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당원’은 환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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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15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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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존경하는 이창우 선배께서 <레디앙>에 재밌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평당원이 정파라는 늪을 건너기 위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정말 평당원은 정파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살아서 저 험한 물줄기를 건널 수 있을 것인가? 그림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위태롭다.

    나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얼마나 애절한 가슴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 있지만 그 떨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줄 위의 평당원이 곧 아래로 떨어져 정파라는 강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줄 아래로 떨어져 정파에 빠지다

    나는 민주노동당 창당 첫해의 아름다운 당을 기억하고 있다. 서울의 어느 지부에서 창립총회를 하는데 아주 늦은 저녁에 모였다. 당원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말 그대로 일 끝내고 집에 가던 노동자들이었다. 어느 노점상 당원이 "저는 지금 한참 일할 시간에 나와서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할 땐 뜨거운 가슴이 복받쳤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자랑스러운 나의 당은 ‘퇴근길에 들르는 당’이고 ‘모여서 고기 먹는 당’이고 ‘술 먹다가 택시 타고 잡에 가는 당’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맨 날 모여서 술만 먹다가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함석헌 선생님이 생각했던 ‘평신도 신앙공동체’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도 사랑하는 나의 당을 ‘평당원 정치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모든 기억은 ‘정파’라는 괴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의 일이다. 창당 첫해의 아름다운 당은 첫사랑의 기억이 그렇듯이 한번 지나간 뒤론 잘 오지 않았다. 

    당을 ‘평당원 정치공동체’라고 간주했던 나는 창당 이후 몇 차례 중요한 정파사건을 겪으면서 그 때마다 소위 평당원들과 서명도 하고 게시판에서 ‘지랄’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나 싶다. 결국 뒷자리에 남은 것은 허탈감과 입심 센 평당원들의 릴레이 탈당 선언뿐이었다.

    정파는 정당의 동생

    그래서 내가 찾아낸 해답은 정파의 극복은 정파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사실 정파의 원리와 정당의 원리는 똑같다. 정파는 정당의 동생 같은 것이다. 당의 기초세포는 분회가 아니라 정파다.

    우리가 왜 처음에 진보정당을 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을 되살려보자. 기존의 정치판이 정말 ‘개 같은 정치’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치판 밖에서 맨 날 정치를 욕만 하고 있으니까 우리 입만 더러워질 뿐 정작 정치는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욕하기’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역겨워 하는 그 정치판에 참여해야만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당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당내 정파의 원리도 똑같다. 허구 헌날 정파 욕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새로운 정파에 의해 구축되기 전까지는 낡은 정파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조직’이다. 상대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이에 맞서는 쪽에서는 흩어진 개인의 합리적 판단이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면 그 게임의 승패는 보나마나 한 것이다. 조직화 되지 못하고 분산된 개별적 양심이란 그저 앙상한 수단에 불과하다.

    조직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조직뿐이다. ‘정파’에 맞서는 무기로 ‘평당원’을 선언하는 순간 이미 진 게임이라는 것이다. 

    평당원은 정파에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조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확실한 조직적 행동은 나 스스로 정파에 가담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자기 성향에 맞는 정파를 찾아 가담하기 불가능하다면 임시 조직 이나 서클 형태로 라도 조직적 행동의 일부분으로 자신을 구속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되도록 완성도 높은 조직형식을 추구해야 한다. 즉 궁극적으로 일상적인 조직과 내부의 민주적 의결구조를 갖춘 정파를 지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지 못할 경우 그것은 ‘당원 하나’의 정치적 의지를 당내에서 표출해주는 정치세포가 아니라 단순히 선거 때 표나 몰아주는 ‘인맥 연결체’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내 정파운동이 그동안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내 명망가들이 기존의 인맥 구조를 선거조직으로 활용해먹을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즉 당내 정치적 에너지를 자체 의결구조를 갖춘 정파조직으로 발전시킬 경우 자신이 거꾸로 그 조직의 포로가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이를 사전에 방지해 왔던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파를 ‘정파’라며 욕하지만 내가 볼 땐 이것도 정파가 아니다. 당내 친북세력은 최상층의 김정일주의자들과 중간층인 반미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최하층의 민족주의 성향이 수령관이라는 독특한 조직문화를 공통분모 삼아서 산발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종의 다단계 네트워크다.

    이렇게 내부의 조직 형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들은 선거 때 표의 동원부대로 활용될 뿐, 당원에게 일상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당원의 의지를 흡수, 대변하는 정치적 세포(=즉 정파)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파라는 호칭은 과분하다. 

    정파와 다단계 네트워크

    흩어져있는 평당원의 개별적 양심에 호소하는 방침은 모든 언론 매체가 우리의 내부사정을 매일같이 속속들이 보도해주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대통령 선거 때는 후보도 3명밖에 없고 어느 정도 사전 정보가 있지만 몇 달 뒤에 있을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20명 이상의 후보가 나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 정파투표를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도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평당원의 합리성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극히 비현실적인 얘기다.

    사실 평당원들에게 당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얘기다. 어차피 과두제의 철칙은 불가피하다. 입당한다는 것은 나의 정치적 과업을 나의 당에 의뢰해놓고 자기는 맘 편히 생업에 종사하겠다는 의미도 있다. 마치 변호사에게 자신의 법적 대리를 맡기는 것처럼 평당원에게 나의 당은 나의 정치적 대리체인 것이다.

    결국 정파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정파 없는 당은 없다. 단일정파 정당은 일종의 단세포 생물이다. 정파는 없고 평당원들만 모여 있는 당 역시 여자들만 모여 산다는 무슨 아마존의 왕국처럼 가히 공상 같은 얘기다. 정파 욕을 하기보다는 정파에 버금가는 조직적 행동을 구축할 일이다. ‘정파’에 맞서 ‘평당원’을 강조하는 앙상한 전략은 이제 끝났다. 정파는 정파로 극복된다. 

    굴러온 돌과 박힌 돌

    내가 볼 때 역사는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의 투쟁의 역사다. 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여기서 박힌 돌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튕겨 나갈 때 나가더라도 마지막에 한 방 먹이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한방’의 정신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탈당했던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한 방에 나갔더라면 벌써 분당했거나 적어도 당 외곽에 거대한 분당 근거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당 외곽에 분당 근거지를 창출해서 옛날에 한민전이 했던 것처럼 구국의 소리 방송을 당 안에 계속 퍼뜨렸다면 소위 당내 정파에 대해서도 커다란 압박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을 사랑했던 많은 평당원들이 장기에 걸쳐 한 명씩 빠져나가는 바람에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당내 권력투쟁을 계속할 것인지? 당 밖의 시베리아로 모두 나갈 것인지? 그 어떤 지침도 없는 공황 상태는 지금까지로 족하다.

    이제 조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정파에 가담을 하건, 임시 조직을 만들건, 반정파 투쟁위원회를 만들건 조직적 행동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반격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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