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없이 노동자가 운영하는 공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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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9월 07일 0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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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아르헨티나 메넴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 모델의 기본 축은 달러화와의 1 대 1 환율제도 (Ley de Convertibilidad )였다. 그리고 광범위한 공공 부문의 사유화, 규제 완화와 개방화를 들 수 있다. 이로써 국내 산업이 생산해내는 것보다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더 싸게 된 이 모델의 특징은 고성장, 저인플레와 함께 엄청난 저고용이었다.

    즉, 고성장이란 밝은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이 문제였지만. 훌리오 고디오에 의하면, 1990년에서 1997년 사이의 아르헨티나 국내 총생산(GDP)의 연평균 성장율은 6%였다. 그러나 고용은 겨우 연평균 1%의 성장을 보였다.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으로 실업률 증가, 산업 붕괴

    그리하여 실업률은 1991년에 6.5%였던 것이 1993년부터 급격히 증가하여 1995년 5월에는 18.4%, 10월에는 16.4%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1998년부터는 총체적 생산성 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되며 엄청난 경기불황을 겪게 된다.

       
      ▲ 아르헨티나 정부와 IMF 협상 장소 밖에서 시위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
     

    그야말로 국내산업 정책과 사회 정책은 거의 실종되었고, 국가의 존재마저 희미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자리를 ‘글로벌 금융자본’이 대신 차지하게 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극단적 예를 아르헨티나가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까지 경제가 붕괴되었는가 하면, 아르헨티나 경제학자 알프레도 에릭 깔까뇨의 연구에 의하면, 2001년~2002년의 위기 직후인 2003년의 1인당 GDP가 1976년의 그것보다 15% 줄어들었고 국민의 57%가 빈곤선 아래 그리고 그들 중 20%가 극빈층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당시 대통령인 키치너는 “이젠 기업의 CEO 같은 역할을 그만두고 IMF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제, 노동자들에 의한 ‘기업복구’(Empresas Recuperadas)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의 경우, 기업이 파산하면 법정 관리 등에 들어가 경영진이 바뀌고 구조개혁을 위해 종업원이 다수 해고되면서 기업회생을 위한 과정에 들어간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라면 파산한 기업을 국유화시켜 국가가 관리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이와는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은 ‘라바까’(Lavaca)라는 조합에서 출판한 “사장 없이: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에 의해 경영되는 공장들”이란 책(Sin Patron: Argentinas Worker-Run Factories, Haymarketbooks, London, 2007)의 영어판 서문을 인용하고 있다.

    사장 없이,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에 의해 경영되는 공장들

    “2003년 3월 19일 우리(나오미 클라인 등을 지칭함)는 ‘사논’(Zanon)이란 도자기 공장의 천장에 숨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기로 된 작은 공들을 경찰에게 던지면서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다큐 영화로 찍었다….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간 것은 2001년 경제위기 이후 폭발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사회운동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나라를 망쳐놓은 경제모델에 대한 강한 비판 외에도 폐허 속에서 대안을 건설하는 데 열심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사회운동세력이 기존의 정치세력도 아니고 지식인들도 아니라는 점이다. 평범한 일반 노동자, 대중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 대안을 토론하였다는 점이다.

    “경제위기 동안 다양한 대중들의 응전이 있었는데, ‘주민 총회’와 ‘물물교환 클럽’에서부터 좌파 정당의 재등장과 실업자들의 대규모 운동까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머무는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바로 ‘복구된 기업’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실업과 자본 도피의 와중에서 파산한 기업들을 노동자들이 점유하고 새로이 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경영하게 되었다.”

    메넴 정권 말기 몇 년 동안 누적된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인해 엄청난 불경기와 기업도산이 벌어졌다. 이와 함께 아르헨티나 화폐와 달러화의 1 대 1 환율유지의 정책 효과가 벽에 부딪치면서 해외로의 자본도피가 극심해졌다. 그리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외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외채 재협상은 불가능해졌다.

    정당성을 잃은 정치세력들, 스스로 나선 노동자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존의 양대 정치세력(급진당, 페론당)이 일반 대중에 대해 정당성을 거의 다 잃은 ‘유기적 위기’ 상황에 처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배경은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한 지배계급이 정치적 정당성을 잃고 대중의 저항을 불러온 맥락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저항의 밑바탕에는 노동자, 대중들의 단합과 연대의 정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저항과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민중 회의’를 조직하는 등의 구체적인 대안추구의 흐름에서부터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에 의한 ‘기업 복구’ 운동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르크만 공장에서 파산한 공장을 점거 운영하는 노동자들과 진압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2003년)
     

    단지 노동자들의 창의력과 용기만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라 그 당시 아르헨티나의 전반적 사회의식과 정치 지형이 이를 용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세력들은 추후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고 하겠다.

    이들 노동자들에 의해 복구된 기업의 법적인 지위는 조합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노동자들)는 조합을 만들어 월급을 균등하게 분배하고 있으며 총회를 통해 의사결정을 한다. 우리는 육체적 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리에 반대한다. 그리고 직책도 서로 돌아가면서 맡는다. 또한 우리의 지도자로 뽑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위의 책).”

    한편, 아르헨티나 좌파 경제학자들이 이끄는 ‘남쪽의 잡지’(Cuadernos del Sur)의 편집장 에두아르도 루시따의 글에 의하면, 2004년 현재, 약 150개의 파산된 기업이 노동자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대부분이 중소기업인데, 경제위기로 파산한 중소기업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업별로 식품, 금속, 인쇄, 섬유, 자기, 호텔 등 다양하고 지역별로는 전국에 걸쳐 있지만 특히 수도권에 많다고 한다.

    법률과 제도화의 문제

    물론 2004년 현재,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특히 법률적 정비가 부족하여 앞으로 노동자 복구기업이 원활한 기능을 다하기 위한 법적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전국 또는 지방별로 법안이 여럿 준비되고 있고 일부 지방의 경우 관련 법률이 공포되기도 했다.

    ‘추적’(Pistas)이란 잡지에 기고한 훌리오 고디오의 논문에 의하면, 노동자 복구기업들의 구체적인 운동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광역주에서는 법률 제 5708이 공포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파산 기업의 자본을 정부가 몰수하여 그것을 노동자들에게 장기 대여 또는 기부의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자 복구기업은 ‘전국 회복기업 및 노동 협동조합 연합’(FENCOOTER)에 등록할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노동자 복구기업의 노동자운동 연대조직으로는 ‘전국 회복기업 운동’(MNER)과 ‘회복 공장 운동’(MFR)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전 사업주와 연계되어 임대 형식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주식을 노동자들에게 양도한 경우, 또는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양도한 경우, 사업주와 협정을 맺어 노사가 함께 공동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 복구기업의 노동자들이 원래 노조 가입 노동자들이었는데 파산된 기업을 복구시킨 후 이들이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기존의 노조 조직과 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자간의 유기적 관계를 위해, 예를 들어 금속노조의 경우, 복구기업의 노동자들에게도 기존의 노조 가입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던 의료 서비스의 혜택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금융지원이 중요할 텐데, 2004년 현재 중앙정부가 6백만 페소의 저리 융자 기금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금 규모도 작고 이자도 부담이 커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보다 더 체계적인 ‘운영자본의 순환적 연대 기금’ 등과 같은 준비가 필요하다.

    노동부와 국립 산업기술 연구소의 일부 지원이 있지만 총체적이지 못하고, 좌파 경제학자 그룹(Economistas de Izquierda)이 체계적인 지원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자 복구기업에 국가 등의 지원 필요

    그 방안 중에는, 노동자 복구 기업들이 약점을 보이는 마케팅 부문에 대한 국가 또는 지방 정부의 지원 사례를 들어 몇 년에 걸친 정부 조달 계약 등을 제안하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노동자 복구기업들 사이의 공동 구매 및 공동 기계 보수 등의 작업도 관련 기관의 지원 하에 추진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노동자 복구기업들 사이의 공동 협력은 실제로 상당히 활발하다고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소상인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내산 제품의 소비를 장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사업도 실업의 공포와 싸우는 노동자 복구기업들을 지원하는 일이 되고 있다고 한다.

    노동자 복구기업 중 하나인 바우엔 호텔이 주도하고 노동부와 사회복지부가 후원하여 2006년 4월 20일에서 22일까지 제 1회 노동자 복구기업 전국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약 60개 업체 생산품의 전시회와 함께 토론회가 열리고 문화 행사와 구체적인 기업 회복 과정을 다룬 다큐 영화의 상영도 있었다. 토론회에는 법률적 지원 방안, 금융 지원 등 공공정책방안, 대학 및 노조의 지원 방안 등에 대해 토론이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나오미 클라인의 평가에 의하면, 경제위기가 지난 지 이미 6년이 되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불평등한’ 방식으로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아직도 노동자들에 의해 지극히 평등한 방식으로 ‘복구된’ 기업이 존속한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상징성은 크고 전세계의 이론가들을 자극하고 있다.

    점유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그리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노동하는 곳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활했다”고 하며 이를 남미 사회운동세력의 대안 찾기 운동의 ‘세계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남미에서 분출한 ‘세계화’에 대한 대안 찾기 사회 운동의 상징은 브라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기업복구’ 운동은 같은 메르코수르 회원국인 브라질과 연대하는 데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남미의 커다란 사회운동의 하나인 브라질의 ‘농지 없는 농촌 노동자 운동’(MST) 단체로부터 빌려 온 것이 많다. 이들 백만 명 이상의 회원들은 ‘점유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는 구호와 함께 비생산적인 토지를 농촌 공동체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사실 브라질의 MST는 단순한 농민운동이라기보다 노동운동 단체로 보아야 한다. 브라질에서는 오래 전부터 농촌에서 임금 받고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여 왔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책을 만든 ‘라바까’라고 하는 조합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당시 만들어진 많은 조합들 중의 하나로, 수많은 거리 시위에 직접 참여함은 물론 출판, 언론의 대안 활동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책은 실제 노동자들의 증언을 몽타쥬 기법으로, 어떤 때는 시적 유머로, 어떤 때는 격렬한 투쟁의 성격으로 실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조합운동을 또 다른 조합운동이 책으로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결국 키치너 아르헨티나 정부가 새로운 성격의 조합운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사회의 흐름을 보면 오직 ‘신자유주의’ 세계화만을 거스를 수 없는 ‘세계화’의 대세로 보고 있으나 남미에서는 국가기구를 장악한 정치권력도 대안 찾기 운동의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여유 있는 시각 또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르헨티나 만이 아니라 ‘메르코수르’ 전체로 노동자 복구 기업의 조합운동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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