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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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11일 0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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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휴가’ 봤는지 모르겠구나. 알다시피 난 눈물이 흔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자발없이 터지는 눈물보에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그래 난 눈물을 흘렸다. 흘렸다기보다 쏟았다. 너무나 낯익은 금남로의 그 아치, 아치 밑에 몰려서 악 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곤봉으로 가리키며 뛰어오던 얼룩무늬들,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참변을 그 영화 장면보다 먼저 머릿 속에 띄우고 있었던 까닭이다.

    ‘화려한 휴가’를 본 어느 후배의 반응

    너 역시 눈물바람 할 것 같아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 했지. 그래 친구야, 아마 너도 이 영화를 보러 가도 영화를 보고 나오지 못할 게다. 아마 영화에 없는 영상이 네 뇌리를 포위할 것이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 네 눈가에 어른거릴 것이다.

    하지만 80년에 태어난 신입 사원은 그 영화를 보고 그닥 큰 느낌이 없었다고 토로하더구나. 우연의 연속이고 인물도 평면적이고……. 내가 펑펑 눈물을 쏟고 있는 동안 그는 그 감정에서 천리 밖에 떨어져 멀뚱멀뚱 영화의 허점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민주노동당이라고, 목 놓아 외치는 내 친구야. 그래서 나는 내 눈물을 믿지 못한다. 그런 눈물을 흘릴 만큼 내 심장이 차가와지지 않은 것이 다행 아니겠냐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친구야, 신입사원의 심장이 차가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일까. 혹시 우리는 ‘심장이 뜨거운 사람들끼리’ 흘리는 눈물에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눈물에 갇혀 왔던 것은 아닐까.

    물론 눈물은 우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27년이라는 무지막지한 숫자가 붙은 요즘에조차 우리가 그 눈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보한테 시집가야 할 얼간이 평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있는 곳을 찾아 함께 울어주는 품성도 필요했겠으나, 눈물을 덜 맺히게 하는 방법을 찾고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지혜가 더욱 요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다. 그 지혜를 찾고 외화하는 과정이 진보일 것이다.

    또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찬연하였건, 또는 지난하였건 과거의 몫은 과거로 돌리고 정권 획득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정당’이다. 사람들에게 그 정당의 정치적 의지와 그 의지를 펼칠 정책을 들이밀고 설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정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일까

    너와 나의 당 민주노동당을 ‘진보 정당’이라고 부르고는 있다만 나는 가끔씩은 그 복합 단어의 두 단어 모두에 회의가 든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일까? 더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민주노동당이 ‘정권 획득을 노리는 정당’ 맞을까?

    이번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간발의 차로 과반을 면했다. 네가 내게 항상 눈 부릅떴던 일이지만 나는 그분을 찍은 적이 없다. 또 또 눈 부라리는구나. 아서라. 97년엔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고 2002년의 일로 나 같은 시정잡배에 시비걸기 전에 당내에 산개해 있는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의 제 5열들에게나 눈꼬리를 올려라.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대놓고 다른 당 후보를 밀었던 이를 당기위원장에 이름표 올리는 대략난감한 분들에 비해서 내가 더 욕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냐. 난 당직자도 아니고 당원이라기보다 그냥 ‘비판적 지지자’ 정도일 뿐인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 분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분의 과거는 안다. 그 분이 우리 (이런 대명사를 쓰는게 참으로 쑥스럽다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얼마나 다대한 공적을 쌓으셨는지, 진보의 불모지대라 할 한국 정치 지형도에서 진보정당의 깃발을 올리는데 그분의 이름의 크기와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안다.

    하지만 그 과거와 경륜만으로 "그래도 민주노동당!"을 사수하는 네가 "그래도 권영길"이라고 노가바하기엔 손색이 많다. 그분의 행적이 감동의 물결이었다는 것과 오늘 그분이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 내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빛나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선택

    유감스럽게도 권영길 후보는 이번 경선에 나선 이후 자신이 어떤 후보가 될 것이며 어떤 당을 만들 것이냐에 대한 설명에 게을렀다. 마치 자주파의 조직적 지지에 화답이라도 하듯 "혁명열사릉 참배"와 "조선노동당사 공유"를 외친 것은 정말로 그답지 않고 진보정당 대통령 후보답지 않은 말이었다.

    항용 자신을 민중 전체로 착각하는 주사파들의 정신 건강에는 일말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권영길 후보는 주사파들에게 이렇게 답했던 셈이다. “어떻습니까, 자주파 여러분 마음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국민들에게 “살림살이 나아지셨나”를 어눌하게 물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던 권 후보의 퇴행은 이미 거기서 시작됐다.

    권영길 후보는 스스로 "축구의 승리는 감독에게 달렸"으며 "민주노동당이라는 시끄러운 군단의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단 한번도 단일한 정치대오를 형성해 대선을 치러본 역사가 없는 진보진영 전체의 사령관"이라 자임했다. 문제는 그분이 후보가 되어야 할 당위를 그 포인트에만 철저히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당내 문제의 해결사라면 대선 후보보다는 오히려 당 대표에 부합할 일이다. 결국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이고 그 골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감독의 의무인 바, 유감스럽게도 권 감독님은 오합지졸들 끌고 악전고투하던 영웅담을 들려 주며 “내가 그 감독이었어” 하며 가슴을 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카드를 보여 주시고 있지 않다.

    나를 절망케 했던 1백만 민중대회

    "황무지를 손 갈퀴로 개간해 온 사람"이라는 그분 자신에 대한 그분의 평가를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황무지 개간권의 저당물은 아닐 뿐더러 계속 손갈퀴를 써서 땅을 갈아야 하는지는 냉정히 평가해 보아야 할 문제다. 그 어려웠던 과거의 눈물겨움에 공감하는 것과 그 과거를 오늘의 동력으로 삼음은 또 다른 영역이다.

    경선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권영길 후보에게 가장 절망했던 순간은 100만 민중 총궐기를 조직하겠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였다. 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툭하면 총궐기가 끌어내졌고 그놈의 ‘전민항쟁’이 신기루처럼 우리 눈 앞을 떠돌다가 허무하게 스러져 간 과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부흥회도 아닌 것이 대각성회도 아닌 것이 100만이 모이면 세상이 바뀐다는 선언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과도하게 유치하며 황당할 지경으로 퇴행적인 모습 아닐까.

    왜 안된다고 생각하냐고? 왜 민중의 의지와 권영길의 능력을 의심하냐고? 가슴 치지 마라. 킹콩도 아닌 주제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에 나섰으면 진보적 내용과 담론을 부각시키고 현재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갈라선 대척점을 명확하게 짚고 그를 폭로하고 우리를 내세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민주노동당에 시급히 필요한 것은 우리끼리 공유하는 감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무릎을 치게 하는 지혜다.

    100만 총궐기 주장이 ‘화려한 휴가’에 눈물은 커녕 분석하고 앉았던 후배 신입 사원들의 무릎을 치며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방식이 과연 사람들에게 ‘과연~~’이라는 감탄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그 100만 총궐기가 부활절 기독교인들의 집회와 분간될 수 있다고 너는 자신할 수 있니.

    무관심한 사람들이 무릎 치며 동의할 수 있게 만들어야

    우리의 문제는 내용의 빈약함도 있겠지만 그 내용을 담는 형식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백년하청의 구호와 사고방식과 관성이 ‘진보’를 감싸고 있다면 그 진보는 사람들의 앞길을 밝혀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진보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퇴물의 딱지를 마빡에 붙이고 “도를 아십니까” 수준의 찌라시 뿌리기와 그에 상응하는 대중의 냉대를 받게 될 것이다.

    당게에서 어떤 분은 자기가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안고 찬바람 속에 선전전을 했노라고 자랑스레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일종의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그 광경에 지나는 이들이 감동을 했을 거라 여긴다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고 그 자신은 마음 뿌듯했다면 나는 그것을 자위라고 부른다.

    이렇듯 성실함으로, 눈물겨움으로, 정의감으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던 시절이 이미 바람과 함께 달력 너머로 사라진 판에 옛 방식으로, 옛 인물로, 옛 눈물로 사람들을 묶어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대단한 착각 아니겠느냐.

    권영길 후보를 옛 사람으로 부른다고 또 울컥하는구나. 참아라. 내가 그가 왜 옛 사람인지 위에서 설명했지 않니. 일단의 자주파들은 노회찬 후보가 “집에서 쉬시라”는 얘기를 했다고, 그걸 네거티브라고 두고두고 곱씹었고 자기들의 흑색선전의 정당화 도구로 써먹었다.

    권영길 후보도 “예의없다”고 일갈을 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나는 그 정황을 보면서 내가 지금 정당의 후보경선을 보고 있는 건지 동아리 회장 선거를 하는 건지 조금 헛갈렸었다.

    운동판의 예의는 술자리에서 지켜 주면 된다. 국회에서 동문회를 하면 베테랑 보좌관들이 상석에 앉고 국회의원들이 술 심부름 한다고 하는데 예의는 그런 곳에서 지키면 된다. 권 후보의 나이를 시비 걸면 상대의 경륜 부족을 지적하면 되는 것이다.

    운동판 예의는 술자리에서나

    “불판을 가는 것도 능력이다. 노 후보는 불판 갈면 된다고 하셨는데 불판 제대로 갈아 보셨냐”고 반문해 주면 그만이다. 왜 거기에서 ‘예의’를 따지는 걸까. 그게 진보정당, 아니 그냥 정당에서 내세우는 대통령 후보의 올바른 마음가짐이었을까. 보수 정당에서도 사라진 장유유서의 예의를 진보정당에서는 “오늘에 되살려” 정권 획득에 이바지하도록 지켜야 하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권영길 후보의 과거는 참으로 빛났다. 한 번도 그에게 표를 주지 못했던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리며 그분의 일생이 후일 내 아이들, 내 손자들의 위인전에 등재되어 그들의 꿈을 올바르게 이끌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기대한다. 이번에도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찍게 되지 않기를……

    그의 과거가 빛났던 것은 그가 진보의 선두에서 손갈퀴로 진보의 영역을 개척하였기 때문이지만, 그의 오늘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제 그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멍청한 녀석이 슬로건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이 권영길입니다”라는 식의 인물 중심적 사고방식은 더 이상 보수정당에도 통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권영길이라니….. 전대협 의장님을 전대협이라고 우기던 분들의 입김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적시는 느낌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입김을 차치하더라도 그것은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의 슬로건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너무 퇴행적이다.

    “박근혜가 한나라당입니다.”라는 슬로건이 나왔다면 우리는 얼마나 배를 쥐고 웃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한 나라의 유일한 ‘진보 정당’의 역사와 자산이 한 개인 이름 석 자에 귀결된다고 단언하는 풍경이 펼쳐질 수 있을까.

    변화냐 퇴행이냐, 정체도 답보다 없다

    그래도 민주노동당이라고 주장하는 내 친구야. 네 말이나 네 동지들 말대로라면 결국은 민주노동당이 권영길이겠지. 나는 그런 민주노동당은 거절한다. 그런 권영길이라면 붓뚜껑을 향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냐 퇴행이냐. 그 둘 사이에는 길이 없다. 하다못해 정체도 없다. 답보도 없다.

    눈물겨운 과거의 상징이던 권영길 후보가 오늘 가장 퇴행적인 세력의 조직적 지지를 받는 아이러니가 슬프고, 그분을 두고 이런 말을 풀어놓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그분은 지금 민주노동당의 적절한 후보는 아닌 듯 하다.

    그분이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 삼수생으로 나서신다면 기꺼이 그분께 표를 드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삼수생의 입시 응시길에 고장난 차라도 되어 길을 막고 싶은 심정이다. 권영길과 민주노동당 둘 다를 위하여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이 아니다.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눈물 펑펑 흘릴 줄 아는 사람들만의 정당도 아니다. 오히려 화려한 휴가 보면서 덤덤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해야 하는, 그래야 살아남는 진보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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