 부족하다.

   
  ▲ 민주노동당의 녹색정치 선언 모습.(사진=진보정치)
 

이랜드 사태와 아프간 납치가 겹치던 그 이틀 후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합동연설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휴일도 반납하고 당 행사에 온 수백 명의 당원 앞에서 후보들은 사전행사로 녹색정치 서약식을 가졌다. 10개 항목의 녹색가치를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후보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면 이런 저런 약속을 하는 터인데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가 녹색과 환경이라는 주제에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세 후보가 그 내용 하나하나의 의미를 얼마나 진지하게 검토하고 서약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후보 연설에서 30분 가까이 주어진 발언 시간 동안 세 후보 누구도 조금 전에 자신이 서명한 녹색정치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날의 서약식을 위해 몇 시간 전부터 당내 녹색활동가들이 여의도에서 자전거로 이동을 했고, 또 이 행사를 갖기까지 당내 녹색활동가들이 벌여온 준비모임과 토론, 수련회 등의 과정을 알고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들에 의해 잊혀진 ‘생태’

후보들 중에는 시리즈 형태로 환경공약을 발표한 사람도 있고, 거의 언급하지 않는 후보도 있다. 그러나 준비된 내용의 유무를 떠나 후보와 공약내용이 일치한다고 느끼는 당원이나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냉정하게 말해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들의 생태, 환경 공약은 참모진들의 정책 베끼기와 짜집기 기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 생물종의 멸종, 농업의 산업화 등은 인류 전체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기로 몰아놓고 있다. 50년 혹은 100년만의 더위나 홍수, 남미 아르헨타에서의 여름 폭설, 급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 등 자연환경은 물론 인간종의 멸종이라는 공포가 현실로 나타나고 것이다.

서울에서도 동백꽃이 피고 사과의 고장 대구에서는 사과 농장이 사라진 것처럼 한국은 지구 전체의 온난화보다 2배 빠른 속도로 더워지고 있다.

생태환경의 위기가 모두의 책임이라는 식의 논리와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전투적 운동에만 몰입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 전 미국의 전직 부통령 엘 고어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다규멘타리 영화를 만들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주류 정치인 중에서는 드물게 환경을 자신의 정치적 캐릭터로 하는 엘 고어는 수많은 통계와 영상자료를 활용하여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현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환경에 대한 인식전환과 제대로 된 환경마인드를 가진 정치인에 투표하라고 권한다.

   
 ▲ 온난화로 북극해 얼음이 녹으면서 미국과 캐나다 쪽의 북서항로(왼쪽, 주황색)가 뚫렸다. 러시아 쪽의 북동항로(오른쪽, 파란색)는 얼음으로 막혀 있다.(사진=유럽 우주국)
 

이 영화를 통해 엘 고어는 미국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쿄협약에 서명하지 않은 부시에 대한 비난은 있었지만,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인 동시에 원전 수출국인 미국의 구조적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는 표명했지만, 그 전쟁이 석유에너지 확보를 위한 미국 자본가들의 더러운 침략전쟁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모두의 책임이 아니다

모두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채택 혹은 강요받고 있는 사회경제제도와 삶의 양식이 문제이며,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극단적 시장주의가 위기를 심화,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의 사회 변화 나아가 인류 역사의 발전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 빈곤 등에서 많은 진전이 이루어져 왔다. 생태와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도 대중적으로 많이 제고되었고 환경단체도 엄청나게 생겨났다.

그런데 지금처럼 환경과 생태를 어느 정도 고려하고, 조금 더 노력한다고 해서 자연과 인류의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지구환경의 위기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나라들이 부자와 부자국가들보다 더욱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 때문에 진보의 차별화된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용어는 환경운동가는 물론 정치인, 행정관료 심지어 기업의 상품광고에도 애용되고 있다. 자본은 환경마저도 상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1992년 리우 환경개발회의에서 채택된 이래 유통기한 지난 상품처럼 수명을 다했다고 여겨진다.

생태 없는 평등과 평화는 죽음의 욕망

독일의 녹색정치인 헤르만 쉐어의 지적처럼 “‘지속적이라 함은 자연의 순환과 연속적인 조화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한다’라는 명확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한낱 상투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보세력에게는 새로운 개념과 방법으로 녹색의제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생태 주류화’, ‘지탱가능한 개발’ 혹은 ‘최소한의 개발’ 등에서 찾아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북한 에너지 지원의 방안으로 경수로를 거론하는 것은 진보가 아닐 뿐더러 ‘평화를 위해 불가피한 북한 핵개발 용인’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전농과 농민 표를 의식한 농업공약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인 농업을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전면적인 개발총량제의 도입과 우리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하여야 한다. 당 밖의 녹색그룹이 민주노동당에 대해 우려하듯이 ‘우리 안의 성장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평등과 평화와 더불어 생태의 가치를 학습하고 토론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이라는 자격은 박탈되어야 한다. 평등과 평화 없는 생태는 낭만이며, 생태 없는 평등과 평화는 죽음의 욕망일 뿐이다.

* 이 글의 일부는 <미래공방> 4호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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