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경비원과 외로운 소년의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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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15일 11: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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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 시집『포옹』을 읽다가 출출해졌다. 배를 채울 무언가를 찾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라면에 생각이 갔고, 그 생각은 또 시집에 실린 ‘라면이야기’ 두 편에 다가갔다. 그저 아무생각 없이 라면만 먹는 게 나을까 아니면 라면을 생각하는 게 나을까? 몸은 전자이지만 머리는 후자이다. 후자를 선택해야 된다는 게 이 밤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밤의 연못에 비친 아파트 창 너머로
    한 소년이 방바닥에 앉아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나는 그 소년하고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나도 라면을 들고 천천히 밤의 연못으로 걸어들어간다
    개구리 두꺼비 소금쟁이 부레옥잠 들이 내 뒤를 따른다
    꽃잎을 꼭 다물고 잠자던 수련도 뒤따라와
    꽃을 피운다
    -<밤의 연못> 전문

    집에서 혼자 방바닥에 앉아 소년이 라면을 끓여먹는 풍경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따뜻한 행복이나 푸근한 어머니의 품을 느낄 수 있는 가정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 결핍과 외로움, 불행이 쉽게 연상될 뿐이다. 시의 화자는 풍경의 그 같은 빈자리 혹은 쓰린 자리를 메우고자 한다. 소년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물의 거리’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나에게서 타자로, 허기에서 포만으로, 고독에서 동행으로의 풍경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꽃잎을 꼭 다물고 잠자던” 연못의 주인인 수련마저도 꽃을 피움으로써 그 풍경에 기꺼이 동참한다. 마침내 따뜻하고도 배부른 풍경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따뜻하고도 배부른 풍경은 좀 싱거워 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단편적이고 직선적이기 때문이다. 곧 시적 화자의 의지 혹은 개입으로 모든 게 화해롭고 풍요롭게 변신할 수 있다는 지나친 낙관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삶도 시도 그렇게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뼈저리게 알고 있지 않은가.

    아파트 경비원 혼자 라면을 끓인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경비실에 앉아
    입을 벌리고 졸다가 일어나
    끓인 라면을 혼자 먹는다
    한낮에 맑게 울던 매미는 울지않고
    오늘따라 별들도 보이지 않고
    밤늦게 주차하는 자동차의 찬란한 불빛을 뚫고
    키 작은 소녀
    김치 한 사발을 들고 온다
    인간에게는 왜 도둑이 있는지
    인간이 왜 아파트를 지켜야 하는지
    인생을 지키기도 힘든 여름밤
    거미줄이 내 얼굴에 걸려 무너진다
    나는 아직 거미의 먹이가 되지 못하고
    거미의 일생만 뒤흔들어놓는다

    -<여름밤> 전문

    라면은 도대체 어떤 음식일까? 김밥에는 야유(野遊)의 느낌이 배어있고, 떡볶이에는 수다의 메아리가 들리고 커피에는 사색(思索)의 향기가 피어난다면, 라면에는 가난과 고독과 허기 그리고 도시의 비정함이 말려온다. 아마도 라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외로운 먹을거리이리라.

    그 라면을 이제 아파트 경비원이 먹는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아파트 경비원은 늙은 그 어떤 사람이다. 그가 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다 밤이 들자 라면을 먹으려 한다. 어디선가 그를 위해 김치를 들고 한 소녀가 온다. 그 소녀는 경비원의 딸 혹은 손녀일까? 아니면 홀로 라면을 끓여먹는 게 측은해서 김치를 보내는 어느 친절한 아파트 입주민의 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 시의 화자의 딸일까?

    어찌됐든 앞의 시와 달리 이번에는 시적 화자가 라면 먹는 풍경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는 대신 묻고 또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왜 도둑이 있는지 / 인간이 왜 아파트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그 질문은 인간을 누추하게 만드는 삶의 조건에 대해 질문이다.

    시인은 그 질문에 우리가 정작 지켜야 할 것은 다름아닌 “인생”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인생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아파트”를 지킬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누리는 약육강식의 삶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이다.

    그 우화 속에서 시인은 ‘거미와 거미줄’을 호출한다. 곧 우리들 삶은 거미줄 위의 삶이다. 거미가 들이닥치기 전에 잽싸게 빠져나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인 것이다. 시인은 그 사실에 진저리를 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거미줄과 그 거미줄의 주인인 거미에 맞서야만 한다.

    약육강식에서는 살아남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먹이가 되는 것이고, 라면을 먹는 자는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자이다. 라면에 김치를 올려놓고 먹고, 그 국물에 밥 말아 먹고 싶다. 누군가 함께라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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